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회: 재회 -->
모를 것이다.
사내들은 모를 것이다.
첫날 밤의 여인네들이 얼마나 두렵고 얼마나 떨리는 지 사내들은 모를 것이다.
모를 것이니 그리 무심할 수 있는 것이다.
모를 것이니 그리 무심하게 매정할 수 있는 것이다.
- 애쓰지 말거라.
그 말이 얼마나 잔인하게 들리는 지 모를 것이니 그리 말할 수 있는 것이다.
- 옷고름은 풀어줬으니 그만이지 않느냐.
알고는 그리 말할 수 없을 것이다.
알고는...
- 더 머물러서 무엇 하겠느냐. 다시 볼 일이 서로에게 없을 듯 하니 얼굴 한번 더 봐서 괜한 미련이나 남길 생각이 아니라면 이쯤에서 일어나야지.
알고는 그리 말하지 못할 것이다.
불쌍해서라도 알고는 그리 말하지 못할 것이다.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는 무심한 사내의 등을 바라보는 여인의 마음을 안다면, 정말 안다면 그런 잔인한 말을 하지 못할 것이다.
알고 있다면...
하염없이 사내가 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울어버릴 줄을 알았더라면, 그렇게 여린 것이 여인의 마음이라는 것을 행여나 알고 있다면 그리 떠나지는 못할 것이다.
그 차가운 이불을 붙잡고 멈추지 않는 눈물을 흘려야 하는 것이 여인이라는 것을 안다면 그리는 못할 것이다.
아무리 마음이 차갑다 하더라도 그리는 못할 것이다.
알고 있다면 못할 것이다.
“그 때...”
유경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추영도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추영 자신의 입술도 떨리기 때문에 유경의 떨림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제 손으로 조반이라도 지어 드리고 싶었는데...”
유경의 시선이 더 이상 추영에게 가 있지 않았다.
그녀의 목소리는 떨리고 있었고, 그녀의 눈동자는 보다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추영 역시 그녀를 보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발밑을 응시하는 그의 귀에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이어진다.
“그리 가시고 나서 제 마음이 어떠했는지 한번이라도 생각해보셨다면 이리 제 앞에 나타나셔서 그리 당당하게 존함을 밝히실 수는 없으셨을 겁니다.”
처음의 떨림은 슬픔이 되고, 슬픔은 원망이 되고, 원망은 미움이 되고, 또 미움은 그리움이 되고...
해가 바뀌고 계절이 바뀌고...
“제가 나으리께 제 서방이 되어달라 부탁하였습니까?”
혹시나 하고 기다리던 마음은 서글픔이 되고...
“제가 나으리께 저를 책임지고 살아달라 하였습니까?”
서글픔은 서러움이 되고...
“제가 행여나 나으리를 붙잡을까 염려가 되어, 저 같이 천한 기생이 나으리 앞길에 방해가 될까 그리 무정하게 뒤 한번 돌아보시지 않고 떠나신 것입니까?”
서러움은...
서러움은...
“그리 무정하게 얼굴 한번 보여주시지 않으시고...그리 무정하게...”
옷자락을 꾸욱 잡은 채로 유경이 돌아섰다.
“그분의 벗이라 하셨습니까? 그렇다면 차라리 끝까지 제게 감추셨어야지요. 나으리를 뵐 때마다 그 무정한 뒷모습이 떠올라 괴로울 저를 생각하셨다면 끝까지 저를 모른척 하셨어야지요. 여전히 이기적이시네요. 여전히 이기적이라서 제 생각은 조금도 해주시지 않으시네요. 그때처럼, 그때 제 생각을 조금도 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리해서 그리 무정하셨던 것처럼 지금도 여전히 제 생각은 조금도 하지 않으시네요. 조금도 변함이 없이...”
방 안으로 들어선 유경이 문을 닫았다.
방문을 닫고 문고리를 손에 잡은 채로 유경이 어깨를 부들 부들 떨었다.
그녀의 어깨가 떨리는 것은 그녀의 눈가에서 눈물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차마 추영에게 눈물을 보일 수 없어서 이제야 겨우 참았던 눈물을 흘리는 그녀였다.
서러움이 또 다시 그리움이 되어 마침내 그 실체를 마주하는 순간에 마음의 응어리가 한꺼번에 터져 나와 뜨거운 눈물이 되어 흐르고 있었다.
그녀도 모르고 있었던 응어리가 이제야 겨우 녹아내리고 있었다.
괜찮다고, 아무것도 아니라고, 다 이해한다고 스스로 생각하고 있던 그녀 자신도 몰랐던 응어리가 서러움의 실체를 마주하는 순간 드러나 마침내 녹아내리고 있었다.
응어리가 녹아내리며 뜨거운 눈물이 그녀의 뺨을 적시고 흘러 내렸다.
말은 그리 모질게 했지만 유경은 사실 이제는 추영을 원망하지는 않았다.
서러웠지만 더 이상은 원망이 아니었다.
오히려 그리움이지 원망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리 모질게 말하고 돌아서 버린 것은 마음을 잘라내기 위해서였다.
그는 단수윤의 벗이라 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머리를 올려준 사내다.
그가 흔들리지 않을지라도 그녀가 흔들릴 것 같았다.
그가 흔들려서도, 그녀가 흔들려서도 안된다고 그녀가 생각했다.
누구도 흔들리면 안되는 것이다.
그녀가 흔들리면 단수윤과 그의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다.
그가 흔들리면 그 역시 그와 단수윤의 사이는 갈라질 것이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그녀가 생각했다.
그래서는 안된다고...
그래서 더 이상 원망하지는 않지만 원망하기로 한 것이다.
이제는 녹아버린 응어리를 털어버리는 대신 마음을 잘라내기로 한 것이다.
아련한 그리움도 잘라내 버리고, 간혹 떠올리던 두근거림도 잘라내 버리기로 한 것이다.
그와 그를 위해서.
그와 그를 위해서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전부였다.
추영은 그녀에게 이기적이었지만, 그녀는 그에게 이기적이 되지 않기로 했다.
그는 그녀에게 이기적일 수 있었지만 그녀는 그에게 이기적일 수가 없어서일 것이다.
사내는 모질지라도 여인은 사내에게 모질 수가 없는 것은 천상 꽃이기 때문이리라.
천상...꽃이기 때문이리라.
날아드는 나비와 꽃에 무한정 꽃잎을 열어 자신을 허락하는 꽃이기 때문이리라.
*
“기방으로...한번 찾아가겠소...”
그 말을 남기고 추영이 천천히 돌아섰다.
그녀의 말에 한마디도 대답할 수 없어서 추영이 천천히 돌아섰다.
무정하다는 그녀의 말에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어서였다.
왜 그리 무정했냐는 그녀의 말에 정말 무정했던 자신인지라 그 어떤 대답도 할 수 없어서...
천천히 사립문을 걸어나가는 추영의 뒤로 그림자가 길게 이어졌다.
몸을 사립문을 나가지만 마음은 뒤에 남아 차마 그곳을 떠나지 못하는 것처럼 그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사람은 가도 마음은 남은 것처럼, 미련은 남은 것처럼 그렇게 그림자가 쓸쓸하게 달빛 아래 드리워져 있었다.
*
“...”
다락문 틈으로 밖을 엿보던 단이가 힘없는 몸을 벽에 기댔다.
피를 너무 흘려서 더 이상 앉아 있을 기운도 거의 없는 그녀였다.
다락 너머에서 두런 두런 들리는 말소리에 틈으로 엿보니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다름아닌 이추영이었기 때문에 그녀가 안간힘을 쓰며 밖의 상황을 엿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추영...’
단이가 속으로 그 이름을 중얼거려 본다.
‘이추영...’
그는 그녀를 모를 것이다.
모르기 때문에 그녀의 옆구리를 벨 수 있었을 것이다.
알면 그러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알아서 그를 베지 못했다.
벨 수 있었음에도 그를 벨 수 없었다.
아니까.
그녀는 그를 아니까.
그가 누구인지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