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회: 재회 -->
“으응...”
힘겹게 눈을 뜬 유경이 낯선 방 안의 풍경에 몸을 일으키려 했다.
하지만 천근같은 몸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다.
그녀가 곧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아차렸다.
“내가 왜...”
아직도 어지러운 머릿속을 애써 정리하며 유경이 기억을 되살려 본다.
마지막 기억은 물 속에 빠지던 것이었다.
물속에 빠지며 정신을 잃었던 것이 마지막 기억이었다.
어떻게 건져졌으며, 어떻게 이 낯선 방에 와 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누가 자신을 구해준 것인지...
“오라버니...”
흐릿한 의식 속에서 문득 산호의 목소리가 들렸다는 것을 그녀가 어렴풋이 기억해냈다.
환청인지 진짜인지 알 수는 없지만 그것은 분명 산호의 목소리였다.
“정신이 들었소?”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경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그건 산호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산호의 목소리가 아닌...
“나으리...?”
그녀의 옆에 추영이 앉아 있었다.
“나으리께서 어떻게...”
“그대로 누워 있으시오.”
일어나려는 유경을 추영이 만류했다.
“봄이라 하지만 아직 물은 차가운지라 몸에 온기가 돌 때까지는 여기에 있으시오. 움직일 만하다 판단되면 내가 댁까지 데려다줄 것이니.”
“제가 왜...”
아직도 자신이 왜 이곳에 추영과 함께 있는지 알수 없는 유경이었다.
자신이 물에 빠지고 정신을 잃은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물에 빠진 것을 보고 내가 이리로 데려온 것이오.”
“나으리께서 저를...건져주신 건가요...?”
“그대를 건져낸 것은 내가 아니지만...”
추영이 잠시 머뭇거린다.
지금쯤 밖에 산호가 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추영이 방문을 열지 않는 이상 산호는 이곳으로 들어올 수 없다.
산호의 눈빛이 거슬리는 추영이었다.
그 눈빛은 분명 연심을 품은 사내의 눈빛이었다.
유경과 그가 어떤 사이인지는 알 수 없지만 더 이상 다른 사내에게 유경을 내어주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기 때문에 추영이 밖에 기다리고 서 있는 산호를 외면하고 있었다.
치졸하다 말할지라도 어쩔 수 없었다.
이제 결심했기 때문이다.
치졸하다는 소리를 들어야 한다면 기꺼이 듣기로 했다.
이기적이라는 말도, 친구를 배신했다는 말도 기꺼이 듣기로 했다.
어떤 말이라도, 어떤 조롱이라도, 어떤 손가락질도 기꺼이 받아들일 준비가 된 것이다.
그것들이 그가 원하는 여인을 얻는 길에 거쳐야 하는 관문이라면 기꺼이 수용할 준비가 된 것이다.
유경.
이런 식으로 인연이 이어질 줄 몰랐던 여인.
우연이 인연이 되고 인연이 필연이 되어버린 여인.
도움을 받아 마음의 짐을 지게 되고, 그 빚을 갚으려다 되려 더한 마음의 짐을 얻어버렸고, 갚으려고 하면 할수록 더 많은 마음의 짐을 져버린 까닭에 떨치지 못했던 정이 연심이라는 이름으로 이제 빚을 갚으라 하고 있었다.
한번도 품어본 적이 없었던 연심.
자신이 한 여자에게 연심을 품고 이런 모습을 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었다.
더군다나 기생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친구의 여인이었다.
하지만 그 모든 것이 하찮아 보일 정도로 어느새 이 여인이 가슴에 자리잡아 버린 것이다.
이것이 어디에서 온 마음인지는 추영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어느 바람결에 날아온 씨앗이 그의 마음에 자리 잡고 뿌리를 내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만약 바람결에 날아온 씨앗이라면, 그 봄눈 흩날리던 밤, 그 흩날리던 꽃잎들 중 하나가 그 마음에 떨어져 뿌리를 내린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어디에서 시작되었는지...
왜 하필 그녀인지...
왜 하필 자신인지...
이 마음이 어디로 어떻게 흐를 것인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놓치고 싶지 않은 것은 이것이 진짜 연심이기 때문일 것이다.
한순간의 치기가 아닌 진짜 연심.
어느날 문득, 깨달아버린 진심.
긴 겨울이 지나고 온다는 소리도 없이 어느날 아침 문을 열면 봄이 성큼 다가와 있는 것처럼 이 마음도 그러했다.
온다는 소리도 없이 어느날 문득, 바라보니 그곳에 연심이 자리잡고 있었다.
알지 못하는 사이에 성큼 다가온 봄처럼, 그녀를 향한 연심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미 그의 가슴에서 꽃을 피우고 있었다.
크고 만개한 꽃을...
“나는...”
추영이 누워있는 유경을 내려다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녀가 깨기만을 기다리며 몇 번이나 속으로 되뇌이던 말이었다.
그녀에게 들려주고 싶은 고백이었다.
“나는 이기적인 사내요.”
“...”
그 말에 유경이 전날에 그녀가 그에게 했던 말들을 떠올렸다.
그가 이기적이라며, 가장 이기적인 사내라고 그를 몰아붙였던 것을 떠올렸다.
“그대의 말처럼 나는 이기적인 사내요. 언제나 나만 보느라 주위를 보지 못하오. 내 눈은 언제나 나를 보고, 내 마음은 언제나 내가 가야 할 길만 생각하고, 내 발은 언제나 내가 원하는 곳만 밟아왔소. 그렇게 하는 동안 주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누가 어떻게 아파하는 지에 대해서는 관심도 없이 그렇게 이기적으로 살아왔소. 내가 그들의 삶에 개입하지 않는 대신 그들 역시 내 삶에 개입하지 않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말이오. 그리고 그날 그대를 만났지. 그 봄꽃 흩날리던 밤, 그대를 만났지. 이기적인 내 삶에 겨울의 종식을 알리는 꽃망울처럼 뛰어 들어온 그대를...”
그때를 떠올리며 추영이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그대가 내 상처를 싸매어주고...나는 그대가 떠난 다음에도 그대의 흔적을 내 몸에 새겨놓을 수밖에 없었소. 싫든 좋든 그대가 나에게 남겨 놓은 그 흔적을...그런데 신기한 것은 그 작은 흔적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는 것이오. 작은 균열이 거대한 얼음을 깨뜨리듯 내 삶에 뛰어 들어온 그대라는 작은 점이 내 삶을 송두리째 바꿔 놓았지. 그대에게서 생각을 떼지 못하고 마침내 이기적이었던 내 삶의 방식을 버리고 그대의 삶에 개입하고 말았으니까. 그리고 그대의 삶에 개입하는 순간, 나는 이미 그대에게 뗄 수 없는 발을 들여놓아 버렸고...이제 그 한발 들인 곳에 내 전부를 들이고자 하오. 이제 와서, 뒤늦게 이제 와서 이기적인 결정이라 욕해도 좋소. 그대가 하는 원망, 욕, 내가 다 들어주겠소. 앞으로 평생 그대가 날 원망한다 하더라도 내가 기꺼이 그 모든 것을 받아주겠소. 그리하여 다시 그대를 내 품에 둘 수만 있다면.”
남자의 고백이었다.
평생을 같이 하고 싶다는 남자의 고백이었다.
그녀에게 남자라는 것을 알게 한, 그리고 서러운 이별을 알게 한 남자가 이제 그녀에게 평생을 같이 가자 그리 고백하고 있었다.
“난 아직 이것을 간직하고 있소.”
그 말과 함께 추영이 가락지를 내밀었다.
유경이 그에게 준 것이었다.
“한순간도...떨어뜨려 놓은 적이 없었소...”
추영의 시선이 유경을 향한다.
“내 마음이 한순간도 그대를 잊은 적이 없듯...”
고백.
남자의 고백.
그러나 이 남자의 고백을 듣는 순간 유경이 다른 남자의 얼굴을 떠올렸다.
“나으리의 마음,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그 고백을 듣고 싶은 남자는 이 남자가 아니었다.
다른 남자에게서 이와 같은 고백을 듣고 싶었다.
평생 함께 하고 싶다는 고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