<-- 94 회: 그들, 그리고 사랑 -->
찻잔을 든 이화의 손이 덜덜 떨고 있었다.
이런 사내가 아니었다.
그녀가 생각하던 사내는 이런 사내가 아니었다.
뜨거운 몸짓으로 그녀를 안아주던 사내였다.
가벼운 눈웃음으로 살 끝을 스치는 봄바람 같은 사내라고 생각했었다.
이렇게 냉기가 뚝뚝 흘러넘치는 그런 사내는 아니었었다.
그러나 지금 그녀의 앞에 있는 사내는 찻잔을 쥔 그녀의 손을 덜덜 떨리게 만들 만큼 싸늘한 사내였다.
“내가 너 같은 년들을 한 두번 봐 왔는 줄 아느냐? 조금만 잘해주면 마치 내 무엇이라도 된 것처럼 기고만장해서 자기 분수도 모르고 들뜨는 천박한 년들 말이다. 내 아이를 가졌다고 나선 년들이 너 이전에는 없었던 것으로 알았느냐? 내 씨도 아닌 씨를 품고 내 아이인양 들러붙던 년들이 한둘이었다고 생각하느냐?”
“나, 나으리...”
“물론 네 안에 있는 것은 틀림없는 내 아이겠지. 그러니 내가 이만큼이나 아량을 베푸는 것이다. 나는 함부로 아량을 베풀지 않는다. 아량을 베풀면 베푸는 만큼 기어오르는 것들이 있어서 말이지. 하지만 네게 특별히 아량을 베풀 것이니 던져주는 것을 받고 내 눈앞에 나타나지 말거라. 어차피 네가 원하는 것이 그런 것이 아니더냐? 부귀영화 말이지. 영화는 주지 못하나 부귀는 조금 허락할 것이니 아이만 내놓고 사라져.”
거기까지 말한 수윤이 밖을 향해 목소리를 높인다.
“별채 준비는 다 되었느냐? 손님을 모시고 가거라.”
그 말은 이화에게 이제 나가달라는 뜻이다.
부들부들 떨며 이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취급을 받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대우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돈을 줄 것이니 자식을 내놓고 사라지라는 말을 들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단순히 돈을 원했다면 그녀를 원하는 양반들에게 몸을 팔았을 것이다.
단순히 돈만 원한 것이 아니었다.
병조판서라는 배경을 원했다.
그러나 그것을 줄 수 없으니 돈만 가지고 떨어지라는 것이다.
자식도 내줄 수 없다는 것이다.
*
“일년이면 적당하려나...”
수윤이 날짜 계산을 해본다.
이화가 해산을 하려면 앞으로 여덟 달은 지나야 할 것이다.
자신이 굳이 그 해산을 봐야 할 필요는 없다.
해산하고 갓난 아이를 집안으로 데려오는 일에 자신이 나설 필요도 없다.
이건 오히려 더 좋은 기회일지 모른다고 수윤이 생각했다.
이왕 이화가 아들을 낳으면 집안에서 그에게 장가 들라는 성화가 줄어들지 모른다.
서자라고 해도 일단 아들이 있으면 그의 어깨에 지워진 짐이 조금 줄어드는 것이다.
그러면 유경이와 유유자적 살아도 되는 것이다.
양친께 이화가 낳은 아이를 안겨주고 자신은 유경과 원하는 대로 살아가는 것이다.
“청나라에서 일 년 정도 지내다 돌아오면...”
청나라에서 일 년 정도 지내다 돌아오면 모든 것이 다 정리되어 있을 것이다.
이화는 아이를 낳고 사라졌을 것이고, 집안에는 아기 울음소리가 들릴 것이며, 유경은 자신만의 여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유경아...”
유경이가 자신의 아이를 낳아주면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없겠지만 그것은 꿈도 꾸지 않는다.
유경이 배란이 시작되기 전이면 관계를 피한다는 것은 수윤도 알고 있었다.
기생들은 으레 그런 법이다.
“네 아이였으면 좋았을 것을...”
만약 아이를 가진 것이 유경이었다면 백일 단식을 해서라도 양친께 허락을 받아냈을 것이다.
그녀가 낳은 아이와, 그녀와 함께 오순도순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아이를 가진 것이 그녀였다면.
“우리 유경이 뭘 하고 있으려나...”
수윤이 문득 두고 온 유경을 떠올렸다.
뜨거움이 배어있는 금침이 식기도 전에 그 이불 안에 홀로 남겨두고 온 유경을 떠올렸다.
“벌써부터 또 보고 싶으니, 이를 어찌할까...우리 예쁜 유경이...”
*
- 바랄 걸 바래. 쥐도 새도 모르게 죽어나가고 싶지 않으면 욕심 부리지 마.
이화가 병조판서 댁을 찾기 전에 행수 기생이 그녀에게 해주었던 말을 그녀가 떠올렸다.
- 단수윤이 그 인간 때문에 죽어나간 년들이 한둘 인줄 알아? 그 인간이 호락호락 널 받아들일 거라고 생각해?
하지만 자신의 태중에 있는 아이라면 통하리라 자신했었다.
자신은 다른 기생들과는 다르다고 자신했었다.
- 그 인간에게 매달리다 매달리다 결국 눈앞에서 은장도로 목을 찌르고 자결하는 꼴을 보면서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은 인간이 그 인간이야. 그 시신에 묻은 피가 마르기도 전에 다른 기생년과 술판을 벌인 인간이 그 인간인데 네가 그 인간을 어떻게 하겠다고? 그 집안에 들어가? 꿈 깨는 게 좋아.
자신만은 다르다고 생각했다.
천한 기생들과 자신만은 다르다고.
- 그 인간은 여기가 비었어.
그렇게 말하며 행수 기생은 왼쪽 가슴을 짚어 보였었다.
- 가슴 속에 아무것도 없는 거야. 사람의 감정을 느낄 만한 그 무엇도 그 속에 없는 거야. 그렇지 않고서는 그런 짓을 할 수 있을 리가 없지.
“아니야...아니야...”
이화가 입술을 깨물었다.
수윤이 그녀에게 내어준 별채는 그녀가 꿈꾸던 바로 그것이었다.
이런 별채에서 하인들에게 대접받으며 살고 싶었다.
어딘지 알지도 못하는 시골 구석에 처박혀 살고 싶지는 않다.
“그렇게 될 수는 없어.”
이화의 눈이 번뜩인다.
“그렇게 뜻대로 움직여 줄 수는 없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이화의 얼굴에 희미한 웃음이 떠오른다.
“죽여버리면...”
이화가 목소리를 낮춰 중얼거린다.
“하나 뿐인 아들을 죽여 버리면 결국에 남는 것은 내 뱃속의 이 아이 뿐이야. 결국 나에게 매달리며 사정할 수밖에 없어질걸?”
이화가 입술에서 낮은 웃음이 흘러나온다.
무서운 생각을 하는 그녀의 등 뒤로 그림자가 흔들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