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회: 그들, 그리고 사랑 -->
달빛 부서지는 밤길.
부서지는 달빛 속에서 바스락 거리는 소리를 추영이 놓칠 리가 없다.
“누구냐?”
한발자국 내밀려던 발을 슬그머니 멈추고 돌아오지 않을 대답을 기다려본다.
대답이 없을 거라는 건 추영도 알고 있었다.
계속 그랬었다.
벌써 한달도 넘게 이런 식으로 누군가 뒤를 밟고 있었다.
나쁜 마음으로 뒤를 밟는 것이 아니라는 건 추영도 느끼고 있었다.
해꼬지를 할 생각이 아니라 그저 뒤를 따르는 것 뿐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다.
다만 궁금한 것은 왜, 라는 생각이었다.
왜 자신을 따라오는 것일까.
할 말이 있는 것도 아닐 터인데 왜 따라 오는 것일까.
또 궁금한 것은, 왜 자신은 그를 내버려 두는 것일까 하는 것이었다.
잡으려면 충분히 잡을 수 있었다.
하지만 모른 척 내버려두고 있는 자신의 마음 역시 알 수 없는 것이다.
등 뒤를 따르는 말 없는 발걸음 하나, 그 정체를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하는 이 마음이 무ㅡ엇인지...
저벅 저벅, 일부러 큰 걸음으로 내딛는 걸음에 살금 살금 사뿐한 걸음도 빨라진다.
이것을 무엇이라 할 수 있을까.
그를 해칠 목적도 아니고, 흠모하여 쫓아오는 것도 아닐 것이요...
문득, 우습다 생각한 추영이 말없이 뒤따르는 그림자를 위해 발걸음을 천천히 옮겨본다.
*
“이 천하디 천한 기생년들이, 히끅, 니 년들이 감히 나를, 히끅, 니 년들이 감히 이 나를...히끅...”
“나으리, 취하셨습니다.”
휘청거리는 몸을 유경에게 맡긴 채로 사내라는 자존심은 지키고 싶은 듯 한마디 한마디 힘을 주어 내뱉지만 그 혀 꼬이는 소리는 어찌할 수 없다.
“내가 품이 낮다고 니 년들도 무시하는 것이냐?! 히끅, 끅...”
초저녁에 찾아들어 술병을 몇 병이나 비우더니 이렇게 취해 행패를 부리는 양반을 유경이 얼른 방 안으로 부축해서 들어간다.
“놔아랏! 이 년! 아직 더 마실수 있단 말이다아~히끅!”
기방 종노미가 미리 곱게 깔아놓은 금침 위에 아등바등 발길질을 하며 자지 않겠다 아이처럼 떼를 쓰는 양반을 눕히고 그 머리에서 갓을 벗겨 준 다음 우는 아기 달래듯 토닥 토닥 손바닥을 몇 번 쳐주자 그 술 취한 양반, 언제 그랬냐는 듯 코를 골고 잠이 드는 것이다.
양반네 잠든 것을 확인하고 유경이 방문을 나선다.
방문을 나서서 신을 신으려 할 때, 유경의 눈에 대문을 나서는 낯익은 등이 들어왔다.
“오라버니?!”
그 등은 틀림없는 산호의 등이었다.
기방으로는 절대 찾아오지 않을 것처럼 굴던 산호가 어쩐 일인지 여기까지 찾아온 것이 분명했다.
“오라버니~”
산호를 쫓아 대문 쪽으로 걸어 나가려던 유경이 발을 멈췄다.
그녀가 신을 신느라 앉아 있던 대청 마루에 달빛을 받아 빛나는 노리개 하나가 놓여 있었다.
아마도 장터에서 고른 것이리라.
조악한 장식이 티가 나는, 품을 많이 들인 값나가는 노리개가 아니라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지만 유경이 그것을 소중하게 집어 들었다.
장터를 어색하게 걸으며 나름 이것을 골라내었을 산호의 모습이 눈에 선한 것이다.
산호는 늘 그랬었다.
기생들로 넘쳐나는 기방에서 자랐으면서도 여인들 안에 있는 것을 어색하고 불편해 했었다.
하지만 그 어색하고 불편한 자리도 유경을 위해서는 참아주던 산호였다.
산호의 눈은, 산호의 손은, 산호의 마음은 언제나 따뜻했다.
그래서 그 등에 기대고 있자면 불안하던 마음도 언제 그랬냐는 듯 편안해졌었다.
그런 사람인 것이다.
세상에 지쳐 기댈 곳이 필요할 때 넉넉하게 안아주는 따뜻한 품, 따뜻한 등.
세상 모두가 손가락질 하더라도 괜찮다 웃어주며 안아줄 유일한 가족.
달빛에 빛나는 노리개가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워서 노리개를 든 손을 품안에 고이며 유경이 눈을 감는다.
*
- 오라버니?!
아직도 그 목소리가 귓가에 어른거려서 산호가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이 정도면 유경이 쫓아오지 못할 것이라 생각한 것이다.
잠깐 보고 싶어서 찾아온 것이다.
찾아왔지만 그 얼굴 대면하지는 못할 것이라는 건 산호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저 먼 발치에서 그 얼굴 한번 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붉은 홍등 새어나오는 빛에 흠뻑 물든 기방에서 그 붉은 빛에 물들지 않은 그녀의 모습을 한번 보고 싶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보고 있자니 그 단아한 입술 한번 흩어놓고 싶은 충동이 드는 것이다.
그 입술 한번 탐하고 싶은 욕심이 일어나는 것이다.
술 취한 양반을 부축하여 방으로 들어가는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마 그 이름 부르지 못하고 눈으로만 도장을 찍어본다.
손으로 만질 수도 없는 고운 님, 그저 눈으로만 애달프게 바라볼 뿐이다.
이게 무슨 꼴인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한참을 그녀가 들어간 방을 바라보다가 품 안에 넣고 온 노리개를 대청 마루에 두고 나온다.
그녀에게 잘 어울릴 것이라 생각하며 고른 것이지만 직접 전해줄 용기는 없어 그저 두고만 나온다.
뒤에서 그녀가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돌아가는 머리 위로 하얀 달빛만 안겨들고 있었다.
*
“서방님?”
노리개를 품고 돌아서려던 유경이 거친 숨소리에 놀라 뒤를 돌아봤다.
뛰어온 것인지 거친 숨을 삭이며 수윤이 그녀의 앞에 서 있었다.
“왜 이리...”
양반 체모에 뛰는 것은 가당치않다 말하던 수윤이 숨이 턱에 닿도록 뛰어온 것이다.
“오늘도 너를 보지 못하는 줄 알았다.”
수윤의 입에서 대뜸 그 말이 나왔다.
오늘따라 유난히 그녀가 보고 싶었던 수윤이었다.
실은 오늘 낮에 부친으로부터 심한 꾸중을 들었었다.
정신이 어디에 박혀 정진하라는 공부는 딴중이고 기방만 드나들며 주색잡기에 빠져있냐는 꾸중에 이제 이골이 날 법도 하지만 오늘따라 유독 심한 꾸중에 모친까지 가세한 것이다.
그런데 이상도 하지.
꾸중을 들을 때마다 이 얼굴이 생각나서 꾸중은 딴 중이요 빨리 이곳으로 달려오고만 싶었으니.
“내가 보고 싶지 않았느냐?”
수윤이 웃는 입매에 유경의 가슴이 세차게 뛴다.
이 남자의 웃음은 언제나 그녀의 가슴을 뛰게 만든다.
가슴을 뛰게 만드는 남자.
모든 생각을 잊게 만드는 남자.
“술상을 봐드릴까요?”
그녀가 생긋 웃으며 그의 손을 잡는다.
달려오느라 거칠어진 숨이 그녀의 입안으로 흩어졌다.
누가 보는 것도 상관없는지 그녀의 몸을 끌어안은 수윤이 거친 숨을 내뱉는 입술로 그녀의 입술을 찾는다.
입술을 찾자 비로소 목마름이 사라졌다.
달려오는 내내 그를 괴롭혔던 목마름이 사라졌다.
이 단비와 같은 입술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