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4 회: 재회 -->
달이 휘영청 밝았다.
방으로 들어가려다 그 밝은 달빛에 추영이 대청마루에 앉아 버렸다.
불효를 저질렀다.
앞으로도 불효를 저지를 것이다.
쉽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이미 각오한 일이다.
수윤을 향한 그녀의 마음은 이미 확인했다.
그녀의 목소리에, 눈동자에 흔들림은 없었다.
더 이상 그 마음에 자신이 들어갈 한 뼘의 여지도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아무리 들어가려 해도 들어갈 곳이 없다는 것을.
추영이 자신의 손을 내려다본다.
달빛에 손가락에 낀 가락지가 빛나고 있었다.
이 가락지를 품 안에서 꺼내 손가락에 낀 순간부터 이미 마음은 정해졌다.
옥의 빛이 바래지 않는 이상 자신의 마음도 바래지 않을 것이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친구의 여자를 노리는 비열한 인간이라는 소리를 들어도 상관없었다.
기다린다.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유일한 하나의 길.
십년이건 이십년이건 기다릴 수 있다는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백발이 될 때까지라도 기다릴 수 있다.
마지막에 그녀의 손을 잡는 것이 자신이라면 기꺼이 기다릴 수 있다.
아니, 기다리는 것이 자신에게 주어진 형벌이라면 그 형벌, 기꺼이 감수할 생각인 것이다.
한번 그녀를 버렸다.
그녀를 버린 죄에 대한 형벌로 그녀가 자신을 기다린 것처럼 그도 그녀를 기다릴 수 있는 것이다.
그녀를 버린 죄에 대한 형벌이라면 그녀가 자신을 버리고 다른 남자에게 가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다.
형벌이라면, 기꺼이 이 죄 값을 다 치를 것이다.
“사랑은 사람이 하지만...”
추영이 달을 올려다보며 중얼거린다.
“제아무리 사람이 사랑하더라도...”
그의 얼굴 위로 달빛이 부서진다.
“하늘이 인연을 내지 않으시면 그 사랑은 허망한 것이니...”
부서지는 달빛을 받으며 추영이 눈을 감았다.
“사랑은 그대들이 하고...인연은 나에게 내리시기를 하늘에 빌어보는 수밖에...”
새하얗게 달빛이 부서지는 밤이었다.
그리하여 그 부서지는 달빛을 온 몸으로 받은 그 남자의 모습이 슬퍼 보이는 밤이었다.
달빛이 밝아 더 슬픈 밤...
*
“으응...으응...나으리...”
끊어질 듯 애처로운 목소리가 촛불이 어른거리는 방 안에 흐드러지게 퍼져나간다.
구슬땀을 송글 송글 이마에 맺은 채로 뜨겁게 신음하는 이화의 얼굴은 수윤의 눈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왜...’
몸은 이어져 있으되 마음은 이어져 있지 않다는 것이 이러한 것이리라.
몸은 이화와 뜨겁게 이어져 있으나 마음은 자신에게로 오지 않은 여인에게 가 있는 것이다.
‘도대체 왜...!’
이해 할 수 없었다.
도무지 그 마음을 이해할 수 없었다.
하나부터 열 개까지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저를 그리 어여삐 여겨주었는데 왜?!’
다른 기생들과는 달리 대해주었었다.
기생이 아니라 정인처럼 대해주었었다.
겉으로만 그렇게 한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그렇게 대해주었었다.
처음 봤을 때부터 봄바람처럼 마음에 담겨 들었었다.
저자거리에서 촌스럽게 두리번거리던 그 모습을 봤을 때부터, 치근덕거리는 자신을 내치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당황하는 모습까지, 그리고 트레머리 곱게 올리고 꼬리 감춘 여우처럼 안겨들던 모습까지 모두 마음에 담겨 들었었다.
바뀌는 표정 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다고 생각이 들 정도였었다.
한 여자에게 머무르지 않는다는 평소의 생각까지 접어버리고 정말 한 여자에게 정착하고 싶다는 생각까지 할 정도로 깊이 마음에 담았었다.
머무르고 싶었다.
웃게 해주고 싶었다.
그런 마음은 맹세컨대 처음이었다.
기생들의 마음을 홀리기 위해 달콤한 말을 많이 흘려보았었지만 진심으로 누군가를 웃게 해주고 싶은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기생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위해 한껏 고고한 미소를 많이 지어보았지만 누군가를 웃게 하기 위해 바보 같은 표정을 지어본 것도 그녀가 처음이었다.
그랬는데, 그렇게 소중하게, 다정하게, 어여쁘게 대해주었는데...
‘나를 놀리는 것이냐? 내가 네게 잘해주니 내가 우스워보였던 것이냐? 내가 네게 마음을 열어주니 쉬운 사내로 보였던 것이냐? 네가 마음대로 조롱하고 마음대로 가지고 놀아도 되는 그런 사내로 비쳤던 것이냐?’
화가 났다.
분했다.
고작 기생 하나 때문에 이렇게 화가 나는 자신의 모습이 분했다.
별것 아닌 주제에 손 안에 잡히지 않는 그녀 때문에 화를 내는 자신의 모습이 꼴불견이어서 분했다.
자신을 이렇게 만들어버린 그녀에게 화가 치밀었다.
“하읏...나으리...”
수윤의 목에 이화의 매끄러운 팔이 감겨든다.
그녀의 새하얀 알몸이 수윤의 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전신에 땀이 맺힌 그녀의 나신은 아름다웠고 그녀의 신음은 사내의 욕정을 부추기는 뜨거운 속삭임이었지만 알 수 없는 분노로 가슴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수윤의 가슴에 파고 들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한 열기였다.
“내가 좋으냐?”
수윤이 숨을 헐떡이는 이화를 향해 입을 열었다.
그의 싸늘한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뜨거운 열기에 어울리지 않는 싸늘한 눈동자였다.
“하읏...나으리...이 년은 나으리 밖에는 없어요...”
“내가 널 버리면 어찌하겠느냐?”
“나으리...나으리께서 이 년을 찾지 않으시면 이 년은 죽어버릴 지도 몰라요...”
‘봐라, 이것이 내가 원하는 대답이다. 나 밖에는 없다는 이 말이 옳은 말이다. 네 입에서 이 말이 나와야 했다. 언제까지나 네 입에서 이 말이 나왔어야 했다. 나 외에는 없다고, 내가 없으면 살 수 없다고, 이전의 모든 기생들이 그랬던 것처럼 너도 그랬어야 했다. 내가 없으면, 내가 떠나면 죽어버릴 거라고 너도 그랬어야 했다. 그런데 너는...’
“아앗! 나으리! 하으읏!”
격렬한 수윤의 허리짓에 뜨겁게 신음하며 이화가 두 다리로 그의 허리를 감았다.
매끈한 다리가 그의 허리에 감겨들며 그녀가 허리를 들썩거린다.
기생 주제에 처음이었던 것을 수윤이 기억했다.
이화라는 이 기생은 머리를 올린 기생인 주제에 수윤에게 안긴 것이 처음이었던 것이다.
한번도 사내를 알지 못하던 기생.
사내 없이 머리만 얹는 기생들이 간혹 있지만 이 이화라는 기생이 그런 경우였다.
자신이 떠나면 죽어버릴 거라는 이화의 말이 거짓이 아닐 거라고 수윤이 생각했다.
첫 사내이니 더 그럴 것이라고 그가 생각했다.
그가 떠나면 죽어버릴 거라던 기생들의 말은 수없이 들어왔었다.
실제로 죽은 기생들도 있었다.
바보 같다고 생각했었다.
몸 정이야 새로 정 붙이면 잊혀지는 것을 바보 같이 죽어버린 여자들이라고 생각했었다.
이 이화라는 기생도 마찬가지다.
첫 사내는 곧 잊혀 진다.
다른 사내를 받다보면 첫 사내는 잊혀 진다.
잊혀 진다.
잊혀지는 것이 정상이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어느 사이엔가 유경의 안에서 자신이 잊혀져 버릴 지도 모를 거라는 사실에 더 화가 났다.
“하...”
문득 수윤이 웃음을 터트렸다.
“나으리?”
갑작스레 웃음을 터트리는 수윤을 이화가 올려다본다.
“이 무슨 괘변이란 말인가...”
수윤이 중얼거렸다.
괘변이었다.
잊혀지는 것이 당연하지만 잊혀지길 원하지 않는 마음은.
그를 잊을 수 없어 그가 떠나면 죽어버리겠다고 말하는 기생들의 마음을 비웃었던 자신이 이제 와서 유경이 자신을 잊어버릴 것이 두렵고 초조하고 화가 나는 이 마음은 괘변인 것이다.
그녀들의 마음은 짓밟은 주제에 자신의 마음이 짓밟히자 화가 나는 것은 그야말로...어이없는 괘변인 것이다.
‘뿌린 대로...’
수윤이 입술을 깨물었다.
‘거두는 것인가...’
그가 기생들을 버렸듯이 이제 그녀가 그를 버리려 하고 있었다.
그에게 마음 준 기생들을 그가 버렸듯이 그녀에게 마음 준 자신을 그녀가 버리려 하고 있었다.
순간, 울고 싶어진 수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