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5 회: 재회 -->
“여기가 내가 일하고 있는 곳이다.”
산호가 객주 문을 열고 유경에게 눈짓했다.
한성부에서 유경을 데리고 나와 일단 자신이 머물고 있는 곳으로 데려온 산호였다.
일단 자기가 있는 곳을 알려주고 난 다음에 그녀를 집까지 바래다줘도 늦지 않는 것이다.
유경의 뒤를 단이가 졸래 졸래 따라 들어온다.
유경과 단이가 아는 사이라는 것이 한번 놀란 산호였다.
그리고 유경과 문한이 또 아는 사이라는 사실에 두 번 놀랬다.
하늘 아래 넓고 넓은 세상인 것 같지만 사람의 인연은 좁고 또 모르는 것이라는 것을 지금 산호도, 유경도 실감하는 중이었다.
문한이라는 사내가 유경과 산호, 두 사람 모두의 은인인 셈인 것이다.
게다가 단이까지 포함하여 말이다.
“넌 그만 돌아가지 그러느냐?”
산호가 따라 들어오는 단이를 향해 던지는 말에 단이의 입매가 픽 틀어진다.
“너무하시네 너무하셔.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매정한 말을 다 한데요? 내가 아니었음 오라버니하고 유경이는 만나지도 못했어, 그거 알아요? 그거 아는 사람이 지금 시방 나더러 그만 가라는 말이 나와요? 거 참 사람 못 됐네, 못 됐어.”
입이 한주발이나 나온 단이를 향해 산호가 손을 젓는다.
“나중에 내가 너 좋아하는 탁주 한 사발 사줄 것이니 오늘은 그만 가라. 내가 오랜만에 유경이를 만나 할 이야기가 많아서 그런다.”
“정말이죠? 정말 탁주 한 사발 사줄 거죠? 약속 어기면 안 돼요?”
“속고만 살았느냐? 사준다니까, 약속 지킨다니까, 유경이가 증인이다. 됐느냐?”
“오라버니가 안 사주면 유경이 더러 사라 그럴 것이니 약속 꼭 지키셔요.”
단이가 툴툴 거리며 돌아섰다.
“어, 단이 왔다 가냐?”
단이가 대문을 나설 때 마침 안으로 들어서던 호태가 단이를 발견하고 말을 건넸다.
“아버님은 여전하시냐?”
“골골 하시죠 뭐.”
“잘 됐다. 이거나 가져가거라.”
호태가 단이에게 뭔가를 건넨다.
기름 종이에 쌓인 것이다.
“이게 뭔데요?”
“나루에서 물 좋은 생선 들어왔다고 몇 마름 주길래 여기저기 나눠주고 남은 것이다. 가져가서 아버지 구워 드려라.”
“잘 먹겠습니다요.”
평소 같으면 팔딱 팔딱 뛰면서 좋다고 할 단이가 오늘 따라 시큰둥하니 대답하고 돌아가는 것이 영 이상해서 호태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안으로 들어오다 마침 방으로 들어가려는 산호와 유경을 발견했다.
“거, 웬 처잔가?”
호태의 헛기침 소리에 산호가 방으로 들어가려다 말고 얼른 허리를 숙였다.
“나으리, 오셨습니까?”
“웬 선녀가 이런 곳에 강림을 하셨나?”
“동생입니다.”
“동생?”
동생이라는 말에 호태의 귀가 솔깃해진다.
이 남자, 나이 마흔 중반이 넘도록 아직 장가도 못간 이 남자, 말 주변이 없어서 여자 근처에만 가면 손발이 달달 떨리고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는 이 남자, 산호가 동생이라고 소개하는 유경을 힐끔 쳐다보며 입술 끝이 올라갈락 말락 하는 것이다.
“도, 동생이 너 닮지 않아서 이, 인물이 괜찮구나. 널 닮지 않아서 다행이야, 다행이지.”
“유경아, 인사드려. 내가 신세지고 있는 대방 어르신이시다.”
“인사 올립니다. 유경이라 하옵니다.”
유경이 고름에 손을 얹고 곱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한다.
목소리며 인사하는 매무새며, 어느 것 하나 나무랄데 없이 고운 유경의 모습에 호태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이런 동생이 있으면 진즉에 말하지, 그래. 동생은 한성 어디에 거처하느냐? 아직 거처를 정하지 않았다면 내가 좋은 집을...”
“나루터의 우시영 나으리 댁에서 기거하고 있습니다.”
유경이 얼른 그 말을 받는다.
“시영이?”
시영의 집에 머무르고 있다는 유경의 말에 호태의 눈이 커진다.
그러다가 이내 손뼉을 쳤다.
뭔가 생각난 것이다.
“그 기생이 바로 너였구나. 시영이가 거뒀다는 기생이.”
일전에 시영이 비단옷이며 노리개를 마련해야 한다며 돈을 갈취해 간 것을 호태가 떠올린 것이다.
그때 말로만 듣던 그 기생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그 어르신께 제가 신세를 많이 지고 있습니다.”
“그 놈 신세가 아니라 내 신세지. 그 놈이 낭자에게 해준 것은 전부 다 내게서 빼앗아간 것이란 말이야. 그러니까 낭자가 신세를 지고 있는 건 바로 나니까, 그 놈에게 감사할 필요는 없어. 이제 나에게만 감사하면 되는 거야. 알겠느냐?”
호태의 장난스런 말에 유경이 작게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호태가 잠시 얼이 빠진다.
“멀뚱이 서 있지 말고 들어가 보거라.”
다시 정신을 차린 호태의 손짓에 산호와 유경이 한번 더 머리를 숙이고는 방으로 들어간다.
두 사람이 방으로 들어간 다음 닫히는 문을 보며 호태가 두 주먹을 불끈 쥔다.
‘동생이란 말이지! 동생! 아무렴! 동생은 좋은 것이야!’
마흔 중반의 노총각, 갑자기 피가 끓기 시작하는 것이다.
*
“왜 그런 자리에 간 거냐.”
방 안에 앉아 살펴볼 것도 없는 살림을 살피는 유경에게 산호가 넌지시 물어본다.
그런 난잡한 모임에 간 이유를 묻는 것이다.
“기생이니까요. 부르면 가야지.”
“송도에서는 그런 난잡한 모임은 없었잖아.”
“여기는 한성이잖아, 오라버니. 송도가 아니라.”
“왜 송도에 있지 않고 한성에 왔는지 물어봐도 되는 거냐?”
“내가 뭔지도 모른 채로 그렇게 지기 싫었어. 기생이라는 이름은 가졌는데 실상은 그 무엇도 아닌 채로 그렇게 있기는 싫었어.”
“그래서, 네가 택한 것이 한성에 와서 그런 꼴을 당하는 것이었어?”
“무슨 꼴? 내가 무슨 꼴을 당했다고 그래?”
“백주대낮에 새파란 것들이 너를...”
산호가 다음 말은 차마 잇지 못했다.
‘그 새파란 어린 양반놈들이 너를 벗기고 욕보이려고 했는데 너는 그게 아무렇지도 않다는 거야?’
차마 그 말은 내뱉지 못한다.
“난 기생이야, 오라버니. 잊었어? 기생이라고. 돈에 팔리는 기생. 누구라도 화대를 치르면 날 가질 수 있어.”
“유경아.”
산호가 유경을 향해 손을 뻗으려다 말고 거둔다.
그의 손이 유경의 손을 잡으려다 말고 다시 그의 무릎 위에 올라갔다.
“기생, 안하면 안 되는 거냐?”
일년 전에 하고 싶었던 말이었다.
아니, 일년 전에 했어야 했던 말이었다.
“오라버니...”
“기생, 그만 두고...”
‘기생 노릇 그만 두고 나하고 살자. 나하고 초라한 듯 소박하게 살자. 네가 너를 부하게는 만들어주지 못해도 행복하게는 해줄 수 있으니 나하고 살자.’
“오라버니는 몰라.”
유경이 담담한 표정으로 산호를 바라봤다.
“오라버니는 아무것도 몰라.”
“유경아.”
“내겐, 이것 밖에 남은 것이 없어. 아니, 내겐 처음부터 이것 밖에 주어진 것이 없었어. 그런데 이것마저 내려놓으면 난 뭐가 되는 거야? 얹혀사는 유경이? 더부살이 유경이? 밥이나 축내는 유경이? 엄마가 버린 아이 유경이? 천덕꾸러기 유경이?”
“유경아!”
“오라버니는 몰라. 오라버니는 버림받은 적이 없잖아. 오라버니는 버려진 적이 없잖아. 또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에 떨어본 적이 없잖아. 버려지면 어떻게 하나 남몰래 울어본 적이 없잖아.”
유경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