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회: 재회 -->
“하시려는 말씀이 무엇이옵니까?”
사람을 불러놓고 말이 없는 시영을 바라보며 유경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시영의 이런 모습은 좀처럼 없었다.
할 말은 늘 하는 시영이 오늘따라 유난히 뜸을 들이는 것이 못내 불안해지는 유경이었다.
“첩실로 들어가고 싶은 것이냐?”
“네?”
시영의 첫마디에 유경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게 무슨...”
“네가 날 찾아왔을 때 넌 기생이 되고 싶다고 했었다. 기생이 되고 싶어서 송도에서 여기 한성까지 날 찾아왔다고 말했었다. 그래서 난 널 기생으로 만들어주고 싶었다.”
“나으리, 왜 갑자기...”
“그런데 요즘의 널 보면 기생이 아니라 누군가의 첩실이 되기를 원하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단선비 말이다.”
시영의 입에서 수윤의 이름이 나오자 유경이 얼굴을 붉혔다.
유경의 붉어진 얼굴을 보며 시영이 혀를 찬다.
“기생이 되라고 했더니 연애를 해버렸구나.”
“하오나 그 선비님의 마음을 얻으라고 한 것은 나으리이십니다.”
유경도 할 말은 있다.
수윤의 마음을 얻으라고 그녀를 수윤의 방으로 밀었던 것은 시영이었다.
그런 시영이 지금에 와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이 유경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마음을 얻으라고 했지 네 마음을 주라 하였더냐?”
“그건...”
“네가 기생이냐? 아니면 단선비의 계집이냐? 누군가의 담 안에 핀 꽃이 되길 원한다면 뭇 사내들이 꺾을 수 있는 들꽃이라는 이름은 버려야지.”
“저는...”
“기생이면 기생답게 처신하거라. 요즘 기방에 네 소문이 어떻게 나고 있는지도 모르고 있지 말고.”
“소문...이라니요...?”
“앙큼한 소향이가 단선비의 첩실로 들어가기 위해서 그 도포자락에만 치마를 열어준다고 소문이 자자하다고 행수 기생이 내게 귀뜸을 해주었다. 그런 소문이 나면 기생으로서는 치명적이라는 걸 모르느냐? 한 사내에게 전부 주고 다른 사내들을 외면하는 기생을 어느 양반이 찾겠느냐. 나는 너를 기생으로 만들어주겠다 한 것이지 너를 좋은 양반에게 첩실로 들여보내주겠다 한 적은 없다. 지금이라도 단선비의 첩실로 들어가고 싶다면 내 집을 나가서 단선비가 마련해주는 집으로 들어가거라.”
“나으리, 저는...”
시영의 말에 유경이 반박을 하지 못한다.
요즘 수윤과 매일 밤을 보내며 수윤에게 마음이 기울었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수윤의 다정함과 그의 달콤한 품에 안기며 이렇게 그에게 녹아드는 것이 행복하다고 느꼈던 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수윤과 함께 있는 것이 좋아서 다른 양반들의 술자리에 나가지 않은 것도 사실이었다.
수윤이 그녀를 다른 자리에 나가지 못하게 한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녀 자신이 수윤이 아닌 다른 양반에게 안기기 싫어서 술자리에 나가지 않은 것이 진심이었기 때문이다.
수윤은 언제나 다정했다.
누구에게나 다정한 성품이라는 것을 알고는 있지만 그럴지라도 수윤은 다정했다.
유쾌했고 편안했다.
다시 재회한 첫 사내인 추영으로 인해 흔들리던 그녀의 마음을 포근하게 감싸주며 추영에 대한 괴로움을 잊게 해줄 만큼 편안하고 상냥했다.
그 품에서 그렇게 눈감고 행복을 느끼며 살아도 좋을 거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다.
그 마음을 시영이 알아차린 것이다.
그래서 유경이 시영의 말에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다시 묻겠다. 내 집을 나가서 단선비의 첩실이 되려느냐? 그렇다고 한다면 내가 단선비에게 다리를 놓아서 너를 데려가라 그리 말해주겠다.”
“저는...나으리...”
유경이 쉽사리 대답을 하지 못한다.
그녀의 마음이 아직 무엇을 결정하기 어려운 탓이리라.
수윤은 다정하지만 그를 믿기에는 불안하다.
그의 다정함은 어딘가 모르게 가볍고, 그의 눈웃음은 봄날 살랑거리는 바람 같아서 더 유경을 불안하게 만들었다.
바람은 손에 잡히는 법이 아니기에, 더군다나 꽃을 스쳐가기만 할 뿐, 꽃잎에 머무는 것이 바람이 아니기에 그녀가 시영의 물음에 대답할 수 없었다.
“그래서 문한이 네게 말했었지. 이왕지사 기생이 되기로 한 바에야 후회하지 말라고 말이다. 걷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이왕 기생이 되기로 한 다음에 후회하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니 지금 결정하거라. 첩이 되겠느냐 아니면 기생이 되겠느냐. 훗날 네가 후회하지 않는 길을 택하거라.”
시영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자상할 때는 한없이 자상하지만 엄할 때는 한없이 무서워지는 시영인 것이다.
차라리 거친 문한은 거친 반면에 엄한 구석은 없다.
사내들에게는 무서운 문한이지만 유경 같은 여인들에게는 차마 거칠지도, 무섭지도 못하는 성품인 것이다.
하지만 시영은 달랐다.
한번 엄해지기로 하면 바늘 하나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무서워지는 것이다.
그 무서운 시영의 눈빛에 유경이 얼굴을 들지 못했다.
유경이 눈을 감은 채로 수윤의 얼굴을 떠올렸다.
그녀를 웃기려고 일부러 반달 웃음을 짓던 그의 모습이 그녀의 감은 눈 안에 떠올랐다.
추영을 외면하고 잡은 손이다.
그녀를 안타깝게 바라보던, 그 애절하던 시선을 묻어버리고, 이제 그 사내에게 흔들리지 말자 결심하며 수윤에게 다시 안긴 그녀였다.
유경 자신이 흔들리면 추영에게도, 수윤에게도, 그리고 유경 자신에게도 독이 되리라 생각하며 추영의 눈빛은 앞으로도 독하게 외면하자 그리 생각하며 안긴 수윤의 품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시영이 말하는 것이다.
기생이 되려면 그것은 잘못이라고 시영이 말하는 것이다.
수윤에게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잘못이라고...
그래서는 안된다고 질책하고 있는 것이다.
기생이 되려면 그래서는 안된다고...
기생이 되려면...
기생이...
“후회가 없는 길을 택하거라.”
재차 이어지는 시영의 말에 유경이 질끈 감았던 눈을 떴다.
그리고 꽉 다물고 있던 입술을 열었다.
“제가...어찌하면 되는 겁니까...”
‘기생이 되기 위해 온 것이다. 한 사내의 첩이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이 사내에게 안겼다가 버림받고 슬퍼하고, 또 저 사내에게 안겼다가 버림받고 슬퍼하는 여자가 되기 위해 온 것이 아니다. 이미 한번 버림받고 슬퍼했다. 그래서 더 이상은 버려지지 않는, 버릴지언정 버려지지 않는, 떠나보낼지언정 슬퍼하지 않는 기생이 되기 위해 온 것이다.’
결심한 유경의 눈을 바라보며 시영이 다시 한번 묻는다.
“후회하지 않겠느냐?”
“네.”
“그럼 연소답청을 다녀오거라.”
“알겠습니다, 나으리.”
유경이 고개를 조아리며 대답했다.
흐릿하게 수윤의 미소가 머릿속을 스쳤지만 그녀가 애써 외면해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