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회: 야앵 -->
“어?”
문밖에서 목소리가 들린다 싶더니 문이 슬그머니 열린다.
“오늘은 어쩐 일로 기방에 나가지 않았네?”
문한이었다.
방안에서 분첩을 정리하던 유경이 문한이 방안으로 얼굴을 들이밀자 자리에서 일어난다.
“들어오세요, 어르신.”
유경으로서도 오랜만에 얼굴을 보는 문한이었다.
문한은 아침 일찍이면 강나루로 나갔다가 저녁이 되어야 집으로 돌아왔고, 유경은 저녁이 되기 전에 집을 나섰다가 새벽녘에 집으로 돌아와 아침 늦게까지 잠들어 있으니 두 사람이 얼굴을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수윤이 하루가 멀다하고 그녀를 밤새도록 잡아두는 바람에 더더군다나 문한과는 오래도록 얼굴을 보지 못한 것이다.
유경에게 문한은 특별한 사내였다.
차문한과 우시영, 이 두 사내가 그녀에게는 특별했다.
그녀에게 특별한 사내가 있다고 하면 모두 세 명이었다.
그 중 한 명은 이름만 알고 있는 한성 사는 교위 나으리인 이추영, 그리고 이 두 사내인 것이다.
시영은 그녀의 안에 숨겨진 꽃봉오리를 발견해주었고 문한은 그런 그녀의 꽃을 피워준 사내인 것이다.
문한을 통해서 육체의 기쁨을 알아버린 유경이었다.
그렇게나 두려웠던 사내의 몸이 여인에게 얼마만큼의 기쁨을 안겨줄 수 있는지 문한을 통해서 넘치도록 알게 된 것이다.
그와 몸을 섞던 석달 동안 그에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일 것이다.
몸이 가면 마음도 간다는 옛말처럼, 자신의 몸을 밤낮으로 취하는 사내에게 마음이 가지 않았다면 거짓일 것이다.
하지만 몸은 주되 마음은 주지 않는 이 사내를 보며 그 마음이 자신의 것이 아님을 어렵지 않게 알아차릴 수 있는 그녀였다.
어느 흐릿한 밤에 방 문간에 기대어 앉아 그녀의 얼굴에 분을 칠해주는 시영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는 그의 모습에 그 마음이 절대로 자신의 것이 아님을 알아버린 그날 이후로 유경은 이 사내가 어렵지 않게 되었다.
그 눈동자에 담기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서, 그 마음에 담겨있는 것이 누구인지 알게 되면서 문한은 유경에게 벗이 되었다.
몸을 섞었지만 사내가 아닌 벗이 될 수 있었다.
“아니, 나가는 길이야. 오늘은 쉬는 날이야?”
“네. 오늘부터 사흘 동안은 기방에 나가지 않는 날이어요,”
“아아...”
뭔지 알겠다는 듯 문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달거리가 시작된 것이다.
기생은 달거리가 시작되면 사흘은 기방에 나가지 않고 집에서 휴식을 취하는 것이다.
물론 기생 중에는 달거리 중에도 술자리에 나가는 기생들도 있지만 피냄새가 나는 몸으로 사내를 대하는 것은 <예의>가 아니라는 시영의 말 때문에 유경도 그렇게 하기로 한 것이다.
“들어오세요.”“나가는 길이라니까. 오늘은 늦게 돌아올 테니까 문단속 잘하고 자. 시영이도 없을 테니까 말이야. 간혹 이 근처에 불량스런 놈들이 돌아다니니까...물론 내 집을 건드리는 놈은 없겠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어.”
아무리 무심한 척 해도 유경을 걱정하는 문한의 마음이 감추어질 리가 있으랴.
애써 무심한 척, 그러나 은근히 걱정스런 마음이 드러나는 당부에 유경이 살며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걱정 마시어요.”
웃는 유경의 눈에 사립문 밖에서 문한이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시영의 모습이 들어왔다.
두 사람이 함께 외출하는 듯 했다.
“유경이가 네 딸이야? 뭔 걱정이 그리 많아?”
“걱정은 무슨!”
시영이 핀잔을 주는 소리에 문한이 버럭 소리를 지르며 돌아선다.
이 사내가 무안해서 할 말이 없으면 일단 소리부터 지른다는 것 역시 유경은 이제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목소리가 큰 만큼 인정도 많은 사내라는 것 역시 알고 있었다.
어찌 보면 아버지 같은 두 사내.
아비의 얼굴도 어미의 얼굴도 모르고 자란 유경에게 두 사람은 꼭 부모와 같은 존재가 되어주고 있었다.
무뚝뚝한 듯 다정한 문한과 세심하지만 엄격한 시영.
나이도 마흔이 넘었다 하니 나이로 봐도 유경의 부모 뻘이었다.
다만 시영이 워낙에 동안이라 꼭 유경과 오빠 동생 하는 사이로 보이니 문제지만 말이다.
“다녀오시어요.”
문가에 서서 사립문을 나서는 두 사내를 향해 손을 흔들어준 유경이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문을 닫는다.
그리고 문고리에 빗장을 지르는 것을 잊지 않는다.
문한의 말처럼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는 것이다.
밖으로는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
“으응...”
유경이 잠결에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올렸다.
오랜만에 곤하게 잠들었던 그녀가 잠에서 깬 것은 밖에서 무슨 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잠을 자는 중에도 들을 수 있을 만큼 밖에서 들려온 소리는 컸다.
“돌아오셨나...”
혹시나 문한과 시영이 돌아왔나 싶어서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문 쪽으로 엉금엉금 기어간 유경이 문을 열려다 말고 손을 멈칫했다.
밖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다.
와장창-
장독이 깨지는 소리였다.
“...!”
난데없이 장독이 깨지는 소리에 유경이 몸을 움츠렸다.
밖에 있는 것이 그 두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 두 사람이라면 장독을 깨거나 하는 일은 하지 않을 것이다.
장독을 깼다는 것은 일부러 그랬다거나 마당 안의 구조를 알지 못해서 밤중에 어둠 속을 헤매다 깨뜨리는 경우 뿐이다.
전자도 후자도 그 두 사람에게는 해당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는 것은 밖에 있는 것은...
‘이를 어째...도둑인가...’
물론 도둑이 든다고 해서 가져갈 것이 있는 집은 아니지만 그래도 무서움이 왈칵 밀려들어서 유경이 몸을 움츠렸다.
밖에서 덜컹, 하고 소리가 난다.
문한의 방 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시영의 방은 유경의 방 바로 옆, 그리고 문한의 방은 유경의 방 맞은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맞은편 방의 문이 열린 것이다.
밖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궁금함을 참지 못한 유경이 손가락에 침을 발라 살며시 문창호에 구멍을 뚫는다.
그리고 그 작은 구멍으로 살며시 밖을 엿보기 시작했다.
어두컴컴한 마당에서 희미한 그림자가 움직이고 있었다.
그 그림자는 천천히 문한의 방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도둑...틀림없어...’
유경이 침을 꿀꺽 삼켰다.
지금 집에는 그녀 외에는 아무도 없다.
만약 그녀가 기척이라도 낸다면 도둑은 그녀의 방으로 올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가 기척을 내지 않더라도 문한과 시영의 방을 뒤지고 나면 도둑은 그녀의 방으로 올 것이다.
그리고 안으로 문이 잠긴 것을 보고 안에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아버릴 것이다.
그렇게 되면...
두려움에 유경이 바들바들 떨면서도 주위를 두리번거린다.
방 한 구석에 검무에 사용되는 칼이 세워져 있었다.
기생은 검무를 출 줄 알아야 한다며 시영이 연습용으로 가져다 놓은 칼이었다.
유경이 그 검무 연습용 칼을 손에 들었다.
날이 무디긴 했지만 칼은 칼이었다.
무서웠지만 이대로 있으면 더 큰일이 날 것 같아서 유경이 한손에 칼을 잡고 천천히 문을 열었다.
그리고 문이 열려있는 문한의 방으로 신도 신지 않은 맨발로 걸어갔다.
행여나 발자국 소리가 들릴까봐 조용히 조용히 마당을 가로질러 문한의 방문 앞까지 간 그녀가 살며시 문지방 위로 올라섰다.
흐릿한 그림자는 방안 구석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