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회: 재회 -->
“지금 시영이 상태가 별로 좋지 않으니까, 일단 나에게 말한 다음 나중에 시영이 기분이 나아지면 그때 다시 와서 말하는 게 좋겠어.”
방으로 들어와 앉는 추영을 향해 문한이 일러준다.
문한과 추영은 신분이 다르다.
문한은 중인, 그리고 추영은 양반이다.
그런데도 문한이 추영에게 말을 놓는 이유는 그것이 몸에 배었기 때문이다.
추영 역시 문한을 옛스승으로 생각하기에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않는 것도 한 이유일 것이다.
“유경이를 뭐 어쨌다고?”
“실은, 제가 유경 낭자와 인연이 깊습니다.”
“인연이 깊어?”
“네. 유경 낭자의 머리를 얹어준 것이 바로 접니다.”
추영이 말에 문한의 입이 저절로 벌어진다.
사람 인연이 새끼줄 꼬이듯이 꼬였다고 늘상 말하고 돌아다니는 것이 문한 자신이지만 이 경우에는 정말 할 말을 잃는 것이다.
어느날 우연찮게 만난 기생을 집에 들였는데 알고 보니 자신이 나루터에서 건진 놈의 누이라고 하지 않나, 알고 보니 자신이 칼을 가르친 벗의 아들이 머리를 올려주었다 하지 않나, 인연 치고는 기가 막힌 인연인 것이다.
“송도에서?”
“네, 송도에서...”
“허 참...이건 또 무슨...”
“제가 유경 낭자에게 지은 죄가 많습니다. 하여 지금은 미움을 받고 있는 중입니다.”
“하지만 유경이는 단선비를...”
거기까지 말한 문한이 입을 다물었다.
수윤과 추영이 둘도 없는 친구 사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알고 있습니다. 유경 낭자의 마음도, 수윤이 그 친구의 마음도 이미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는 자네가 이러는 까닭이 뭔가?”
“마음이 그리 하라 시키기 때문입니다.”
“...”
마음이 그리 하라 시킨다...
그 말 앞에서 문한이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 말 앞에서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마음이 그리 시킨다는데...
아니라는 것을 알아도, 되지 않을 것을 알아도 마음이 그리 시킨다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제가 나쁜 놈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욕을 먹어도 싸고, 돌을 맞아도 싼 그런 나쁜 놈이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훗날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서 욕 정도, 돌 정도는 감수할 수 있는 것이 사내 아니겠습니까?”
“...”
‘꼭...하는 짓이 꼭...누가 그 사람 아들 아니랄까봐...’
“그래서 유경이를 어떻게 하고 싶은 건가?”
“기적에서 빼내 첩실로 들이고 싶습니다.”
당당한 추영의 말에 문한이 저도 모르게 웃고 말았다.
당당할 주제가 되지 못하면서 당당한 것이 우스웠기 때문이다.
“판윤 영감 기절하시겠군.”
“아버님께는 이미 허락을 받았습니다.”
“뭐야?”
허락을 받았다는 추영의 말에 문한의 눈이 커진다.
장가도 가지 않은 아들이 기생을 첩실로 들인다는데 그 올곧은 양반이 허락을 했다는 것이 놀라운 것이다.
“이제 두 분 허락만 떨어지시면 제가 그 마음을 얻도록 노력해볼 생각입니다.”
“그러니까 일단 주변부터 친 다음에 진짜 목표를 나중에 치겠다? 전법이군.”
“허락해주시겠습니까?”
추영의 기질을 문한은 알고 있다.
뼛속까지 무인인 추영의 기질을 문한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아마 그의 부친인 한성 판윤도 그 기질을 알기에 허락했을 것이다.
한번 마음에 정하면 저돌적으로 밀어붙이는 그 기질을 알기에 말이다.
문관인 한성 판윤의 적자가 무관의 길에 들어섰을 때부터 그 기질은 이미 두드러졌었다.
문관과는 절대로 어울리지 못하는 무관의 피 끓는 기질이 그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리고 무관은 언제나 그렇듯 한번 뜻을 정하면 꺾일지언정 숙이지 않는다.
죽을지언정 물러나지 않는다.
눈앞의 이 사내, 이추영이 그런 사내인 것이다.
이미 유경의 마음은 단수윤에게 기울었다.
그를 두고 시영과 얼굴을 붉히며 다툴 정도로 그녀의 마음은 단수윤에게로 기울었다.
‘하지만...’
하지만, 이라고 문한이 생각했다.
하지만 이 사내라면, 이 저돌적인 사내라면 그 판세를 뒤엎어 놓을지도 모른다.
문한의 마음에도 단수윤 보다는 이추영이었다.
누군가 한사람을 택한다면 단수윤 보다는 이추영이었다.
그러나 이 사내의 손을 들어주기 전에 확인할 것이 있다.
“유경이 첫 사내가 자네라고 했지만 내가 유경이를 안아보니 처녀와 진배 없던 데, 제대로 첫날밤을 보내긴 했었나?”
문한의 말에 일순 추영의 얼굴이 굳어졌다.
그 눈동자가 굳어지는 것을 문한이 확인할 수 있었다.
어떻게 동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자신의 눈앞에 앉은 이가 자신이 은애하는 이를 안았다고 하는데 누가 동요하지 않을 수 있을까.
“유경이가 이곳에 와서 한 석달 정돈가? 밤낮으로 내가 그 아이 몸을 길들여서 제법 쓸만한 기생으로 만들어 놓았는데 그러면 자네가 첫 사내일까? 아니면 내가 첫 사내일까?”
‘자, 어떻게 나오나 한번 보자.’
문한이 웃음이 떠오른 눈으로 추영을 바라본다.
이 사내가 어떻게 나올지 궁금한 것이다.
질투.
사내라면 질투하지 않을 리 없다.
원래 사내라는 것들이 제 것을 남에게 빼앗기기 싫어하는 기질을 달고 태어나는 법.
그래서 그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서 싸움도 불사하는 것이 사내라는 것인데 눈앞의 이 사내가 어떻게 반응할지 궁금한 것이다.
“첫 사내가...”
추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굳어 있던 그의 눈동자가 서서히 원래의 빛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첫 사내가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몇 명의 사내가 스쳐 지나갔다 한들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지금 곁에 있는 것이 어떤 사내인지 그것이 무엇이 중요하겠습니까? 다만 중요한 것은 마지막 사내가 누가 되느냐 아니겠습니까?”
추영의 입에서 그 말이 나오는 순간, 문한이 손바닥으로 무릎을 쳤다.
“옳지!”
저도 모르게 문한의 입에서 그 소리가 튀어 나왔다.
“저는 그녀에게 몇 명의 사내가 있었는지는 상관하지 않습니다. 다만 제가 그녀의 마지막 사내가 되기를 바랄 뿐입니다. 그녀가 세상 모든 사내들을 다 안고 훗날에 지친 몸으로 어딘가에 기대고 싶을 때, 그곳에 제가 있고 싶을 뿐입니다. 먼 훗날, 그 지친 몸을 기대게 해주는 품이 제 품이었으면 하고 바랄 뿐입니다.”
그 당당한 사내의 눈에 문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마음이 정해지는 순간이었다.
“유경이, 잘 부탁하네.”
이 사내여야 한다고 문한이 생각했다.
그의 말대로 먼 훗날에 누군가 그녀의 곁을 지켜준다면 이 사내였으면 좋겠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