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4 회: 재회 -->
“수윤이...때문이오?”
추영의 말에 유경이 눈을 감았다.
그의 짐작이 옳은 것이지만 지금 그녀에게 고백한 남자에게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까지 잔인해질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그녀가 말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는 이미 알고 있는 것이다.
“맹세컨대 나는 이제 그대를 울리지 않을 것이라 약속할 수 있소. 하지만 수윤은...그대를 아프게 만들 것이오.”
“...”
“나는 그대의 마음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소.”
“제 마음은...제가 알아서 합니다.”
유경이 몸을 일으켰다.
“그만 가보겠습니다. 도와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대를 물에서 건져낸 것은 내가 아니오.”
일어나서 옷고름을 추스르던 유경이 손을 멈칫거렸다.
“나는 그저 그대를 이곳으로 데려왔 뿐, 물에 뛰어들어 그대를 구해낸 이는 따로 있소.”
“그게...”
유경이 흐릿한 의식 속에서 들었던 산호의 목소리를 기억해냈다.
“그게 누구인지...”
“밖에서 그대가 깨어나기만 기다리고 있소.”
‘설마...’
유경이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어느새 날이 어두워져 있었다.
어두워진 마당에 한 사내가 등지고 앉아 있었다.
마당에 드리워진 횃불의 그림자가 일렁거리는 그 남자의 등은 어디선가 본 등이었다.
유경은 그 남자의 등을 알고 있었다.
유년의 시절, 누구보다 든든하게 그녀의 곁을 지켜주었던 남자의 등이었다.
언제나 곁에서 손을 잡아주며, 언제나 옆에서 웃어주던...
그녀가 울 때면 눈물을 닦아주고 넘어주면 일으켜주던 그 남자의 등이었다.
얼굴을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왜 모를까.
어떻게 모를 수 있을까.
내쉬는 숨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는 것을.
“오라...버니...?”
산호는 그저 멍하니 어둠이 내린 마당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할 수 있는 다른 일이 없었다.
그녀가 잠들어 있는 방에 그가 들어갈 수는 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일은 그저 기다리는 것이었다.
그저 기다리는 그의 귀에 그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목소리가 귀에 감기는 순간 산호가 눈을 감았다.
눈을 감고 이대로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얼굴을 돌려 유경을 볼 자신이 없었다.
아직 그녀의 앞에 나설 준비가 되지 않은 채로 그녀를 볼 수 없었다.
그녀를 책임질 수 있는 멋진 사내가 되어 그녀 앞에 나타나겠다고 다짐해지만 아직 그런 사내는 되지 못했다.
되지 못해서 아직은 그녀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볼 수 없어서 달아나고 싶지만,
“오라버니?”
그녀의 목소리가 그의 발을 잡고 놓아주지 않는다.
“오라버니, 맞지요?”
그 목소리에 끝끝내 발이 움직이지 못한다.
“잘 지냈어?”
‘미안...’
산호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한성에는 대체 언제 온 거야?”
‘미안. 듬직한 모습으로 네 앞에 나타나지 못해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네 손을 잡을 수 있을 만큼 듬직한 남자가 되지 못해서 미안...’
산호의 붉어지는 눈시울 안에 유경의 모습이 담겨졌다.
많이 변했는데 조금도 변하지 않은 모습에 산호가 눈시울을 붉혔다.
그녀는 많이 변했는데 조금도 변하지 않는 자신의 초라한 모습에 눈시울을 붉히고, 그녀는 조금도 변하지 않았는데 왠지 몰게 낯선 그 모습에 붉어진 눈시울에서 눈물이 흐르고야 만다.
“오라버니!”
달려온 유경이 산호의 품에 안겼다.
마치 그때처럼, 조금도 변함없이 그때처럼 달려와 안기는 유경의 향기에, 그 따뜻한 온기에 산호가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오라버니!”
산호의 품에 안겨서 유경이 마침내 엉엉 울음을 터트렸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마침내 그녀의 눈에서 흐르고야 말았다.
한성에 와서 한번도 흘리지 못했던 눈물이었다.
모질게 마음 먹어야 한다고, 절대로 울면 안 된다고 고집스럽게 입술을 깨물며 버틴 그녀였다.
그러나 산호의 품 안에서, 마치 엄마의 품 같은 산호의 품 안에서 그녀가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그리운 고향집의 느낌이었다.
마음을 내려놓고 쉴 수 있는 그 느낌이었다.
“왜 말도 없이 떠난 건데, 왜...”
유경의 흐느낌에 원망이 묻어나고 있었다.
가장 서러웠던 그 날 아침, 그 서러운 순간에 곁에 있어줄 아무도 없어서 더 서러웠던 그 날 아침, 떠난다는 말도 없이 떠나버린 산호를 얼마나 원망했던가.
“미안...오라버니가 미안...”
산호가 유경의 머리를,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미안하다는 말만 내내 되풀이했다.
모든 것이 미안했다.
이제 그녀의 앞에 섰건만 그녀를 데리고 떠날 수 없음이 미안했다.
여전히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자신의 초라한 손이 미안했다.
“...”
그늘진 표정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고 서 있던 추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녀에게 있어서 수윤의 존재만큼도, 저 사내의존재 만큼도 되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에 추영이 입술을 깨물었다.
누구보다 그녀에게 더 가까이 다가설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 그였지만 이제야 비로소 깨달은 것이다.
실은 누구보다 먼 자리에 서 있는 자신의 모습을.
*
“미쳤어?”
문한의 말에 시영이 아무런 대답도 없이 엮고 있던 대자리를 툭툭 쳐낸다.
“유경이를 창기로 만들려고 그러는 건가? 그런 망나니들 연소답청에 내보내다니, 대체 무슨 생각으로...”
“느끼게 해주려고.”
“뭐?”
시영의 짧은 대답에 문한의 눈썹이 일그러졌다.
“때로는 잔인하게 깨닫게 되는 현실도 있는 법이니까. 유경이에게 잔인할 지라도 현실을 똑바로 직시할 수 있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나는...”
“단수윤.”
그 이름이 시영의 입에서 나오자 문한의 눈이 가늘어진다.
“그 사내는 안 돼. 다른 사내는 다 되도 그 사내는 안 돼. 그러니까 유경이는 이제 왜 그 사내가 안 되는 지 깨달아야 해.”
“유경이가 단선비를...”
“제 말로는 아니라 하지만, 제 말로는 끊어내고 기생이 되겠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그렇게 그렇다 아니다로 끝날 수 있는 것이던가?”
시영이 문한을 쳐다봤다
그 말에 문한이 시선을 돌려버린다.
마음이 그런 식으로 매듭지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문한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어떻게 모질게 다짐해도 마음은 그렇게 매듭지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유경이는 그 사내를 마음에서 버리지 못해. 그리고 그 사내는 내가 지금까지 본 중에 가장 치명적인 사내야.”
그 말에 문한이 피식 웃었다.
그리고 가만히 시영을 흘겨 본다.
“자네보다 더?”
“...”
문한이 던진 말에 시영이 다시 말이 없어진다.
그리고 다시 묵묵히 대자리를 엮는 손길을 바라보던 문한이 조용히 중얼거린다.
“그래도 나는...아프고 상처받더라도 그것마저도 유경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원래 사랑이라는 것이 상처도 나고, 눈물도 나고, 한숨도 쉬고, 때로는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지는 것 아니겠나. 정말 어떤 때는 죽이고 싶을 만큼 미워져야 사랑이지...”
“별 시덥잖은 소리.”
“내가 가끔은 자네가 죽일 만큼 미워지거든.”
“그럼 죽여.”
“예뻐서 못 죽여.”
“그럼 입 닥치고 있어.”
“네, 마님.”
그 말을 하며 킥킥 웃는 문한을 향해 시영이 대나무 바구니를 던져 버린다.
시영이 던진 대바구니에 맞으며 문한이 바닥에 뒹굴었다.
그리고 뒹군 김에 팔 베개를 하고 누워 버린다.
“나는 모르겠다. 다 팔자대로 되는 거겠지. 인연을 묶고 푸는 것이 하늘님 소관인데 내가 애끓여 봤자 소용이 없지.”
그리고 눈을 감자마자 코를 골기 시작하는 문한을 시영이 가만히 쳐다본다.
‘나는, 죽지도 못하는 나와 죽이지도 못하는 자네처럼...버릴 수도 없는 그와 버리지도 못하는 그녀가 될까 무서워,,,’
“하지만...”
시영이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하늘님 소관이라...”
시영의 입가에서 설핏 무거운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 하늘님 참 심술궂기도 하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