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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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냐?”

어둠 속에서 문한의 목소리가 울렸다.

“아니요...”

벽을 보고 돌아누웠던 유경이 작게 대답한다.

촛불도 불어 꺼버린 어두운 방에 문한은 문가 쪽에 누워, 유경은 벽을 보고 돌아누워 그렇게 잠이 든 것처럼 조용하던 방이었다.

작은 방이라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에 누워 어두운 천정을 올려다보던 문한이 돌아누운 유경을 힐끗 쳐다본다.

신기했다.

처음 만났을 때는 물가에 내놓은 어린 아이마냥 하는 모든 짓이 불안 불안 위태위태하던 것이 어느새 그런 말까지 할 수 있게 된 것이 문한은 마냥 신기했다.

참 신기했다.

싹도 보이지 않던 어린 꽃눈이 순식간에 봉오리가 맺히더니 순식간에 만개한 꽃잎처럼 당당하게 펴버린 것이 신기했다.

문한은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그가 유경을 처음 안았을 때 유경은 마치 처녀와 흡사했었다.

사내를 처음 아는 처녀와 같은 수줍음을 가지고 있던, 아직 사내를 모르는 낯선 두려움을 안고 있던 그녀의 그 모습을 문한이 아직 기억했다.

그런 그녀에게 사내를 알게 해준 것이 자신인 것이다.

밤낮으로 그녀와 살을 섞으며 그녀에게 남녀 간의 운우지정을 가르쳐준 것은 다름 아닌 자신이었다.

작은 새처럼 숨을 할딱거리며 붉은 얼굴로 안기던 그녀의 모습이 아직 머릿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데 지금 눈앞에 있는 그녀는 운우지정을 가르치던 스승에게 연모지정에 대해 일침을 놓고 있는 것이다.

언젠가 어느 기생이 그런 말을 했던 것을 문한이 떠올렸다.

사랑은 사람을 변하게 만든다고...

그 말을 믿지 않았었다.

문한이 아는 사랑은 사람을 겁쟁이로 만들었고, 문한이 아는 사랑은 이십년이 지나도록 언제나 그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그러나 어느날 사랑을 찾아 훨훨 떠나간 그 기생은 그리 말했었다.

사랑은 연약한 여인을 세상 그 누구보다 강하게 만들 수 있다고.

그런 것이 사랑이라고 말하던 기생이 있었다.

핏덩이 같은 아들을 낳고 그 연모하던 사내를 따라 죽듯 숨을 거둔 그런 기생이 한 명 있었었다.

믿지 않았었다.

하지만 지금은 믿을 수 있다.

그리고 미약한 기대를 가져보는 것이다.

어쩌면 변할지도 모른다고.

영원히 변하지 않을 것이라 체념했던 자신의 사랑도 어쩌면 변할지도 모른다고...

“예전에...”

문한의 목소리에 벽을 보고 누웠던 유경이 감았던 눈을 떴다.

하지만 돌아보지는 않았다.

“하늘이 그를 내고 또 나를 내실 적에...”

유경은 문한이 말하는 그가 누구인지 안다.

처음으로 듣는 말이었다.

문한은 한번도 이런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시영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금기인 것처럼 두 사람 모두 한번도 입에 담지 않았던 말이 지금 문한의 입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저 정다운 꽃자리에서 하나로 묶어 내셨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그런데 꽃 중에 몹쓸 꽃이 상사화라 꽃이 지고나면 잎이 자라나니, 그는 꽃이고 나는 잎이라 바라만 보고 다가서지 못한 지 스무 해다. 하늘이 심술 맞아서 두 사람에게 한 마음을 주시고 한 몸의 인연은 주시지 않아서 스무 해 동안 정을 주지도 받지도 못했었다.”

유경이 아는 이 사내는 거칠고 자신을 가림이 없는 사내였다.

그러나 실상은 이십년 세월 동안 이렇게나 자신의 마음을 가려온 사내인 것이다.

이렇게나 섬세한 사랑을 간직한 사내인 것이다.

말하는 모양새가 거칠다고 그 사랑이 거칠까보냐.

그 하는 행동이 거칠다고 그 마음에 품은 사랑까지 거칠까보냐.

아닐 것이다.

아닌 것이다.

누구보다 무서운 칼잡이 사내지만 그 마음에 품은 사랑은 누구보다 여린 것이리라.

“유경아.”

부르는 목소리가 편안하다.

“스무 해면 족하지?”

“네, 나으리...”

유경은 그가 무엇을 묻는 것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충분했지.”

문한이 문을 향해 돌아눕는다.

“유경이 네 덕에 나도 이젠 사랑이나 한번 해보련다.”

“그리하세요, 나으리.”

“고맙다...”

“제가 뭘요...”

“그만 자라.”

“나으리도 그만 주무세요...”

어두운 문을 바라보며 문한이 눈을 감았다 뜬다.

이 문 너머에는 아직 그가 그대로 앉아 있을 것이다.

안 봐도 그 모습이 눈에 선했다.

어찌할 줄 모르는 아이처럼 그렇게 앉아 있겠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으로 그렇게 앉아 있겠지.

그리고 아침이 되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다시 멀쩡한 모습으로 돌아가서 시침을 뚝 떼고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새끼나 꼬고 있겠지.

내일 아침이 되면 당장 그 놈의 새끼줄을 몽땅 갖다 버려야겠다고 문한이 생각하며 다시 눈을 감는다.

대자리도 다 갖다 버리고, 짚신도 다 갖다 버리고, 왕골 바구니도 다 갖다 버리고...

이젠 볏짚 대신 마음이나 엮어보자 말할 것이다.

엮어도 소용없는 그런 것 대신 스무 해 동안 버려두었던 마음이나 엮어보자 그리 말할 것이다.

*

“아하하하하~”

“이 년아, 술 좀 따라 보거라. 자자, 넘치게, 넘치게.”

시끄러운 주정소리가 난무하는 술자리 한쪽에 조용히 앉아서 잔뜩 일그러진 얼굴로 술잔을 비우는 수윤의 옆으로 비단 치마가 살며시 내려 앉는다.

유경이 연소답청에 나가버리는 바람에 기분이 상해서 오늘은 기방에 나오지 말아야지 생각했던 수윤이었다.

하지만 술친구들이 그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는 것이다.

내키지 않는다는 그를 불러내 술자리 한쪽에 앉혀두고 자기들끼리 부어라 마셔라 하는 동안에 수윤은 온통 유경이 생각 뿐이었다.

허락도 없이 그런 자리에 가버린 그녀가 괘씸했기 때문이다.

다른 기생은 쳐다 보지 않고 저만 그리 이뻐하였는데 한마디 상의도 없이, 한마디 언질도 없이 그런 곳에 나가버린 것은 자신을 무시한 것이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어여쁘다 생각했었다.

기생에 어울리지 않게 순진한 모습도 어여뻤다.

그리고 짙은 화장을 하고 화려한 꽃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 역시 어여뻤다.

어떤 모습으로 무엇을 하고 있어도 어여뻤다.

사내를 녹이는 그 육체가 아니더라도 충분히 그녀의 그 수줍은 미소 하나만으로 어여쁘다고 생각했었다.

어여뻐서 다른 기생은 눈에도 들어오지 않았었다.

어여뻐서 기적에서 빼내 첩실로 들이고 싶은 마음까지 일었었다.

실로 오랜만에 누군가에게 머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그렇게 발칙한 짓을 저지른 것이다.

‘무슨 앙큼한 생각을 했길래...’

수윤이 말없이 술잔을 비운다.

좀 더 관심을 가져달라는 뜻일까?

더 예뻐해 달라는 뜻일까?

질투라도 해주기를 바라는 것일까?

이런 저런 생각에 수윤이 다시 빈 술잔을 들 때 바로 옆에 앉아있던 기생이 그 빈 잔에 술을 따른다.

“무슨 생각을 그리 깊게 하십니까?”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수윤이 옆을 힐끔 쳐다봤다.

낯선 얼굴의 기생이 어느새 옆에 앉아 있었다.

한성 기생들 얼굴을 어지간해서는 전부 알고 있는데 낯선 얼굴이었다.

“넌 이름이 무엇이냐?”

“기생년 이름이 무엇이 그리 중요합니까? 술 받으시어요.”

기생이 수윤의 잔에 술을 가득 채운다.

그 술잔을 비우며 수윤이 그녀를 살며시 바라봤다.

문득, 심술궂은 생각이 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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