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회: 재회 -->
물은 깊지 않았다.
기껏해야 일곱, 여덟 자 쯤 되는 깊이였다.
물살이 세지도 않았다.
한적한 산속, 계곡을 끼고 돌아 나오는 너른 냇물에 불과했다.
배는 밧줄에 묶여 있었다.
뱃놀이를 즐기다가 행여나 멀리 떠내려 가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배는 긴 밧줄에 묶여 있었다.
설령 배가 뒤집어 졌더라도 조금만 헤엄쳐 나오면 되는 거리였다.
아니, 뒤집힌 배를 붙잡고, 배와 연결된 밧줄만 잡고 나오면 되는 거리였다.
하지만 그럼에도 유경이 물 위로 떠오르지 못하는 것은 그녀가 물이라는 것을 처음 경험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한번도 물 속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 유경이었다.
더군다나 이렇게 차가운 물이다.
봄기운이 물씬거리지만 아직 물은 차디 차기만 했다.
그 차가운 물 속으로 잠겨버린 유경의 몸이 허우적거리기만 할 뿐 위로 올라가지 못했다.
이렇게 깊지 않은 수심인데 자꾸만 빠져드는 것이다.
‘윽...!’
입 안으로 밀려 들어오는 차가운 물에 그녀의 숨이 턱턱 막혔다.
온 몸을 휘어감는 차가운 냉기에 그녀의 팔 다리가 움직이지 않았다.
‘누가 나 좀...’
한 배를 탔던 양반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
흐릿해지는 그녀의 눈 안에 뒤집힌 배의 그림자만 일렁거렸다.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어쩌면 이대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나으리...’
왜 사람은 죽을 때가 되면 그리운 사람이 떠오르는 것일까.
아니, 그리운 사람이 떠오르는 것이 죽을 때가 되었다는 징조인 것일까.
수윤의 웃는 얼굴이 머릿속에 떠올라서 차가운 물 속에 잠기는 유경의 입가에 흐릿하게 미소가 떠올랐다.
반달을 보여주겠다며 웃던 그의 미소가 떠올랐다.
이름을 알아내겠노라고 짓궂게 장난을 걸어오던 그 모습이 떠올랐다.
밤새도록 그녀를 놓아주지 않고 살을 섞어오던 그 뜨거운 모습이 떠올랐다.
바람결에 흔들리는 버들잎처럼 한들거리며 나부끼던 그 푸른 도포가 떠올랐다.
‘나으리...’
서방님이라고 부르라던 그 다정한 목소리가 떠올랐다.
‘나으리...’
그리고 후회했다.
왜 이런 선택을 해버린 것일까...하고.
왜 그 사람과 함께 사는 선택을 하지 않은 것일까...하고.
버림받을지언정 왜 그 사람과 함께 하는 미래를 택하지 않았을까...하고.
왜 일어나지도 않은 일에 두려워하며, 미리 그 사람의 마음을 단정지으며 그 사람을 외면하는 길을 택해버린 것일까...하며.
기생이 무엇이라고...
이까짓 기생이 무엇이라고...
왜 이곳에 나와버린 것일까...
왜 수윤의 품을 버리고 이곳으로 나와 버린 것일까.
왜 수윤을 믿지 못한 것일까.
왜 그가 자신을 버릴 것이라고 생각해버린 것일까.
불신.
자신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스스로의 마음 깊은 곳에 숨어있던 불신은 이런 식으로 모습을 드러내 그녀로 하여금 사랑을 외면하게 만들어버렸다.
불신.
버림받는 것에 대한 불신.
누군가에게 버려지는 것에 대한 상처.
어머니가 그녀를 버렸다.
이추영이 그녀를 버렸다.
그리고 단수윤도 그녀를 버릴지도 모른다.
상처가 만들어낸 불신.
불신이 사랑을 상처 입히고...사랑에 상처입어 또 불신이 되어버리고...
결국 이 악순환을 만들어내는 것은 그녀 자신인 것이다.
-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거라.
그 말은 그녀의 속마음을 꿰뚫어보는 시영의 충고였다.
- 후회는...하지 마라...
언젠가 스쳐 지나가며 문한이 던졌던 말을 떠올렸다.
후회.
사람의 삶에 후회가 없을 수는 없지만...
후회를 만들어내지 않는 삶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겠지만...
‘나으리...’
이 순간 만큼은 후회하는 유경이었다.
자신의 선택을, 수윤을 떠나온 자신의 선택을, 그리하여 이 자리에 있게 된 자신을 후회했다.
그를 믿지 못한 자신을.
또 다시 버림받을지언정 그를 믿지 못한 자신을...
차가운 물 속에서 그녀의 눈이 감겼다.
온 몸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흐릿해지는 의식 속에서 그녀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아주 그립고...아주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득해지는 의식 속에서 귓가에 누군가 소리치는 것 같아서 그녀가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고 말았다.
그 목소리는 그녀가 누구보다 의지했던 오라버니의 목소리였기 때문이다.
그 철없이 행복했던 시절의 기억이 어렴풋하니 떠올라 그녀가 정신을 잃으면서도 미소를 짓고 있었다.
*
“유경아-!”
차가운 물 속에서 그녀를 끌어낸 산호가 그녀의 가슴을 내리쳤다.
싸늘하게 얼어붙은 그녀는 숨을 쉬지 않고 있었다.
“유경아!”
산호가 유경의 턱을 잡고 그 입술을 덮었다.
자신의 더운 숨을 유경의 입 안에 불어 넣어주며 다시 그녀의 가슴을 힘껏 누른다.
뱃일을 하면서 물에 빠진 사람들을 수없이 봐왔었다.
숨을 돌려주고 가슴을 뛰게 하면 그들은 곧 정신을 차렸었다.
유경도 그럴 것이라는 생각에 산호가 몇 번이나 유경의 입술 안으로 자신의 숨을 불어 넣어주며 그녀의 가슴을 내리 눌렀다.
차가운 물에 젖은 그녀의 젖가슴이 산호의 굳은 살 박힌 손바닥 아래에서 뭉개졌다.
몇 번이나 그렇게 했을까.
“쿨럭!”
차가운 기침과 함께 유경의 입에서 물이 주르륵 흘러 나왔다.
그리고 그녀의 벌어진 입술에서 숨결이 새어 나왔다.
“유경아! 정신 차려...!”
그녀의 숨이 돌아왔다는 걸 안 산호가 그녀를 내려다보며 소리쳤다.
그녀가 탄 배가 뒤집히며 그녀가 물에 빠지는 것을 본 순간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물 속으로 뛰어든 산호였다.
얼음 같은 물에 잠겨들고 있는 유경을 끌어내어 미친 듯이 그 이름을 불러가는 산호의 모습을 다른 이들이 옆에서 멍하니 지켜보고만 있었다.
꼭 미친 사람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 것도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미친 사람처럼 소리치는 그 모습에 다른 기생들과 양반들이 무서워서 옆에 가지도 못했던 것이다.
“오라버니, 이거...”
옆에서 지켜보던 단이가 산호에게 뭔가를 내밀었다.
다른 기생이 벗어 놨던 치마였다.
그제야 산호가 그때까지 유경이 반쯤 벌거벗은 상태라는 것을 깨달았다.
젖가슴을 완전히 드러낸 채, 입고 있는 속바지 마저 물에 젖어 살갗에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차가운 물에 젖은 그녀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가고 있었다.
단이에게서 받아든 치마로 유경의 몸을 감싼 산호가 그대로 유경을 두 팔 안에 안아 올리려 했다.
빨리 따뜻한 곳으로 데려가서 그녀가 정신을 차릴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이런 천한 놈...!”
그때까지 멍하니 지켜보고 있던 양반들이 정신을 차린 것은 그때였다.
“어디 이런 상것이 양반들 노는 자리에 뛰어 들어와서...”
배 위에서 유경과 지분거리다가 배가 뒤집히자 유경을 버려두고 저 혼자만 뭍으로 기어 나왔던 양반이 젖은 도포 자락을 펄럭이며 산호를 막아섰다.
치졸한 자존심과 흥이 깨져버린 것에 대한 화풀이를 산호에게 할 요량처럼 보였다.
“당장 그 년 내려놓고 썩 꺼지지 못하겠느냐?!”
“꺼지긴 어딜 꺼져. 양반들 놀음 훼방한 죄로 몽둥이 찜질을 해줘야지!”
다른 양반들이 합세를 한다.
이왕 깨져버린 흥, 다른 것으로라도 만회해볼 생각들인 것이다.
“...”
앞을 가로막고 있는 양반들을 노려보던 산호가 품에 안고 있던 유경을 내려다보고 다시 양반들을 쳐다본다.
“곱게 말할 때 보내주시오.”
그렇게 말하는 산호의 눈가에 노기가 서려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