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회: 재회 -->
“나으리!”
다급하게 불러 세우는 유경의 목소리에 추영이 돌아섰다.
달빛이 하얀 소복을 입은 그녀의 위로 부서지고 있었다.
달빛에 부서져 그녀의 창백하게 굳은 얼굴이 더 선명하게 추영의 눈에 들어왔다.
“제가 송도 출신이라고 단선비님께 들으셨다구요?”
유경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런데...”
대답하는 추영의 목소리 역시 미세하게 떨리기는 마찬가지였다.
혹시나 해서 던져본 말이었다.
그녀가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것으로 되었다 생각하고 던져본 말이었다.
“어찌 그런 거짓말을 하십니까?”“거짓말?”
“저는 그분께 제가 송도 출신이라고 말씀드린 적이 없습니다. 다만 시골에서 올라왔다고 했을 뿐...”
출신은 함구에 붙이기로 시영과 이미 약속을 했었다.
유경을 기방에 들여보내준 행수 기생과 시영, 그리고 유경만이 그녀의 출신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다.
출신을 송도로 알려서 괜히 섣부른 한양 기생들의 텃세와 눈치를 받을 이유도 없었고 그저 시골 출신이라고 대충 둘러대도 그만이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송도에서의 그녀의 행적이 어떠했건 간에 과거를 끌고 가는 것은 득이 아니라 실이라는 것이 시영의 판단이었다.
그래서 누구에게도, 수윤에게도 자신이 송도 기생이었다는 것은 말한 적이 없는 유경이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사내는 수윤에게 들었다며 송도라는 지명을 꺼낸 것이다.
수윤에게 말한 적도 없는 그녀의 출신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한성에 살고 있는 사내 중에서 유경을 알고 있는 사내는 없었다.
시영과 문한을 제외하고는 그녀의 과거를 아는 사내가 없다.
그렇다면 이 사내는 어떻게 그걸 알고 있는 것일까.
수윤의 벗이라는 이 사내는, 그래서 그녀를 알고 있다는 이 사내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일까.
“혹시 송도에서...”
유경의 목소리에 아련한 떨림이 묻어나온다.
잊고 있던 기억이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두 번 다시 꺼내지 않으리라 생각하며 깊이 깊이 묻어두었던 기억이 봄볕에 얼음이 녹듯이 형체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 사내.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떠났던 그 사내.
그리고 그 해 겨울, 그녀의 집에 땔감과 쌀섬을 들여놓아 주었던 알 수 없는 인물.
그 사내일 것이라 짐작했었다.
그녀에게 그런 온정을 베풀어주는 것은 그 사내 외에는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사내가 아닐 것이라 생각했다.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떠났던 그 무심한 사내가 다시 돌아봐줄리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생각하며 송도를 떠날 때 가슴 깊이 묻어두었던 이름을 유경이 기억해냈다.
떠올리면 가슴이 지끈거리는 이름이었다.
현신 교위 이추영.
그녀의 첫 남자.
그녀는 아직도 그와 나누어 끼려 했던 옥가락지를 가지고 있었다.
소중한 것이라 차마 술자리에 끼고 나갈 수 없어서 문갑 안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
“혹시 송도에서 저를 보신 적이...”
혹시, 모른다고 그녀가 생각했다.
어쩌면...이라고 그녀가 생각했다.
괜한 넘겨짚음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쩌면...이라고 그녀가 생각했다.
‘저런 목소리였던가...저런 체격이었던가...’
생각을 그렇게 해서 그런가, 다시 들어보니 목소리가 귀에 익고, 다시 보니 얼굴이 눈에 익고, 다시 보니 체격이 눈에 익는다고 유경이 생각했다.
우스웠다.
조금 전까지는 생각지도 않고 있던 것들을 지금은 모든 것이 다 눈에 익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우습기 그지없었다.
“송도에서...”
추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녀가 알아차려 주기를 바라고 송도라는 말을 꺼낸 것이지만 막상 그녀가 알아차리자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알 수 없는 것이다.
“내가 그대 도움을 받았는데...기억하지는 모르겠소...”
“네?”
추영의 긴장한 얼굴에 쓴 웃음이 떠올랐다.
‘기억도 하지 못할 텐데...’
“내가 작년에 송도에 간 일이 있었는데 그때 밤이 깊고 산길이 낯설어서 말에서 떨어져...”
“아!”
그제야 유경이 짧게 소리쳤다.
기억이 난 것이다.
그때 산호를 만나러 가던 밤길에서 상처를 입고 신음하던 양반 사내.
얼굴은 기억나지 않지만 말에서 떨어져 다쳤다던 그 사내.
“기억하겠소?”
그녀가 속치마를 찢어서 상처를 싸매주었던 그 사내였다.
추영이 그 사내라는 것을 안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이 유경의 안에서 교차되었다.
알 수 없는 허탈감과 실망감.
기대했던 것이 무너진 것에 대한 씁쓸함.
머리를 올려준 그 양반인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그녀가 도와주었던 그 사내였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를 알아본 것이다.
그녀가 송도에서 왔다는 것을 알아본 것이다.
그 사내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 새끼 기생이라는 말만 남기고 가버리는 바람에 내가 마땅히 빚을 갚지도 못했소.”
“그 때 그 분...”
추영이 고민했다.
여기에서 멈추어야 하나, 아니면 진실을 밝혀야 하나 그가 고민했다.
여기에서 멈춰야 한다는 마음이 절반, 모든 것을 말하고 싶다는 마음이 절반.
문득 수윤의 얼굴이 떠오르는 추영이었다.
유경을 예쁘다고 말하던 수윤의 얼굴이 떠오르고 있었다.
‘기생을 워낙에 좋아했으니까...또 마음이 변할 수도 있는 것을...’
수윤이 기생들에게 그렇게 잘해주다가도 금방 싫증을 내는 것을 추영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애써 그런 쪽으로 생각해본다.
이 유경이라는 여인도 수윤에게는 그 정도일지 모른다고.
그러니까 애써 마음 써주지 않아도 되는 건지 모른다고.
하지만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켠이 무거운 것은 유경에 대해 말할 때면 더없이 행복한 미소를 짓던 수윤의 얼굴 때문이었다.
적어도 추영이 보기에는 진심이었다.
그런 수윤의 얼굴은 지금까지 추영은 한번도 본 적이 없었다.
진심이었다.
그 바람 같은 사내가 이 여인에게는 진심이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추영은 알 수 있었다.
그가 진짜 그녀를 좋아한다는 것을.
벗이었다.
단 한 명의 벗이었다.
목숨도 나누어줄 수 있다고 생각해온 벗이었다.
세상에 단 한 명. 심장을 나누어 줘야 한다면 기꺼이 줄 수 있다고 생각해온 벗이었다.
그런데...
심장은 나누어 줄 수 있는데...
대신 죽어줄 수는 있는데...
눈앞의 여인을 빼앗기는 것은 싫으니 이게 무슨 마음인지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추영의 마음이 무겁다.
“그런데 존함이...”
유경이 어느새 다락에 숨겨둔 단이의 존재도 잊고 있었다.
추영 역시 그가 쫓고 있던 홍앵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한성부 판관으로 있는...”
‘한성부 판관...아니구나..역시...’
유경이 알기로는 그 사내는 현신교위였다.
한성부 판관이 아니었다.
“이추영이라고 하오.”
그것이 추영의 최대한의 용기였다.
살아오며 지금까지 내었던 수많은 용기보다 몇 배나 더 한 용기였다.
그녀에게 이름을 밝히는 것이.
벗의 마음을 배신하는 것이.
벗의 마음을 배신하고 그녀에게 자신의 이름을 밝히기까지 그에게 그런 용기가 필요했다.
“이...추...영...”
그 이름을 읇조리는 유경의 목소리가 어둠 속에 흩어진다.
그녀의 눈동자에 새하얀 달빛이 부서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