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7 회: 재회 -->
“자는가?”
문간에 기대어 앉아서 문한이 넌지시 안을 향해 말을 걸어본다.
하지만 안에서 닫힌 문을 꿈쩍도 하지 않는다.
“죽었나?”
안에 사람이 없나 생각할 정도로 안은 조용하다.
문한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다시 안으로 목소리를 내본다.
“그 안에서 볼 일은 어떻게 해결 하나?”
방 주인인 시영이 문을 닫아 걸고 밖으로 나오지 않은 지 벌써 며칠이 지나 있었다.
밥은 어찌 해결하고, 볼 일은 어찌 해결하는 지 무척이나 궁금하지만 일단 문이 열려야 묻고 자시고가 있는 것이다.
물론 대충은 알고 있다.
한 밤중에 모두가 잠든 사이에 그가 문밖을 들락거린다던가, 문한이 볼일을 보러 밖으로 나간 사이에 슬쩍 드나든다는 건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 할 뿐이다.
“문 열면 내가 잡아 먹을까봐 그래?”
발단은 그것이었다.
유경이 시영과 말 다툼을 벌인 그 다음날, 문한이 시영의 새끼줄과 짚단들을 몽땅 갖다 버린 것이 시작이었다.
그런 지푸라기에 들일 정성 차라리 자기에게 좀 쏟아달라고 문한이 이십년 만에 용기를 내서 덤빈 것이 화근이었다.
유경이 말에 용기를 얻어 하지 않던 짓을 한 것이 화근이었다.
이젠 날 좀 봐달라며 덤벼드는 문한의 낮짝을 발로 걷어찬 시영이 그대로 문을 닫아 걸어 버린 것이다.
“손 끝 하나 대지 않을 것이니 문 좀 열어주면 안되나? 응?”
물론 새빨간 거짓말이다.
문만 열렸다 하면 인정 사정 봐주지 않고 무조건 덮치고 볼 생각인 것이다.
이십년을 기다렸으면 군자의 도리(?)는 충분히 다했다고 문한이 생각했다.
이젠 짐승 같은 짓을 좀 해도 된다고 스스로를 격려하며 어떡해서든 이 닫힌 문을 열어볼 생각인 것이다.
*
“아무 짓도 안 한다니까.”
문밖에서 들려오는 문한의 목소리에 시영이 입술만 꾹 깨문다.
저런 말을 믿을 리가 없다.
세상 사람 다 믿어도 문한의 말은 믿지 못하는 것이다.
문을 열자마자 짐승처럼 덤벼들 것이 뻔하다.
“속고만 살았나. 그럼 내가 사립 문 밖에 나가 있을 테니까 문 좀 열어봐. 멀리서 얼굴이나 좀 보게.”
거짓말 중에 상거짓말일 것이다.
“어? 이게 누구야.”
또 새로운 수법.
“이판관 아닌가?”
‘흥. 이판관을 들먹이면 내가 속을 줄 알고?’
시영이 코웃음을 쳤다.
“시영이? 시영이는 저 안에서 문 걸어 잠그고 나오지 않는데...어이, 이판관 왔어. 좀 나와 봐.”
‘웃기고 있네. 이판관 같은 소리.’
시영이 무슨 개 풀 뜯어먹는 소리냐, 라고 코웃음을 칠 때였다.
“나으리, 저 추영이옵니다.”
“응?”
진짜 추영의 목소리가 밖에서 들린다.
거짓말이 아닌 것이다.
시영이 잠시 망설였다.
문을 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그저 심심해서 추영이 이곳까지 왔을 리는 없다.
하지만 문을 열면 문한의 얼굴을 봐야 한다.
잠시 고민하던 시영이 천천히 문을 열었다.
추영이 있는 자리에서 문한이 딴 짓을 못할 것이라는 계산에서였다.
끼익.
시영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손으로는 문고리를 단단히 잡고 문을 여는 시영의 눈에 밖에 서 있는 추영의 얼굴이 제일 먼저 들어왔다.
그리고 그 다음으로 문 바로 뒤에 앉아 있는 문한의 얼굴이 뒤따라 들어온다.
“살아는 있었네.”
문한이 싱글벙글 거리며 웃는 얼굴이 여간 얄미운 것이 아니다.
“무슨 일인가?”
문한은 무시해버리고 시영의 시선이 추영을 향한다.
“나으리께 드릴 말씀이 있어서 찾아뵈었습니다.”
“내게?”
“유경 낭자 일입니다.”
“낭자?”
추영의 말에 시영이 코웃음을 친다.
“어느 세상에서 기생년을 낭자라 부르던가?”
그러면서도 문을 활짝 열어놓는다.
하지만 들어오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할 말이 있으면 그곳에서 하라는 뜻이다.
“유경이가 왜? 내가 그 아이 일로 또 속을 썩어야 할 일이 남았나?”
아무래도 유경이 때문에 단단히 골이 난 시영이다.
“네?”
일의 자초지종을 모르는 추영이 살짝 의아해했지만 그것도 잠시, 가지고 온 볼 일을 내보인다.
“들어가서 말씀드리겠습니다.”
“거기서 말하게.”
평소라면 이판윤댁 독자를 이렇게 대접할 리 없는 시영이지만 지금은 속이 단단히 뒤틀려 있는 것이다.
“여기서 말해.”
문한이 추영에게 눈짓한다.
문한의 눈짓에 추영이 뭔가 일이 있구나 짐작만 할 뿐이다.
“본시 이런 일은 기생이 속해 있는 기방의 행수에게 할 말이지만, 그녀는 딱히 속해 있는 기방도 없을뿐더러 두 분 어르신께서 보증인과 보호자를 겸하고 계시니 두 분 어르신께 말씀드리는 것이 옳을 것이라 생각이 들었습니다.”
길게 운을 떼는 추영의 말에 시영의 얼굴이 점점 굳어진다.
뭔가 이상한 낌새를 챈 것이다.
“제가 유경 낭자를 마음으로 은애하고 있습니다.”
“지랄하네!”
대뜸 시영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튀어나온다.
놀란 것은 추영이고 당황한 것은 문한이었다.
평소에 그렇게 점잖던 시영의 입에서 튀어나오는 상소리에 두 사람 모두 기겁을 한 것이다.
“요즘 미친 것들이 많다더니 아주 다들 미쳐 날뛰는구만! 이 놈이나 저 놈이나 할 것 없이 다들 미쳤어! 미친 것들!”
미친 것들을 외치는 시영의 눈이 문한을 향한다.
흘겨보는 그 눈빛에 문한이 어깨를 움츠렸다.
그를 화나게 한 가장 큰 원인이 자신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졸지에 덩달아 미친 놈이 된 추영이 당황해서 말도 꺼내지 못한다.
시영이 이런 반응을 보일지는 미처 몰랐기 때문이다.
“미친 놈들끼리 알아서 쌈을 싸든 죽을 끓이던 마음대로 하고 난 건드리지 마!”
그 말을 마친 시영이 문을 쾅- 하고 닫아버린다.
거칠게 닫힌 문살이 바르르 떠는 것을 보며 추영과 문한이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서서 움직이지 못한다.
“저...”
한참 후에 먼저 입을 연 것은 추영이었다.
“심기가...매우 불편해보이시는데...”
“달거리 하나?”
문한이 멋쩍은 얼굴로 대답하는 말에 추영이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네?!”
“아니, 뭐, 그렇다고.”
절대로 자기가 덮치려고 해서 기분이 나빠져 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지은 죄가 있는 문한이 자기 방으로 추영을 들어오라 한 것은 조금 후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