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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결에 유경이 어렴풋이 눈을 떴다.

기억나지는 않지만 깨기 직전에 꿈을 꾼 것도 같았다.

잠이 깨기 전의 꿈은 기억이 나지 않는 법이라고들 하지만, 어쩐지 아련한 느낌이 드는 꿈이라서 그녀가 잠시 꿈을 떠올리려 노력했지만 부질없는 노력이었다.

어딘가 모르게 아련하고 슬픈 느낌의 꿈.

손을 들어 눈가를 만져본 유경이 손 끝에 묻어나는 젖은 물의 느낌에 눈을 감아버린다.

꿈을 꾸며 울고 있었던 것이다.

눈물이 흐를 정도로 슬픈 꿈이었는데 왜 기억이 나지 않는 것일까.

얼마나 가슴이 아팠으면 꿈속에서 울어버린 것이 현실의 눈물로 흘러버린 것일까.

꿈이 기억나지 않으니 그 이유도 알 수가 없다.

유경이 옆을 쳐다봤다.

그녀의 옆에서 추영이 잠들어 있었다.

같은 이불을 덮고 추영이 잠들어 있었다.

처음 머리를 올리던 날밤, 그녀가 눈을 떴을 때는 그는 이미 떠날 준비를 마친 상태였었다.

그러나 오늘은 여전히 그녀의 한 이불을 덮고 곤히 잠들어 있었다.

마치 이제 다시는 그녀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는 듯이 그녀의 옆에서 잠들어 있었다.

‘마지막 여인...’

어젯밤 그가 들려주었던 고백을 그녀가 떠올렸다.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그녀도 알고 있다.

자신을 그의 마지막 여인이 되게 하겠다는 것은 그가 일생 혼인하지 않고 아내도 맞이하지 않겠다는 뜻이다.

사내로 태어나 홀로 살다 가겠다는 뜻이다.

양반의 적자로 태어나 후사도 남기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 결정에 쏟아질 수많은 비난과 조롱, 그리고 험한 말들을 그는 견딜 자신이 있는 것일까.

그에게 전부를 주지 않는 여인을 위해서 자신의 일생을 송두리째 던져버리겠다는 마음은 과연 어떤 마음인 것일까.

유경 자신은 그에게 자신의 전부를 내줄 수 없다.

마음의 전부를 내줄 수 없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녀에게 전부를 주겠다 그리 말하는 것이다.

조건 없이, 대가 없이 전부 주겠다 말하는 것이다.

전부 주겠으니 그녀의 마음도 전부 내놓으라 그런 말도 하지 않고, 그저 전부 줄 것이니 받아만 달라 그리 말하는 것이다.

세상에 이런 사랑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 자신이 이런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일까.

잠든 추영을 바라보는 유경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혼란스러운 그녀의 마음처럼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자신의 전부를 원하지 말아달라고 말했을 때 수윤의 흔들리던 눈동자를 유경은 기억했다.

그것이 정상인 것이다.

세상의 어떤 사람이 자신이 사랑하는 이를 독점하고 싶지 않을까.

세상의 어떤 사람이 사랑하는 이의 전부를 가지고 싶지 않을까.

전부를 주고 전부를 받는 것이 세상의 사랑법이건만...

전부를 주지 않을 것이니 전부를 원하지도 말아달라던 유경의 사랑법 앞에서 수윤은 흔들리고 있었다.

유경은 그걸 느낄 수 있었다.

수윤이 자신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한다는 것을.

그리고 이해하지 못하는 그 마음이 정상이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다만 기생인 자신이 그 모든 이들이 누리는 정상적인 사랑법에서 빗나가 있는 것일 뿐.

기생에게는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당연한 듯이 누리는 그 사랑법이 허락되지 않는 것일 뿐.

그래서 흔들리던 수윤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이해하고 미안했다.

자신이 기생이라서 그에게 미안했다.

기생일 수밖에 없어서 그에게 미안했다.

그런데 이 남자는, 지금 그녀의 눈앞에 잠들어 있는 이 남자는 그런 그녀를 당황하게 만들었다.

전부를 주되 전부를 원하지 않는다는 말로...

마음만 먹으면 세상 누구보다도 아름다운 사랑을 할 수 있는 남자가 그리 말해올 때 그녀의 심장이 두근거리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세상 어떤 여자가 그 고백 앞에서 가슴이 담담할 수 있을까.

하지만...

유경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행여나 추영의 잠을 깨울까 싶어 그녀가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아무것도 입지 않은 그녀의 새하얀 젖무덤 위로 불긋한 자국들이 흔적처럼 새겨져 있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추영의 단단한 어깨를 그녀가 내려다봤다.

과분한 남자.

이기적이라고 그 앞에서 대놓고 말했었지만 솔직히 고백하자면 과분한 남자.

처음부터 과분했던 남자.

이름도 없는 동기의 머리를 올려주기에 과분했던 남자.

어느 시골 나이 많은 양반이 푼돈 몇 푼에 머리를 올려도 할 말이 없었던 새끼 기생의 머리를 누구보다 뒤처지지 않게 올려주었던 과분한 남자.

그 후로도 그녀 몰래 그녀의 곳간을 채워주었던 것도 이 남자였을 것이다.

처음부터 과분했고 지금 또한 과분한 남자.

그런 사랑 받을 자격이 없건만 분에 넘치는 사랑을 안겨주는 너무나 과분한 남자.

이 남자의 사랑이 아팠다.

이 남자의 사랑이 너무 아팠다.

수윤을 만나지 않았더라면 이 남자를 사랑했을 것이다.

수윤에게 먼저 마음 줘버리지 않았더라면 분명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으리...사람의 마음에는 저마다의 강물이 하나씩 흐르고 있다고 합니다...”

유경이 잠든 추영을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린다.

작게 입술을 달싹거리며 중얼거리는 그 목소리가 잠든 추영의 귀에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가슴에 저마다 강물을 하나씩 가지고 있어서...그 물길이 흐르고 닿는 곳을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다고 합니다. 몸의 주인은 마음이라고 흔히들 말하지만...제아무리 강한 의지로도 잡히지 않는 것이 정이라고 한다면...필경 몸과 마음의 주인은 이 정이라는 놈이 아닐까 합니다. 마음은 이래서는 안된다고 하면서도 그 정이라는 놈이 마음조차 강하게 눌러버리니까요...”

유경이 이불을 들어 추영의 어깨를 덮어준다.

“나으리, 이 년 가슴 속에 흐르는 강물이 나으리께로 흐르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데 이 년의 가슴에 흐르는 물길이 흘러 흘러 닿은 곳이 다른 곳이랍니다. 이를 어찌할까요, 나으리. 마음으로도 어찌할 수 없는 이 정의 물길을 어찌할까요...”

그 마음에 흐르는 물길을 누가 마음대로 정할 수 있을까.

세 갈래, 네 갈래 물길을 흐트러 놓는 것이 사람의 정한 이치대로 되어지지 않는 것이건만...

‘물길은...’

눈을 감은 채로 추영이 유경의 목소리를 듣고 있었다.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그가 눈을 뜨지 않았다.

그저 잠든 척 그녀의 중얼거림을 들으며 그가 생각했다.

‘물길은 얼마든지 바뀔 수 있는 것이오. 오늘은 이곳으로 흐르던 물길도 어느날 다른 곳으로 흐를 수 있는 법이오. 누군가 그 물이 흐르는 곳을 파고 또 파서 새로운 물길을 내면, 언젠가는 그 마음에 흐르는 강물이 닿는 곳이 내가 아니라고 누가 장담하겠소...’

이불을 덮어주는 유경의 손길을 느끼며 추영이 모르는 척 몸을 뒤척인다.

그가 몸을 뒤척이자 유경이 다시 그의 옆으로 눕는다.

아직 밤이 어두웠다.

이불 안에서 잡아오는 따뜻한 손의 느낌에 유경이 입술을 달싹거렸다.

추영의 손이 유경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그 잡은 손에서 느껴지는 수만가지 감정에 유경이 눈을 감았다.

감은 눈 위로 따뜻한 숨결이 내려 덮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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