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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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조 판서 대감 댁에 나타나겠다고 예고를 해온 홍앵이었다.

언제인지 날짜는 정확히 고시하지 않았지만 주변에 포졸들을 배치하고 기다리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정말 어려운 것은 지금까지 항상 그런 식으로 예고된 곳에 포졸들을 배치했지만 빈번하게 놓쳐버렸다는 것이었다.

이미 도주로를 확보하고 달아나는 홍앵을 잡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은 추영도 단단히 준비를 한 상태였다.

혹시나 싶어서 도주로라고 생각되는 부분들을 모두 짚어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내 미심쩍었던 부분까지 확실하게 한 것이다.

홍앵과 문한과의 미심쩍은 관계, 그리고 문한을 찾아왔던 그 계집의 익숙한 목소리.

그리하여 문한의 집으로 이어지는, 이곳 한강 나루로 이어지는 길목을 지킨 것이 유효했던 것이다.

달아나려는 홍앵과 한번 맞붙어서 칼을 들이댄 것이다.

지난번에는 어이없이 빈틈을 내주고 말았지만 이번에 단단히 각오한 추영은 지난번처럼 호락호락하게 당하지 않았다.

오히려 홍앵의 옆구리를 베는 것에 성공한 것이다.

하지만 재빠른 발 탓에 피를 흘리며 어둠 속으로 달아나는 것을 미처 쫓지 못한 것은 추영의 불찰이었다.

깊은 상처를 입어서 쉽게 움직이지 못할 것이라 방심한 것이 잘못이었다.

하지만 달아나는 방향으로 봐서 홍앵이 갈 곳이 이곳 문한의 집이라는 사실을 쉽게 짐작할 수 있었다.

마음으로 바라기는 문한과 홍앵이 아무런 관계가 없기를 바랬지만 문한의 집이 가까워져 오며 불안은 점점 확신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두 가지 마음이 추영의 안에서 복잡하게 뒤엉켜 있었다.

드디어 홍앵을 잡을 수 있게 되었다는 마음과 문한이 이 일과 관련되어 있을지 모른다는 불안감.

그 두 가지 마음을 가지고 사립문 안으로 들어서던 추영이 뜻밖의 얼굴에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대는...”

너무나 뜻밖이어서, 이런 곳에서 만날 수 있을 것이라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얼굴이어서 추영이 그 자리에 굳은 듯이 멈춰 섰다.

“판관 나으리. 여기는 없는 것 같습니다.”

당황하고 있던 포교가 추영이 들어서자 얼른 추영의 옆으로 가서 고한다.

그로서는 빨리 당황스런 자리를 벗어나고 싶은 것이다.

“안에 핏자국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이 그 놈의 핏자국이 아니라 저 여인의 달거리 핏물이었습니다.”

“달거리 핏물?”

“네.”

스스로 대답하면서도 그 단어가 너무나 민망해서 포교의 얼굴이 당황스러움으로 굳어진다.

포교 노릇 몇 년째에 이렇게 당황한 적이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근처 다른 인가를 수색하거라.”

추영이 포교들에게 명을 내리자 빨리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던 포교들이 얼른 사립문 밖으로 우르르 몰려 나간다.

그리고 혼자 남은 추영이 유경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손에 묻은 핏자국을 추영도 알아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달거리 핏물이라는 말은 믿지 않았다.

이곳에 분명히 홍앵이 숨어든 것이 틀림없었다.

그러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유경이 그를 감추어주고 있는 것이다.

유경이 홍앵을 감추어주고 있다는 사실보다 추영을 더 놀라게 한 것은 시영과 문한이 사는 이 집에 유경이 함께 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대제학 어르신댁 우시영 나으리가 데리고 있다는 기생이 그대였소?”

그제야 추영이 지난번 기방에서 시영을 마주쳤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그는 기생을 기방에 두고 오는 길이었었다.

그리고 그 기방에서 추영이 그 다음날 수윤과 함께 있는 유경을 본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앞뒤가 딱 맞아 떨어졌다.

어찌된 이유인지는 몰라도 한양으로 온 유경이 우시영과 함께 있으며 그의 도움으로 한양 기방에 출입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수윤을 만난 것이리라.

시영 정도면 유경처럼 어리숙한 기생이라도 충분히 보기 좋게 만들 수 있으니 송도에 있을 때의 그녀의 모습과 확연히 변한 것 역시 이제야 이해가 가는 것이다.

우시영, 차문한, 단수윤, 그리고 유경이라는 이 여인과 홍앵.

이 복잡하게 맞물려 있는 관계도에 머리가 어질거리다가도 다시 만나게 된 눈앞의 유경이 눈동자 안에 담겨서 추영이 다음 말을 잇지 못했다.

“저를...아십니까?”

유경은 추영을 본적이 없었다.

적어도 유경의 기억 속에 이 남자의 얼굴은 없었다.

그 사실은 추영도 알고 있었다.

애써 얼굴을 보여 달라던 그녀에게 매정하게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은 것은 다름아닌 자신이었다.

다시 볼 일이 없을 거라고, 한번으로 끝날 인연이라고 매몰차게 돌아섰던 것은 자신이었다.

뒤에서 들려오는 흐느낌에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온 것은 그 누구도 아닌 자신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원망하는 것 역시 자신이었다.

그때 왜 그랬던 것일까 하고 자신을 원망해보는 것이다.

자신을 아느냐고 묻는 유경 앞에서, 자기를 몰라보는 유경 앞에서 그 누구를 향한 원망이 아닌 자기 자신을 향한 원망이 드는 것이다.

왜 얼굴도 보여주지 않았던 것일까 하고.

이 한마디에 이렇게 마음이 무너져 내릴 줄 알았더라면 얼굴 한번 보여주는 것인데 하면서.

- 저를 아십니까...

‘알다마다. 내가 네 머리를 올려주었는데...알다마다...네가 네 그 고운 옷깃을 열어주었는데...알다마다...’

하지만 속으로 백 마디 되뇌이는 목소리가 입 밖으로는 한마디도 나오지 않는다.

아무리 속으로 ‘알다 마다’를 되뇌어도 정작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나는 수윤이 벗이오.”

고작 해야 그 한마디가 추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한성 사는 현신교위 이추영이라고 밝히면 기억하려나...’

추영의 안에서 갈등이 일어났다.

어쩌면 이름을 밝혀도 그녀는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을 것이다.

벌써 일년도 더 지났다.

일년 전에 고작 하룻밤 정을 나누어 가진 사내의 이름을, 그것도 얼굴 한번 보여주지 않고 떠난 모진 사내의 이름을 그녀가 기억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름을 꺼냈다가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면 그것보다 더 가슴아픈 일은 없을 거라는 생각에 추영이 결국 에둘러 말을 꺼냈다.

“일전에 기방에서 수윤이와 그대가 함께 있는 것을 보았소.”

“아...그때...”

그제야 유경이 그때 수윤과 함께 돌아가던 붉은 도포를 기억해냈다.

그날 아침 수윤을 데리러 온 그 붉은 도포의 사내가 한성부 벼슬아치였던 것이다.

“이 근처에 홍앵이라는 살인자가 숨어든 것 같아서 수색하는 중이었소. 괜한 소란으로 밤잠을 설치게 한 것이라면 사과하겠소.”

“아닙니다. 그럴 리가요...”

유경이 피 묻은 손을 뒤로 감추며 살며시 고개를 숙였다.

위기를 벗어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달거리 핑계를 대었지만 생각해보니 창피한 노릇이었다.

눈앞의 사내가 수윤의 벗이라는 사실에 더 창피해진 유경이었다.

“수윤이 말하기를 그대가 송도 출신이라고 했는데....”

“네에. 그러하옵니다.”

유경의 생각은 지금 온통 다락에 숨겨 놓은 단이에게 가 있었다.

지금이라도 단이를 숨겨준 것이 들키면 어쩌나 싶어서 빨리 추영이 돌아가 주기만을 기다리는데 이 사내가 계속 그 자리에 서서 갈 줄을 모르는 것이다.

사람의 애타는 속도 모르고 계속 말을 꺼내는 추영이 살며시 얄미워져서 유경이 대충 대답을 해버린다.

“이 댁 어르신들과는 어찌된 인연인지 물어봐도 되겠소? 나 역시 이 댁 어르신들과는 안면이 있는 사이라서...”

“은인들이옵니다.”

‘초면에 뭘 이리 많이 묻지? 빨리 가주면 좋으련만...’

“어르신들은 어디를 가셨소?”

“네. 오늘밤에는 출타를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오늘 밤중이나 내일이나 되어야 돌아오신다고...”

‘여자 혼자 있는 집이니 빨리 돌아가주면 좋은데...눈치도 없나...’

애꿎은 유경의 속만 탄다.

입술이 바짝 바짝 말라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유경의 분위기를 알아차린 추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뒤로 물러난다.

‘이제 가려나 보다...’

유경의 눈에 그제야 안도의 빛이 떠올랐다.

“그러면 나중에 다시 볼 일이 있으면 그때 내가 오늘의 일을 사과하는 뜻에서 술 한잔 대접하리다.”

인연의 줄을 이렇게라도 잇고 싶은 추영이었다.

자기 입으로 밝힐 수는 없지만, 이렇게라도 인연의 끈을 붙잡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쓸데없는 송도 이야기도 꺼내 본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용기를 내어 꺼내본 마음을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씁쓸하게 돌아선 추영이 몇 발자국 걷기도 전에 그의 뒤에서 유경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으리!”놀란 목소리가 그의 발을 잡아 세웠다.

그의 가슴이 뜨끔거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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