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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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허, 참 신기하다.”

술잔을 기울이던 수윤이 갑자기 고개를 갸웃거리자 유경이 그를 물끄러미 바라봤다.

무슨 일인가 싶은 것이다.

유경이 달거리를 끝내고 기방에 나온 첫날이었다.

유경이 없는 동안에 매일 같이 기방에 출석 도장을 찍으며 그녀가 나오기만을 기다렸다는 이 선비가 오늘 유경이 나오자마자 그녀를 낚아채서 술상을 받는 중이었다.

요즘 수윤이 유경을 독차지 하는 바람에 다른 양반들이 성화라고 행수 기생이 눈을 흘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가뜩이나 유경을 보고 싶어 하는 양반들이 많은데 수윤이 밤이면 밤마다 그녀를 독차지 하고 있으니 조금만 사정을 봐달라는 말도 그녀가 잊지 않았다.

- 딱히 첩실로 들일 것이 아니면 그 아이 앞날도 생각해서 다른 손님 방에도 갈 수 있게 해주시어요.

행수 기생이 수윤에게 눈을 흘기며 하던 말을 유경이 문득 떠올렸다.

첩실.

기생의 마지막은 쓸쓸하게 늙어가던가 아니면 첩실이 되던가 둘 중의 하나라고 그녀도 알고 있었다.

첩실이 된다는 것은 한 지아비를 모시고 평생을 산다는 뜻이다.

유경이 수윤을 바라봤다.

이 선비는 아무리 봐도 한 여자에게 정착할 위인으로는 보이지 않았다.

지금은 유경 자신에게 공을 들이고 있지만 언제 다른 꽃으로 날아가 버릴지 알 수 없는 사내가 이 사내인 것이다.

당장 오늘 자신의 귓가에 달콤한 말을 속삭이다가도 내일이면 다른 꽃잎에 휘어 감겨 밀어를 속삭인다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사내.

이런 사내에게는 절대 마음을 주어서는 안된다는 것을 유경은 알고 있었다.

몸은 주어도 마음은 주어서는 안된다.

몸 줄 사내가 따로 있고 마음 줄 사내가 따로 있다고 시영이 말한 적이 있었다.

이 사내는 몸을 줄 사내인 것이지 마음을 줄 사내는 아니었다, 적어도 지금 유경에게는 그러했다.

‘이추영...’

유경이 문득 속으로 그 이름을 떠올렸다.

- 한번 기방으로 찾아가겠소.

그 말을 남기고 돌아서던 그는 아직까지 그녀를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그녀의 집으로든, 기방으로든 찾아올 수 있겠지만 그는 그 날 이후 그녀를 찾아오지 않고 있었다.

‘몸 줄 사내...마음 줄 사내...’

그에게는 이미 몸을 주었었다.

첫 몸을 주었었다.

그리고 짧은 시간 마음도 주었었다.

하지만 그 사내도 마음 줄 사내는 아니라고 유경이 생각했다.

마음을 줘서는 안 되는 사내라고.

그에게 마음을 주면 결국에는 상처받는 것은 그녀 자신이 될 것이라는 걸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유경은 알고 있었다.

그 사내가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이기적이지 않으면 그날 그렇게 떠나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기적이지 않았으면 그날 그렇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지도 않았을 것이며, 이기적이지 않으면 벗이 자신에게 공을 들이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기방으로 찾아오겠다 그리 말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기적이어서 떠났던 사내가 이기적이어서 이제는 자신의 곁을 맴돌겠다 그리 말하는 것이다.

그 사내 자신의 행동 하나 하나에 누가 울고 누가 아파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도 하지 않을 것이 분명한 사내.

남의 아픔에 대해 둔감한 사내.

오로지 자신만을 아는 사내.

그런 사내이건만 문득 그 사내의 이름을 떠올리는 자신이 유경은 우스워졌다.

“신기하지 않느냐?”

수윤의 목소리에 유경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저 놈의 달이 제 반쪽을 어디에 두었을까?”

수윤의 말에 유경이 열린 창으로 밤하늘에 떠있는 반달을 쳐다봤다.

그리고 다시 시선을 내리다 수윤의 시선과 마주친다.

수윤의 눈이 웃고 있었다.

“오호라~ 가만히 보니 저 놈은 엊저녁에 내게 제 반쪽을 준 그 놈이로구나.”

“네?”

이건 또 무슨 해괴망측한 이야기인가 싶어서 유경이 고개를 갸웃거리니 수윤이 씩 웃으며 그녀의 앞으로 바짝 다가 앉는다.

“어제는 아무리 기다려도 네가 오지 않길래 내가 심심도 해서 저 달이라는 놈과 큰 내기 한판을 벌렸더랬다. 그런데 내가 이겼거든? 그래서 내가 저 달이라는 놈의 절반을 받았지.”

“...”

말도 안 되는 수윤의 뻥에 유경이 눈만 깜빡 깜빡 거렸다.

달과 떼쟁이 선비의 내기라는 것도 우스운 일인데 달과 내기해서 이긴 수윤이 ‘이 놈 달아, 네 놈의 절반이 마음에 드니 얼른 그 절반을 내놓거라’라고 떼를 쓰는 모습이 눈에 그려져서 유경이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오는 입가를 손으로 살며시 가렸다.

“아니, 이 년이 건방지게 우스운데도 안 웃고 내게 무안을 줘?”

수윤의 으름장에 유경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손으로 입가를 가린채 꺄르륵 웃어버리자 그제야 수윤이 만족스러운 듯 빙그레 웃는다.

“이유야 모르겠다면 네가 그리 얼굴이 어두우니 내가 술 맛이 나야 말이지.”

수윤이 유경의 손을 살며시 잡아온다.

그 따뜻한 손에 유경이 웃음을 거두며 살며시 고개를 숙이려 하자 수윤의 손이 그녀의 눈을 가린다.

“가만 있거라. 이제 내가 어제 받아온 저 달 놈의 절반을 보여주마.”

손으로 눈을 가리더니 달의 절반을 보여준단다.

그 기이한 말에 유경이 자신의 눈을 가리고 있는 수윤의 손이 치워지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유경의 눈가에서 수윤이 손을 걷어냈다.

이제 봐도 된다는 뜻이다.

유경이 시선을 들어올리자 수윤의 조금 달아오른 듯한 뺨 아래로 씨익 웃고 있는 입이 보였다.

애써 반달을 만든 수윤의 입이 웃고 있었다.

그래서 그만 웃고 말았다.

유경이 그만 웃고 말았다.

추영으로 인해 무거웠던 마음이 어디론가로 사라지며 그녀가 그만 웃고 말았다.

그녀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수윤이 애써 반달을 만들며 웃던 입으로 크게 웃는다.

“네 년 웃기자고 내가 양반 체통이고 뭐다 다 개 줘버렸으니 이제 이렇게 웃고만 있어야 한다. 알겠느냐?”

그 다정한 목소리가, 그 반달을 닮은 입이 그녀의 입가에 와 닿았다.

따뜻한 숨결과 함께 입술에 와 닿는 그 입술에 유경이 가만히 눈을 감았다.

눈으로 들어와 심장에서 싹을 틔운 알 수 없는 향이 그녀의 가슴에서 진동하고 있었다.

몸 만 줄 사내인데, 마음을 줘서는 안 되는 사내인데...

그 사내의 향이 그녀의 심장에 싹을 틔우고 어느새 향을 진동하고 있었다.

이것이 무슨 향인지 그녀는 알수 없었다.

추영을 향한 서러운 그리움과는 또 다른 이 향이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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