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2 회: 재회 -->
단이의 손가락이 꾸물 꾸물 거렸다.
물론 산호가 이 정도 새끼 양반들을 어떻게 하지 못할 실력이 아니라는 건 단이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인 것이다.
양반을, 그것도 내노라 하는 집안의 자제들을 건드렸다가는 뒷탈이 나도 제대로 날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아무리 호태가 그 바닥에서 소문난 장사꾼이라고 해도 양반들 기세에는 당해내지 못한다.
지금은 버릇을 고쳐준다고 이 새끼 양반들을 호되게 후려패줄 수는 있지만 그 후에는 산호가 잡혀가 멍석말이 당하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는 것이다.
덩달아 유경까지 같이 경을 치게 될 수도 있었다.
원래 양반이라는 자들이 그 놈의 자존심 하나 만큼은 생명처럼 여기지 않던가.
단이가 산호의 품에 안겨 있는 유경을 힐끔 쳐다봤다.
숨은 돌아왔지만 아직 그녀의 몸은 젖은 채였다.
봄날이라 하지만 아직은 얼음짱 같은 물에 빠졌다가 나온 그녀의 몸이 얼음처럼 차가울 것은 만져보지 않아도 분명했다.
빨리 더운 방으로 데려가 몸을 덥히지 않으면 단단히 병이 날 것이 틀림없었다.
“이 상놈이 어딜 양반 앞에서 눈을 부라려?”
젖은 도포 자락의 양반이 곰방대를 치켜 올렸다.
곰방대로 산호를 내리칠 것처럼 눈을 부라리며 험상궂은 표정을 짓는 양반을 바라보며 산호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산호의 눈에는 양반이고 뭐고가 보이지 않았다.
품 안에 안긴 유경이만 아니라면 당장 이곳을 쑥대밭으로 만들어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살갗에 느껴지는 유경의 싸늘한 체온에 애써 화를 삭이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도 모르는 양반 사내가 산호를 향해 집어든 곰방대를 내리치려고 할 때,
“예문관 대제학 어르신 댁 자제가 아니시오?”
낮고 묵직한 목소리에 사내의 손에 들린 곰방대가 멈칫 거렸다.
산호의 시선도, 단이의 시선도, 그리고 그 자리에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향했다.
“명망 높으신 댁 자제분이 어찌 이런 곳에서 기생들과 노닥거리고 있는 것인지...”
목소리에 위협은 없었다.
다만 그 올곧은 성품을 보여주듯이 흔들리지 않는 반듯한 목소리가 듣는 이로 하여금 주눅이 들게 만들 뿐이었다.
“홍문관 대제학 어르신께서는 대제학에 임명되실 때에 자제들의 무명옷을 베옷으로 바꾸어 입히고 상 위의 은수저를 거두고, 다섯 가지 반찬을 세 가지로 줄이라고 하셨다하기에 무척이나 감복을 하였는데 이번 예문관 대제학 어르신께서는 자제분들에게 그리 가르치시지는 않았나 보오?”
대제학이라 함은 도덕성이 뛰어나고 가문에 하자가 없는 석학들이 오르는 자리로 최고의 학자와 인격자라는 명성을 얻는 자리다.
그리하여 대제학을 온 나라의 학문을 바르게 평가하는 저울이라 부르지 않던가.
속설에 삼정승을 배출한 것보다 대제학을 배출한 집안이 더 으뜸이라 하였으니 그만하면 대제학의 명성이 갖는 위엄을 알만도 한데 그 대제학의 자제가 한낮에 기생과 연소답청을 와서 게다가 이런 소란을 떨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그야말로 망신 중의 망신인 것이다.
“이 일이 요란스런 소문이 되어 알려지게 되면 춘부장의 얼굴에 먹칠을 한다는 것 쯤이야 아무리 철이 없는 도령이라도 알 만도 할 것인데...”
서늘한 눈동자가 곰방대를 들고 서 있는 양반 자제를 향한다.
아직 정식 상투를 틀어 올리지도 않은 풋내 가득한 양반 도령이 어줍짢은 양반 노릇을 하느라 호기를 부려가며 기생을 데리고 이런 곳까지 온 것이라는 건 그도 알고 있었다.
이런 일은 봄이 되면 빈번하게 일어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 뒤에는 꼭 한 두 번씩 사달이 벌어지게 되어 있는데 오늘 일이 딱 그런 것이다.
“여기서 자리를 접고 돌아가시면 나도 오늘의 일은 거론하지 않을 것이니, 춘부장의 체모를 생각해서 이만 돌아가는 것이 낫겠소.”
곰방대를 든 손이 부르르 떨리는 것을 보며 이 사내, 한마디 더 덧붙인다.
“아니면, 풍기문란죄로 다들 한성 옥사로 압송을 하리이까?”
그 마지막 한마디에 그 자리에 있던 양반들이 허둥지둥 자리를 정리한다.
멀찍이 떨어져서 이 꼴을 보고 있던 종들이 달려와서 양반들이 자리를 정리하는 것을 도와주고 타고 왔던 나귀에 기생들을 싣고 허둥지둥 돌아가는 꼴을 가만히 보고 있던 사내가 그때까지 뒤에 서서 돌아가는 일을 지켜보고 있던 산호와 단이 쪽으로 돌아섰다.
“말에 태우거라.”
“네?”
대답한 것은 단이였다.
그 사내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던 단이가 그 첫마디에 엉겁결에 대답했다.
“그 아이를 말에 태우라는 말이다. 걸어서 어느 세월에 이 언덕을 내려가겠느냐. 그 언 몸을 빨리 녹이지 않으면 병이 들 것이니 빨리 더운 집으로 데려가야 하지 않겠느냐.”
유경을 꽉 끌어안고 있는 산호를 향해 던진 추영의 말이었다.
유경을 놓을 것 같지 않은 산호의 모습에 추영이 눈살을 찡그렸다.
“그 아이를 병이라도 나게 하고 싶은 것이냐?”
추영의 말에도 움직이지 않는 산호를 뒤에서 단이가 흔들었다.
“오라버니, 저 분 말이 맞아요. 일단 유경이를 따뜻한 곳으로 옮겨야죠.”
단이가 산호의 팔을 잡고 흔들었다.
몇 번을 흔들자 그제야 산호가 품 안에서 정신을 잃고 있는 유경을 내려다보고는 입술을 깨문다.
망설임 끝에 산호가 추영을 향해 입을 열었다.
“알겠습니다.”
산호의 대답을 들은 추영이 말 위에 뛰어 올랐다.
말 위에 오른 추영이 손을 내밀자 산호가 그에게 유경을 건네 준다.
유경을 받아 품 안에 끌어안은 추영이 말을 돌리며 단이와 산호를 향해 말했다.
“먼저 갈 것이니 한성부로 오거라. 내가 말을 해놓을 것이니 들어오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이다.”
그 말을 남기고 추영이 말을 달려 사라지는 것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산호의 어깨를 단이가 툭툭 친다.
“여기서 멍하니 있으면 쓰나. 우리도 빨리 따라 가야지요 오라버니.”
단이의 말에 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늦게 앉게 가려면 뛰어가야 할 것이다.
하지만 뛰어가더라도, 유경이 눈을 떴을 때 그 옆에 있는 것이 자신이고 싶었다.
정신을 차린 유경의 눈에 가장 먼저 보이는 얼굴이 자신이고 싶었다.
오라버니가 옆에 있으니 안심하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자신의 옷도 젖어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한 채로 산호가 뛰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단이가 알 듯 모를 듯한 표정으로 같이 뛰고 있었다.
*
기막힌 우연이라고 추영이 생각했다.
이 기막힌 우연이 하늘의 뜻이라면, 포기하지 않겠다고 생각했다.
뒤를 쫓은 것은 유경이 아니라 단이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쩍은 단이의 뒤를 쫓고 있었는데 그들이 향하는 곳에 유경이 있었던 것이다.
물에 빠진 유경과 그녀를 구하기 위해 뛰어든 산호, 그리고 그 후에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며 망설이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지금 나서서 자신이 단이를 뒤쫓고 있다는 것을 들키면 앞으로의 일에 지장이 있을 것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어도, 나서지 않을 수 없었다.
유경을 끌어안고 불타는 눈동자를 휘번뜩이는 그 사내에게 언제까지나 그녀를 안게하고 싶지 않았다.
질투일 것이다.
그녀를 구한 것이 자신이 아니라는 질투.
“...”
추영이 품 안에서 정신을 잃고 있는 유경을 내려다봤다.
이제야 겨우 자신의 품 안에 들어온 그녀였다.
‘놓치지...않아...’
이 품을 절대로 놓치지 않겠다고 추영이 다짐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