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75 회: 재회 --> (76/131)

<-- 75 회: 재회 -->

“나으리...”

잠든 양반의 어깨를 가만히 흔들어보던 유경이 아무리 흔들어도 눈을 뜨지 않는 그 모습에 살며시 손을 거둔다.

“나으리, 날이 밝기 전에 이 년은 돌아가야 하오니 깨셨을 때 이 년이 곁에 없더라도 너무 괘씸하다 생각은 마시어요.”

사내의 나이는 쉰 남짓, 홍문관 교리라고 했다.

어젯밤 그녀를 품기 위해 이 사내가 들인 화대는 정5품 교리의 봉급에 비하면 상당한 액수였다. 

본시 부유한 양반이 아니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화대.

문득 그런 생각이 드는 그녀였다.

기방을 찾는 양반 사내들이 모두 부유한 집안은 아닐 것이다.

그 중에는 나라에서 주는 봉급으로 사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들은 기방을 드나든다.

아무리 기생들의 치마폭에 화대를 던져 넣어도 그것이 하룻밤이 지나면 깨어버리는 허망한 꿈이라는 걸 알면서도 다음날이 되면 다시 꿀에 모여드는 벌처럼 되돌아오는 것이다.

이 사내들은 기생의 품 안에서 무엇을 얻으려 하는 것일까.

무엇을 바라고 기생의 치마 폭 안에 자신을 묻는 것일까.

이 사내들 중에는 수윤처럼 마냥 여인의 품을 즐겨하는 이들이 있을 것이다.

이 사내들 중에는 자신의 아내에게서 얻지 못하는 성적 희열을 느끼기 위해 기생을 찾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 사내들 중에는 어린 기생만 찾는 부도덕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이 사내들 중에는 온통 그 머릿속에 정욕만 가득 찬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사내들 중에는 세상사에 지친 몸과 마음을 눕히기 위해 기생의 품을 찾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기생의 품 안에서 만족함을 느낄 것이고, 어떤 이는 기생의 품 안에서 정복감을 만끽할 것이며, 어떤 이는 기생의 품 안에서 위로를 받을지도 모른다.

무엇이라 하여도 좋다.

벌이, 나비가 꽃을 찾아드는 이유가 무엇이라도 좋다.

원하는 것을 얻고 돌아간다면 그들이 뿌린 화대는 헛되지 않은 것이고 원하는 것을 줄 수 있다면 그들을 위해 벗은 저고리가 헛된 수고가 아닐 것이니.

마음을 짓밟지 말자...

그것이 유경이 바라는 것이었다.

어떤 사내라 할지라도, 어떤 마음을 품고 어떤 이유로 그녀를 찾는 사내라 할지라도, 그녀에게서 무엇을 원하는 사내라 할지라도 그 마음은 짓밟지 말자 생각하였다.

그들은 마땅한 값을 치렀고 그녀는 그들의 마음을 짓밟을 권리가 없는 것이다.

그녀의 눈앞에 곤히 잠들어있는 이 사내에게도 그러하고 싶었다.

다만 아는 것이 홍문관의 교리라는 것이 전부라고 할지라도, 그녀에게 날아든 벌인 이상 그녀의 꽃잎으로 품어주고 싶었다.

가식이 아닌 마음으로 품어주고 싶었다.

타인의 마음을 짓밟고 싶지 않았다.

가식으로, 허울좋은 가면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언젠가 누군가 그녀를 가식으로, 허울 좋은 가면으로 대할 때, 그녀의 마음을 그렇게 짓밟을 때 그녀는 할 말이 없어지고 싶지 않았다.

자기가 한 대로 돌려받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매 순간, 그 인연들을 소중히 여기고 싶었다.

인연이 이슬처럼 쌓여 언젠가 자신에게 돌아올 때 무수하게 아름다운 봄비처럼 느끼고 싶었다.

언젠가 자신이 걸어온 길을 되돌아볼 때, 부끄럽지 않게 살았노라 느끼고 싶었다.

유경이 아무렇게나 흩어져 있는 양반의 도포를 가지런히 모아 곱게 정돈을 한다.

도포를 곱게 개고 그 옆으로 버선과 갓까지 곱게 늘어놓는다.

양반이 잠에서 깨어 집으로 돌아갈 때 기분 좋게 돌아가게 하고 싶었다.

그가 깨어나지 않아 돌아간다 인사는 할 수 없으나 적어도 기분 좋은 마무리를 안겨주고 싶었다.

“점잖으신 분이 이불을 걷어차셔요...”

유경이 반쯤 흘러내린 이불을 사내의 몸 위로 덮어준다.

귀 옆으로 헝클어진 머리까지 손가락으로 넘겨준 다음 유경이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켰다.

스르륵.

탁.

문을 닫고 하늘을 올려다보자 아직 날이 밝지 않은 하늘이 새파란 어둠에 물들어 있다.

동 트기 전의 하늘은 언제나 새파란 법이다.

탁.

문이 닫히는 소리에 유경이 슬쩍 옆을 돌아봤다.

건넌방에서 막 선비 하나가 나오고 있었다.

수윤이었다.

“이제 돌아가십니까?”

태사혜를 신고 일어나는 수윤을 향해 유경이 곱게 허리를 숙인다.

지난밤에 다른 기생의 손을 잡고 먼저 주연 자리를 뜬 그가 이제 방을 나서고 있었다.

아마 저 방에서 그 기생과 밤새도록 운우지정을 나누었을 것이다.

유경의 인사에도 수윤이 대답 없이 그녀를 스쳐 지나간다.

새벽의 차가움이 묻어있는 도포를 펄럭이며 곁을 스쳐 지나가는 수윤을 유경이 살며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그 뒤를 따라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말 없이 걷고 있었다.

옥빛 도포의 수윤이 앞서 걷고 있었고 그 뒤를 다홍 치마의 유경이 따라 걷고 있었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새파랗던 하늘이 붉게 동이 터올 무렵, 앞서 걷던 수윤이 걸음을 멈췄다.

뒤에서 유경이 그를 불렀기 때문이다.

“저는 이쪽 길로 가야 합니다. 그럼 서방님, 살펴 들어가십시오.”

잠시 후 자박거리는 발소리가 멀어진다.

그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수윤이 주먹을 움켜쥐었다.

밤새 부글거리던 속이 끓어 넘치기 일보직전이었다.

“누가 네 서방이란 말이냐!”

수윤 자신도 몰랐다.

자신의 입에서 이렇게 거친 목소리가 나올 줄은 자신도 미처 몰랐다.

그저 입만 열었을 뿐인데 버럭 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철 든 이후에 가장 큰 소리를 낸 수윤이었다.

그 자리에 주먹을 쥔 채로 선 수윤이 유경을 돌아보며 소리쳤다.

“오냐 오냐 해줬더니 기생년이 눈에 보이는 것이 없는 것이냐?!”

“...”

수윤의 노기 떠오른 얼굴에 유경이 그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네 년이 나를 조롱하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그 발칙한 입으로 서방님이라는 요망한 소리를 내뱉는단 말이냐!”

“제가 혹시 서방님의 마음을 언짢게 해드린 것이 있습니까?”

유경이 아무것도 모른다는 눈빛으로 그를 바라봤다.

아무 것도 모를 리가 없었다.

수윤이 왜 화가 나 있는 것인지, 수윤이 왜 이렇게 소리를 지르는 것인지 알고 있지만 그녀의 대답은 담담할 뿐이었다.

그녀 자신도 신기했다.

그 앞에서 이렇게나 담담할 수 있는 자신의 모습이 신기했다.

그 앞에만 서면 가슴이 울렁거려 어찌할 줄 모르던 자신의 모습이 머릿속에 남아있는데 지금 이렇게 담담할 수 있는 것이 신기한 것이다.

“심기가 불편해보이십니다.”

수윤을 바라보는 유경의 표정이 전에 없이 편안해보여 수윤이 마침내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