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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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건 또 무엇이냐?”

수윤의 목소리에 유경이 한숨을 쉬며 걸음을 멈췄다.

또 시작인 것이다.

“나으리, 대체...”

앞에 지나가는 행인이 있든 없든 무작정 팔을 잡아 끄는 힘에 이끌려 유경이 걸음을 멈춘 수윤의 옆에 섰다.

“어서 오십쇼~ 이게 아주 귀한 것인지 지금 막 청나라 배를 타고 온 뜨끈 뜨끈한 물건입니다요~”

상인의 입바른 소리에 또 귀가 솔깃한 모양새다.

“오오! 그렇단 말이지!”

대체 이 사지 멀쩡한 양반이 무슨 생각인지 알다가도 모르는 유경이었다.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는 데 하는 짓을 보고 있자면 꼭 뭔가 하나 비는 사람처럼 보이는 것이다.

오늘은 아침 일찍 반 강제로 저자거리에 끌려 나왔다.

지난번에 이 양반과 처음 만났던 그 저자거리였다.

전날밤도 어김없이 유경이 있는 기방으로 찾아온 수윤이 하룻밤 거르는 법도 없이 유경의 화대를 내고 그녀를 독점한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수윤이 유경의 화대를 내면 유경은 그날 집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수윤은 유경을 아침까지 잡아두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영락없이 수윤과 하룻밤을 꼬박 자고 다음날 조반까지 같이 먹어야 하는 신세인 것이다.

물론 그녀가 수윤만 상대하는 것은 아니었다.

- 첩실로 들어앉기 전에는 한 사내만 상대하는 법이 아니다. 그건 제 발로 불구덩이로 들어가는 것과 같은 것이야.

시영의 경고를 유경은 기억했다.

기생이 한 사내만 상대하면 그것으로 그 기생은 끝나는 것이라고 시영은 분명히 말했었다.

만약에 정분이 나서 한 사내만 상대하고 싶어지면 차라리 첩실로 들어가는 것이 낫다고.

그래서 초저녁 술 자리에는 빠짐없이 나가서 한양의 다른 양반들을 상대했고 밤늦게 찾아오는 수윤과는 하룻밤을 꼬박 보내는 것이 그녀의 일과였다.

그런데 오늘 아침 조반을 먹고 돌아가려는 그녀를 수윤이 잡은 것이다.

이유는 같이 저자에나 가보자는 것이었다.

그리고 한식경도 넘게 저자를 돌아다니며 이러고 있는 것이다.

신기한 것이 있다 하면 달려가서 구경하고, 이리저리 기웃거리고, 대체 왜 양반이 이러고 다니는 지 알 수 없는 유경이었다.

시영의 말에 따르면 이 단수윤이라는 선비는 그냥 양반이 아니라 한성에서도 내노라 하는 양반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이렇게 얼빠진 짓만 하고 돌아다니니 뭔가 이해할 수 없는 그녀였다.

게다가 얼마나 돈이 많으면 매일 밤 기생을 사서 잔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도무지 알 수 없어서 유경이 결국 이 단수윤이라는 사내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포기해버렸다.

“어? 저것 참 희한하다.”

“나으리...이 손 좀...”

아무리 기생이라고는 하지만 벌건 대낮에 사내에게 손을 잡힌 채로 걷고 있는 것이 그리 좋은 모양새는 아니라서 계속 손을 놓아달라고 부탁하는 유경의 말을 못 들은 척 수윤이 저자 곳곳에 발걸음을 놓는다.

“나으리, 제발 손 좀...”

“오~ 이것 봐라. 신기하기도 하지!”

유경의 말에 대꾸도 하지 않고 수윤이 딴 짓만 한다.

“그래 그래. 바로 이거야. 이것 한번 보거라.”수윤이 파란 빛을 내는 노리개를 하나 집어 들고는 자기 도포에 이리 저리 대어본다.

“네 보기에는 어떠냐?”

“잘 어울리십니다. 그러니 나으리 손 좀...”

“흐응, 잘 어울린단 말이지. 그러면 이걸로 하지.”

수윤이 손으로 가볍게 흔들던 노리개를 장사꾼 손바닥에 놓고는 셈을 치른다.

그런데 노리개가 두 개다.

“나으리. 저는 이제 그만 돌아가야...”

“허어, 무슨 계집이 이리 촐랑거려? 갈 땐 가더라도 적어도 값은 하고 가야 하지 않겠느냐, 어?”

“값...이요?”

무슨 값을 말하는 건가 싶어서 유경이 고개를 갸웃거릴 때 수윤이 조금 전에 값을 치른 파란 노리개를 그녀의 저고리 앞섶에 매달아준다.

하나는 유경의 저고리 앞섶에, 또 하나는 자기 도포 앞섶에 달고는 히죽 웃는 것이다.

“잔 말 말고 따라오너라.”

“대체 왜...”

유경이 상대하는 다른 양반들 중에서도 그녀에게 장신구를 선물하는 양반들은 많았다.

비녀며 노리개며 떨잠이며 장신구를 선물하는 양반들이 많이 있었지만 똑같은 것을 나눠 다는 경우는 없었다.

아녀자의 장신구와 사내의 장신구가 엄연히 다르지 않은가.

“나 참...”

어리둥절해 하는 유경을 향해 수윤이 혀를 차며 중얼거린다.

“기생이라는 것이 눈치도 없어.”

“네?”

“원래 교제는 다 이렇게 하는 것이다.”

“네?”

교제라는 말에 유경의 얼굴이 확 붉어진다.

지금 이 양반이 무슨 말을 하는 건가 싶은 것이다.

교제라니, 그게 양반과 기생 사이에 있을 법한 말이던가.

얼굴이 붉어진 것은 유경 만이 아니었다.

앞을 쳐다보며 걷고 있는 수윤의 뺨도 살며시 붉어져 있었다.

자꾸 슬그머니 나오는 웃음을 삼키며 수윤이 짐짓 심각하게 표정을 지어보지만 가볍게 웃는 그 눈가가 곱다고 유경이 생각했다.

정말 웃는 눈매가 고운 양반이었다.

사내의 눈웃음이 저리 고와도 되는 건가 싶을 정도로, 다른 이들이 그를 향해 부르는 말인 버들잎 선비라는 이름이 정말 잘 어울리는 부드러운 눈웃음이라고 유경이 생각했다.

노리개를 다느라 그녀의 손을 놓아주었던 수윤의 손이 다시 그녀의 손을 살며시 잡아온다.

그 손이 참으로 곱다고...유경이 생각했다.

따뜻하고 곱다고...

그리고 문득 그녀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이 유난히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그녀의 저고리와 수윤의 도포에 매달려 있는 파란 노리개처럼 푸른 하늘이 그렇게 닮아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는...크험험.”

수윤이 이렇게 헛기침을 할 때면 뭔가 요구사항이 있다는 걸 유경이 이미 알고 있었다.

이렇게 거만하게 헛기침을 하면 뭔가 있는 것이다.

“앞으로는 나으리라고 부르지 말고...크험험...”

“네?”

“나, 나으리라고 부르지 말고...”

말을 더듬는 것이 더 수상하다.

“그, 어, 음...서방님이라고 부르거라.”

“네?”

“아, 아무튼!!”

수윤이 귓불을 빨갛게 물들인 채로 엉뚱한 쪽을 쳐다본다.

‘서방님, 좋잖아?’

수윤의 입이 괜시리 벌어졌다.

* 서방님 : 1) 벼슬이 없는 양반댁 젊은이를 일컫는 말.

           2) 아내가 남편을 높여 부르는 말.

과연 수윤이 바라는 의미는 어떤 것일까?

“뭣 하느냐. 불러보지 않고.”

딴 곳을 쳐다보던 수윤이 유경을 힐끗 째려본다.

그 고운 눈이 가늘어진 채로 쳐다보는 모습에 유경이 저도 모르게 그만 소리 내어 웃고 말았다.

“큭...”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어버린 유경의 모습이 수윤의 보기에 그렇게 좋았나 보다.

화장기 하나 없는 얼굴로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눈가에 눈물을 매달고 웃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수윤이 잡고 있던 그녀의 손을 살며시 힘주어 다시 잡는다.

여인네 웃는 모습이 이렇게 아름답다는 생각을 언제 해보았나 싶어서 수윤이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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