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9 회: 재회 -->
시영의 집은 강이 가장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의 집에서 내려다보면 한강 나루터 전체가 한 눈에 들어오는 것이다.
큰 길에서 조금 벗어나 한적한 비탈길로 접어들어 조금만 올라가면 등성이 가장 높은 곳에 자리 잡은 시영의 집이 나온다.
크지 않은 마당에 두 채로 나뉜 집.
한 채에 방 하나 밖에 없는 아주 작은 초가.
그러나 그녀에게 돌아갈 장소가 되어주는 그곳으로 걸어 올라가던 유경의 발이 멈췄다.
“아...”
그녀가 작게 소리를 내고 말았다.
마침 그 비탈길을 걸어 내려오던 남자와 마주쳤기 때문이다.
“가시는 길이십니까?”
유경이 살며시 허리를 숙이며 옆으로 물러선다.
그녀는 아직도 이 남자가 어려웠다.
이상했다.
시영도 어렵지 않고 문한도 어렵지 않고 수윤도 어렵지 않은데, 이 남자는 이상하게 어려운 것이다.
허리를 숙인 유경의 눈에 남자의 손이 들어왔다.
정확히는 그 손의 약지에 끼워진 가락지였다.
“내가 다가서면...”
고개를 숙인 채로 자신이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는 유경을 향해 추영이 입을 열었다.
“그대는 그 거리만큼 물러날 거라는 걸 아오.”
이 남자는 이유 없이 웃지 않는다.
의례적으로도 웃지 않는다.
아직 이 남자의 웃음을 본 기억이 유경에게는 없었다.
이 남자는 늘 표정이 무뚝뚝하다.
그 무뚝뚝한 목소리만큼이나 표정이 무뚝뚝하다.
그래서 더 어렵게 느껴지는 것일까.
“하지만 그대가 물러난 거리 만큼 나는 다가설 것이오.”
“나으리...”
아니라고 했는데 이 남자는 포기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 마음 받을 수 없다고 했는데 이 남자는 포기할 수 없는 것일까.
“나를 피해 물러나도 좋고, 나를 피해 달아나도 좋소.”
추영의 시선이 그녀를 향한다.
여전히 무뚝뚝하게 느껴질 정도로 담담한 시선이었다.
하지만 그 담담한 시선 속에서 몸 전체를 옭아매는 듯한 전율을 느끼는 것은 왜 일까.
“나는 절대로 그대를 놓치지 않을 것이니.”
“나으...!”
갑작스런 일이었다.
그 남자가 지나가기만을 기다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던 유경의 허리를 그 남자가 끌어당긴 것이다.
세 발자국 만큼의 거리를 단번에 좁힌 남자가 그녀의 허리를 끌어당겨 품안으로 힘껏 끌어안은 것이다.
숨이 막히고 뼈가 바스라질 것처럼 끌어안은 남자의 품 안에서 유경이 비명도 지르지 못했다.
그녀의 입술을 추영의 입술이 덮어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비명을 질렀다면 그 소리는 추영의 입안에서 울려 퍼졌을 것이다.
하지만 지르지 못한 비명 대신 그녀의 뜨거운 숨결이 추영의 입술 안으로 흘러들어갔다.
“...!”
그 남자의 억센 팔 안에서 유경이 조금도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강인한 팔이 그녀를 안고 미세한 저항도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격렬하게 퍼붓는 입맞춤에 숨결을 고스란히 내어주며 그녀가 이 남자의 어디에 이런 격정이 숨어 있을까 문득, 생각했다.
이 무뚝뚝한 눈동자 어디에 이런 격정이 숨어 있을까.
그녀의 숨결을 한 올도 남김없이 다 삼킬 듯 입안을 헤집으며 혀를 휘어감던 추영이 그녀의 입술에서 떨어진 것은 그녀의 얼굴이 숨이 막혀 질리기 직전이었다.
조금만 더 입맞춤이 길어졌으면 그녀는 그 열기에 질식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입술이 떨어져도 그녀를 끌어안은 팔은 그녀를 놓아주지 않는다.
여전히 그 시선이 그녀를 잡아먹을 듯 향해 있었다.
“나는 이미 각오가 되어 있소. 그대에게서 미움 받을 각오, 그대의 원망을 들을 각오, 수윤이에게서 그대를 빼앗을 각오.”
“...”
이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이미 각오가 되어 있다는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보잘 것 없는 계집 하나 때문에 미움 받을 각오도, 원망 들을 각오도, 비난 받을 각오도, 친구를 버릴 각오도 되어 있다는 이 남자에게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것일까.
“저는...그런 가치가 없습니다...”
“가치는 내가 결정하오.”
“하오나 나으리...”
“그대의 마음은 그대 좋을 대로 하시오. 누구를 마음에 담든 그대 좋을 대로 하시오. 하지만 나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아. 그대의 마음을 빼앗아 내 것으로 만들 때까지 나는 포기하지도, 물러나지도 않아. 나는 늑대 같은 사내이니 한번 노린 목표는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반드시 손에 넣고 마니까 내게서 달아나려면 그대도 마음을 굳게 먹어야 할 것이오.”
그 말을 마침 다음에야 추영의 손이 유경을 놓아준다.
하지만 그 손에 놓이고 나서도 유경이 움직이지 못했다.
그 시선에 붙잡혀 그녀가 그 자리에서 한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했다.
“오늘 밤에, 화연각으로 찾아가겠소.”
그 목소리에 그녀의 뒷목이 화끈거리며 귓불이 붉어진다.
이 남자가 손님으로 그녀를 찾아오겠다는 선언을 하는 것이다.
“그곳에 수윤이 있어도, 나는 상관하지 않겠소.”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서 비탈길을 걸어 내려가는 추영의 뒷모습을 유경이 움직이지 못하는 채로 쳐다 봤다.
점점 더 작아지는 그 뒷모습을 보며 유경이 자신이 잘못 생각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자신이 너무나 잘못 알고 있었다는 것을.
저 남자는 자신이 생각하던 그런 남자가 아니라는 것을.
유경의 기억 속에 저 남자는 무뚝뚝하지만 섬세한 배려가 있는 남자였다.
첫날 밤, 처음 사내를 받아들이던 그 날밤, 무섭기만 하던 그 남자는 아파하는 그녀의 모습에 조심스럽게 품어주었었다.
조심 조심, 그녀의 숨소리 하나에도 신경을 써가며 그녀를 안았었다.
다시 재회했을 때에도 저 남자는 그 특유의 무뚝뚝함 속에 그녀를 배려하는 섬세함을 보여주었었다.
조심스럽게, 거칠게 대하면 깨어질까 조심스럽게 한걸음 물러서서 그녀의 반응을 기다리는 모습을 보여주었었다.
그래서 그녀는 저 남자가 그런 남자일 것이라고만 여겼었다.
자신이 아니라 하면, 자신이 싫다 하면 그대로 물러나줄 남자라고만 생각했었다.
싫다는 자신을 억지로 밀어붙이는 남자는 아니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그녀는 자신의 생각이 틀렸음을 깨달았다.
저 무뚝뚝함 아래에, 그 조용한 배려 아래에, 그 어울리지 않는 섬세함 이면에 실은 누구보다 맹렬한 격정이 숨겨져 있었다는 것을 이제야 알아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 맹렬한 격정을 깨워버린 것이 자신이라는 것을.
- 나는 절대로 그대를 놓치지 않을 것이니.
그 말은 거짓이 아닐 것이다.
유경이 이제는 사라져 보이지 않는 추영이 걸어간 길을 쳐다봤다.
그의 입술이 덮었던 그녀의 입술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