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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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런 일을 하는 지 연유를 물어봐도 되겠어요?”

단이의 상처에 약을 바르며 유경이 조용히 물었다.

여자의 몸으로 왜 이런 일을 하고 다니는 건지 묻는 것이다.

포교들의 말에 의하면 사람을 죽였다고 했기 때문이다.

“윽...”

약이 상처에 스며들자 아픈지 단이가 얼굴을 찡그렸다.

“말하지 않아도 상관은 없어요. 누구에게나 비밀이 하나씩 있는 법이니...”

“그 남자와는 어떤 관계인지 물어봐도 되요?”

대답 대신 맞질문을 한 것은 단이였다.

“네?”

뜬금없는 단이의 질문에 이번에는 유경이 당황했다.

다락에서 다 듣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

추영과 그녀가 나누던 대화를 단이가 다 들었을 거라는 생각에 유경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남자, 한성 판윤댁 적자잖아요. 양반 중의 양반인데...둘이 어떤 사이예요?”

“한성 판윤댁...”

단이의 말에 유경이 두 번째로 놀랬다.

그가 처음 큰 돈을 주고 그녀의 머리를 올려줄 때부터 대단한 양반댁일 거라는 건 짐작했었지만 한성 판윤 대감 댁 적자라는 사실은 생각조차 하지 못한 것이다.

한성 판윤이라 하면 삼정승 다음으로 위세가 대단한 벼슬이라는 것은 유경도 알고 있었다.

“몰랐어요? 둘이 심각한 사이 같은데 정말 몰랐어요?”

“심각한 사이 아니예요. 그저 얼굴만 조금 아는 사이일 뿐...”

“그 사람이 그쪽 머리를 올려준 거예요? 듣다보니 그런 것 같은데...”

뭔가 유경과 추영에 대해 궁금함이 많아 보이는 단이다.

아픈 것도 잊고 꼬치 꼬치 캐묻는 단이의 상처에 약을 다 바른 유경이 다시 깨끗한 헝겊으로 그녀의 상처를 싸맸다.

조금 전에는 경황이 없어서 개짐으로 상처를 쌌지만 문갑을 뒤져 깨끗한 헝겊을 찾아낸 것이다.

“울었잖아요. 그 사람 보내고 나서.”

“...”

단이의 말에 유경의 얼굴이 붉어진다.

괜한 오기를 부리면서 뒤에서 울고 있던 것을 들킨 것이다.

“그 사람 좋아하죠?”

“조, 좋아하기는요. 딱 한번 스친 인연인데...”

“진짜 인연은 옷자락만 스쳐도 된다잖아요. 진짜 인연이라면...”

그 말을 하며 단이가 살며시 눈을 감았다.

문한의 집에 얹혀 사는 이 여자가 기생이라는 건 단이도 알고 있었다.

몇 번 본적은 없지만 문한이 가끔 말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는 것이다.

기생.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그래도 그가 좋아하는 여자다.

좋아한다.

목소리만 들어도 알 수 있었다.

그 남자가 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걸 목소리를 듣는 순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돌아선 것이리라.

자신이 여기에 숨어있다는 걸 알면서도 이 여자 때문에 돌아선 것이리라.

단이가 아는 그 남자는 우직한 남자다.

사사로운 정에 흔들려서 공무를 그르치는 남자가 아니다.

그런데 지금, 사사로운 정에 흔들린 것이다.

흔들릴 정도로 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다.

말 한마디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정도로 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이다.

“좋아하면...울리지 말아요...”

눈을 감은 채로 단이가 중얼거렸다.

감은 그녀의 눈 안에 누군가의 모습이 떠올랐다.

산호.

그녀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든 그 남자.

하지만 언젠가 두고 가야 하는 그 남자.

자신이 가야하는 길의 끝을 알기에 좋아하지만 바라만 봐야 하는 그 남자.

하지만 자신은 그럴 지라도 추영은 그러지 않기를 단이가 바래본다.

추영은 자신과는 다른 길을 가기를 그녀가 바래본다.

아무것도 모르는 추영은 끝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그렇게 살아가기를 단이가 바랄 뿐이다.

자신들의 아비가 누구고, 왜 죽어야 했으며, 왜 자신들이 서로의 존재를 모른 채 자라나야 했으며, 왜 자신이 사람을 죽이고 다녀야 하는지 추영은 끝까지 모르기를 바랄 뿐이다.

알아서는 안되는 것이다.

알면, 끝나는 것이다.

알면,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이 무너지는 것이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자기 한사람으로 족하다고 생각하며 단이가 눈을 뜨고 유경을 바라봤다.

이 여자는 좋은 여자일 것이다.

한밤중에 피를 흘리며 숨어든 자신을 이유 없이 숨겨주고 지켜주는 이 여자는 분명 착한 심성을 가진 좋은 여자일 것이다.

이런 여자가 추영의 곁에 있으면 추영은 반드시 행복해질 것이다.

자신이 몫까지 행복해질 것이다.

“울리면...나중에 후회해요...”

단이가 한가지 결심을 하는 중이다.

아무래도 앞으로는 이 집에 자주 놀러와야겠다고 말이다.

밀고 당기는 사랑 놀음을 하는 것 같은 이 두 사람에게는 등을 밀어주는 누군가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다.

제 마음도 제대로 말하지 못하는 이 두 사람을 위해 자신의 한 몸 던지겠다고 조금은 재미있는 상상을 해보며 단이가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름이 뭐예요?”

그러고 보니 이름도 모른다.

이름도 모르면서 이런 저런 참견을 다 한 것 같아서 단이가 그만 웃고 말았다.

“윽!”

웃음을 터트리자마자 옆구리의 상처가 쑤셔서 금세 그치고 말았지만 말이다.

“단이?”

시영이 조금 곤란하다는 눈으로 유경을 쳐다봤다.

새벽녘에 돌아와보니 단이는 헝겊에 피가 배어나올 정도의 상처를 입고 깊이 잠들어 있고 유경은 그런 단이의 곁을 지키고 있어서 잠시 당황했던 시영과 문한이었다.

대충 넘기려고 그만 가서 자라고 유경을 그녀의 방으로 떠밀었더니 잠시 후에 얌전히 문을 열고 들어와 시영의 앞에 앉은 유경이다.

그리고 시영에게 묻는 것이다.

단이가 홍앵이냐고.

요즘 소문이 시끄러운 그 살인자가 단이가 맞냐고 물어오는 것이다.

유경이 문한이 아닌 시영에게 묻는 것은 문한이라면 ‘쓸데 없는 걸 묻는다’라고 화를 내며 나가버릴 것이 분명해서였다.

그러나 시영은 다르다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시영이라면 곤란해도 피하지 않고 그녀에게 진실을 말해줄 것을 그녀가 알고 있는 것이다.

“왜 그런 일을 하고 다니는 지 알아도 되겠습니까?”

“이것 참...”

시영이 곤란한 듯 헛기침을 두어번 한다.

곤란하다는 것은 이유를 알고 있다는 뜻이다.

“저도 알 자격이 있지 않습니까? 그 이를 숨겨줬을 때는 저도 위험을 감수했습니다. 제 목숨까지 위태로운 것을 감수하고 그 이를 숨겨주었으니 그 이유 정도야 들어도 되지 않을까요?”

“너무 깊이는 말할 수 없고...”

유경의 말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해서 시영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너무 자세히는 말고, 조금만 알려주려는 것이다.

“오래 전에 어떤 이가 있었다. 착한 사내였지. 얼마나 착했던지 세파 정치 욕심 모르는 그저 착한 사내여서...욕심이라도 있었으면 그리 죽지 않았을 터인데 욕심이 없어서 그리 죽었지. 네 편도 내 편도 되지 않을 것 같으니 그리 죽여 버렸지. 그냥 두기에는 세자 저하의 총애가 퍽이나 가득하여 그리 내버려둘 수 없어서 죽게 하였지. 싹이 자라기 전에 죽여 없애자 그리 공모하여 그를 죽였지. 그래서 그 착한 사내가 역모죄를 뒤집어쓰고 사지가 찢겨 죽었지. 그런데 그 착한 사내에게 만삭의 아내가 있었다. 그 만삭의 아내가 낭군이 죽을 때 그 무서운 칼날을 피해 어디론가로 사라졌지. 그 만삭의 아내가 낳은 아이가 바로 단이다. 그래서 지금 그 아이가 제 아비의 원한을 갚고 있는 것이다. 그 정도 말해주면 되려느냐?”

“...”

시영의 말에 유경이 대답을 못한다.

그녀가 생각하던 것 이상으로 너무나 무거운 말이었기 때문이다.

한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무서운 세계의 말이었기 때문이다.

눈가에 두려움이 어른거리는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며 시영이 그녀에게는 하지 못하는 말을 조용히 속으로 삼킨다.

‘그런데 여인이 하나 더 있었지. 그 착한 사내가 애지중지 여기던 여인이 하나 더 있었지. 기생살이 하던 것을 기적에서 빼내어 초가 한칸 마련해주고 그리 귀히 여기던 첩실이 하나 있었지. 그 여인도 만삭이었지. 본처와 첩실이 산달이 비슷하였다지. 그 착한 사내가 그리 죽자 그 남은 첩실은 아무도 모르게 그 벗이 거두었다고 들었지. 그 착한 사내에게 벗이 하나 있었지. 형제처럼 막역한 벗이...그 벗이 바로 지금 한성부 판윤 대감 젊었을 적이었지. 그 사내, 지켜주지 못한 벗 대신 그 남겨진 피붙이를 아무도 모르게 거두었지. 지켜주지 못한 벗 대신에 그 피붙이라도 지켜주겠다고 맹세했다고 하지. 그것이 그 사내인데...모르면야 살 수 있지만 알면서는 그럴 수 없어서 단이가 저리 칼을 들었지. 하지만 모르면 살 수 있으니 추영이 그 사내는 몰라야지. 끝까지 몰라야지. 하나는...살아야지...하나라도...살아야지...’

시영의 내뱉는 숨 끝에 무거운 한숨이 내려앉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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