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회: 그들, 그리고 사랑 -->
“여긴 어떻게 알고 왔어?”
문한이 갈 곳은 많다.
그런데 굳이 시영이 문한이 여기 있는 것을 아는 것처럼 찾아온 것이다.
분명 뒤를 밟은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렇게 잘 찾아올 리가 없다.
잠시 정신이 나가서 뒤를 밟히는 것도 몰랐던 자신이 한심스러워 문한이 멋쩍게 웃고 말았다.
“자네 가는 곳이야 뻔하지.”
“화는 좀 풀렸어?”
“화내는 것 아니었네.”
“우기기는. 화 냈었어. 보는 사람이 무서울 정도로 화 냈었어.”
“당황했을 뿐이네.”
“...”
‘두 번 당황하면 사람 잡겠네.’
문한이 속으로 그 말을 삼킬 때 시영이 한쪽으로 밀려나 있던 소반 위의 술병을 흔들어본다.
찰랑거리는 술 소리에 시영이 잔에 술을 따라 한 모금 들이킨다.
“사람이 간절히 바라던 것이 어느 한순간에 이루어지면 당황스러워 진다는 걸 새삼 알았어.”
술을 한 모금 넘긴 시영의 나른한 눈동자가 그 어둠 속에서 문한의 눈에 들어왔다.
“이십년 동안 간절히 바라던 것이었지만, 절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기에 더 당황해버렸어.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다가올 것이라 한번도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빈 술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하는 시영을 바라보는 문한의 눈동자에 조용한 미소가 차올랐다.
‘네 놈이 곱기는 곱다. 나이 마흔이 넘어, 이제 마흔 중반을 넘어, 단이 말대로라면 중늙은이가 다 되어가는 놈이 왜 이리 고운 건지 모르겠다. 시간이 멈춘 것인지, 늙지를 않는 것인지, 아니면 네 놈이라서 내 눈에 이리 고와보이는 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네 놈이 곱기는 정말 곱다. 오늘 따라 더 곱다.’
웃고 있는 문한의 눈 안에 시영의 모습이 조금씩 크게 담겨진다.
그 이유는 시영이 문한의 앞으로 가까이 다가앉았기 때문이다.
내뱉는 숨결이 닿을 만큼 가까이 다가앉은 시영의 모습에 문한이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느꼈다.
알 수 없었다.
이렇게 고운데, 이렇게 고운 님이 눈앞에 있는데 왜 이리 마음이 불안한 것인지.
오늘 따라 유난히 이렇게 고운데 왜 이렇게 가슴이 불안하게 뛰는지.
좋은 일이 있으려고 불안한 것일까?
오랫동안 기다려왔던 좋은 일이 있으려고 이렇게 불안한 것일까.
알 수 없는 불안에 흔들리는 문한의 눈동자 위로 시영의 손바닥이 올라왔다.
십여년이 넘게 새끼를 꼬느라 거칠어진 손바닥이 문한의 눈을 덮었다.
이십년도 더 전에 만났을 때는 기생의 손바닥보다 더 고왔던 손바닥이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며 이렇게나 거칠게 갈라져 버렸다.
손바닥의 움직임을 따라 눈을 감아버린 문한의 손등 위에 시영의 손이 덮여졌다.
손을 겹친 채로 입술이 겹쳐졌다.
아무런 말도 없었다.
갑자기 왜 마음이 변했는지에 대한 변명도 없었다.
조금 전만 하더라도 매몰차게 사랑 따위 개나 주라고 말하던 그 차가운 이가 이렇듯 변해버린 것에 한마디 설명도 없었다.
그래서 더 불안했다.
한순간에 변해버려서, 변명도 없이 변해버려서 불안했다.
그 불안한 문한의 입술에 시영의 입술이 겹쳐졌다.
손을 겹친 채 입술을 나누는 두 사람의 어깨 위로 소리 없이 어둠이 내려 앉는다.
고요한 어둠 속에서 입술의 젖은 소리와 간간히 내뱉는 작은 숨결, 그리고 사그락거리는 옷자락 소리가 울린다.
부드럽게 감겨들었다 뽑아버릴 듯 휘어 감는 혀끝의 열기를 고스란히 느끼며 잠시 가쁜 숨을 내뱉기 위해 입술을 떼어내 보지만, 다시 스치는 입술을 핥아 올리며 감겨드는 혀끝으로 열이 오른다.
불안했지만, 여전히 불안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생각이라는 것을 다 집어던져버리고 이 뜨거움에 충실하고 싶은 문한이었다.
머릿속에 생각 따위가 있을 공간은, 불안 따위가 있을 공간은 허락하지 않은 채로 그저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마음만 머물 것을 허락하는 것이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은 문한이었다.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숨 돌릴 틈도 주지 않고 입맞춤을 퍼붓는 시영의 낮은 신음소리에 문한이 자신의 팔로 시영의 얇은 허리를 단단히 감는다.
알고 있었지만 얇은 허리였다.
이렇게 얇은 허리로 어떻게 하루 종일 앉아서 새끼줄을 꼬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얇은 허리였다.
터질 것 같은 쾌감이 문한의 안에서 밀려 올라오고 있었다.
가슴 속에 불을 지핀 듯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라와 더 뜨거워지고 싶었다.
그 불꽃이 발화점이 되어 더 뜨거운 것을 원하게 되는 것이다.
살짝 떨어졌다 다시 이어지며 반복되는 입맞춤이 점점 더 깊어졌다.
서로의 입술을 탐하는 적나라한 소리가 귀를 적신다.
옷을 너무 단정하게 입고 있었던 것일까.
쉽게 벗겨지지 않는 옷을 포기하고 문한이 성급한 손을 시영의 허리춤으로 집어 넣었다.
그리고 그 안의 살갗을 타고 올라간다.
성급한 문한의 손과는 다르게 시영의 손을 차분하게 문한의 옷을 풀어내고 있었다.
술에 취했다는 핑계로 그의 옆에서 잠들던 밤이면 어김없이 코끝으로 느껴지던 진한 살갗의 체향을 혀끝으로 느끼며 문한이 시영의 목덜미에서 시작해서 가슴을 지분거린다.
잇자국이 날 정도로 물어뜯어도 잠깐 어깨만 움찔거릴 뿐 거부하지 않는 시영의 가슴을 물어뜯으며 문한이 그 끌어안고 있는 등을 손끝으로 꽉 눌렀다.
잡아먹어도 성이 차지 않는다는 느낌이 이런 것이리라.
이대로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잡아먹어도 성이 차지 않을 것 같았다.
문한이 손끝에 오른 열기를 주체하지 못했다.
충동을 견뎌내야 했던 그 동안의 시간들을 떠올리며 이제는 참지 않아도 된다는 희열이 뒤섞여 아찔한 흥분으로 그의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다.
“으윽...”
온 몸에 잇자국을 내려는 듯 물어뜯는 문한의 입술이 강한 자극이 되어 시영이 신음을 흘리고 말았다.
시영의 다리 사이를 더듬어가는 문한의 손길이 급했다.
노련하게 여인을 안는 사내라고는 생각되지 않는 급하고 서툰 손길이었다.
“읏...”
시영이 짧은 소리를 내고 말았다.
입술을 비집고 나오는 뜨거운 숨과 함께 그의 허리가 휘어졌다.
온 몸에 퍼지는 짜릿한 전율에 시영이 고개를 뒤로 젖혔다.
술에 취하는 것보다 더 지독한 것에 취하는 느낌이었다.
다른 이들에게는 늘 자신이 타고 난 고자라고 말했던 시영이었다.
서지도 않는 물건을 달고 다니는 반병신이라고 그를 아는 모든 이들에게 그렇게 말했었다.
반은 진실이었다.
서지도 않는 물건.
반병신.
맞는 말이었다.
절반은 맞는 말이었다.
단 한 사람에게만 반응하는 몸.
그러니 병신인 것이다.
병신이 아니고는 그럴 수가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