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44 회: 야앵 --> (45/131)

<-- 44 회: 야앵 -->

“에이~ 그러지말고, 오늘같이 화창한 봄날에는 그저 나하고 어디 나무 아래서 탁주나 한 사발~”

요즘 들어 자주 던지는 이 말투는 분명히 사거리 주막에서 배운 말투일 것이다.

“오늘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썩 돌아가지 않으면 내가...”

“아이고 참, 오라버니도 매정하기도 하시지. 매정해~ 매정해~”

라고 눈을 홀기는 것이 산호의 눈에 귀엽게 보였다.

“탁주에~고기 한점에~”

산호의 팔에 찰싹 달라붙어서 참새가 종알거리듯이 조잘조잘거리는 계집 아이의 끝나지 않을 탁주 타령을 들으며 산호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저어기 아줌니가 탁주를 얼마나 달게 담궜는지...”

아무래도 이 놈의 탁주를 사줘야 하는 것이다.

단이.

올해 나이로 열 아홉 살.

말만한 처녀지만 하고 다니는 행실이 꼭 열 살 짜리 아이 같아 보이는 단이.

단이가 산호를 올려다봤다.

석달 전에 나루터에 터 잡고 있는 상단의 무사로 들어온 사내가 산호였다.

한강 나루를 누비고 다니던 단이의 눈에 산호가 띄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평소에도 상단을 기웃거리며 이것저것을 얻어먹던 단이의 매의 눈 안에 산호가 포착되자 그 후로 산호는 단이의 먹잇감(?)이 된 것이다.

단이가 산호의 팔에 꽉 달라붙은 채로 그를 올려다봤다.

처음 단이가 산호를 봤을 때 산호는 그 얼굴에 웃음기가 없는 사내였었다.

그 표정 하나 없는 무심하고 쓸쓸한 얼굴을 한번 웃게 해보겠다는 오기가 들어서 그 주변을 맴돌며 치근덕거렸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때 멈추어야 했다고 단이가 생각했다.

그때 멈췄어야 했다.

지금은, 멈출 수가 없게 되어버렸으니까.

지금은...

“오라버니~~”

나름 작렬하는 애교를 섞어 단이가 산호를 불러본다.

그래봤자 기생년들 콧소리나 하다못해 색주가 창부들 콧소리만큼도 안된다는 거 알지만 흉내내서 손해볼 것은 없다.

나름의 매력이 있다고 자부해보는 것이다.

그래봤자 그녀를 아는 모든 이들은 미친년 지랄한다고 하겠지만 말이다.

“에헤헤헤헤. 하루 종일 한강 나루 싸댕겼더니 이렇게 오라버니도 만나고 오늘 일진이 좋으네요.”

이쯤 되면 뭔가 한마디 쯤 돌아와야 하는데 산호에게서 대답이 없다.

“오늘따라 오라버니 얼굴이 우중충해서 내 마음이 다 짜안~하네.”

온갖 애교를 다 부리려고 할 때,

“너는...”

드디어 산호가 입을 열었다.

“항상 즐거운 것이냐?”

“네?”

“그리 보여서...”

“아, 예...나야 뭐...골치아픈 일도 없고, 또 있어도 금방 잊고, 머리가 나빠서 기억도 못하고...”

“잊는다라...”

산호가 단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단이는 느낄 수 있었다.

그 눈이 향하고 있는 것은 자신이지만 그 눈안에 담겨져 있는 것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 눈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무도 보고 있지 않는 쓸쓸한 눈동자였다.

“웃으면...더 고운데...”

알 수 없는 말이 산호의 입에서 나오지 단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아니다. 빨리 앞장서거라. 그 탁주집이 어디냐.”

“정말이요?!”

앞장서라는 산호의 말에 단이가 뛸 듯이 기뻐했다.

평소라면 어림도 없는 일이 아니던가.

평소의 산호라면 일이 바쁘니 방해하지 말라고 저만치 굴려 보냈을 것이다.

평소의 산호라면 아무리 앞에서 조잘거려도 씨알도 안 먹혔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은 앞장 서라고 말하지 않는가.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그리고 소맷단의 냄새를 맡아보는 단이다.

‘내가 오늘 옷을 갈아 입었나? 킁킁, 냄새가 나는데? 아, 이럴 줄 알았다면 머리라도 좀 감고 올 것을. 내가 오늘 이빨을 닦았던가?’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어물어물거리는 단이에게 산호가 재촉을 한다.

“뭘 하는 거냐? 빨리 앞장 서지 않고.”

‘에라 모르겠다. 꼴은 이래도 이게 웬 떡이냐. 어디 오늘은 고운님 한번 모셔보자.’

단이가 신나라 산호의 팔을 잡아 끌고 걷기 시작했다.

이런걸 가리켜서 일진이 좋다라고 하는 것이다.

뒤로 넘어져도 엽전을 줍는 것이 이런 경우이리라.

‘좋다, 좋아~ 날씨도 좋고, 햇님도 좋고, 우리 고운 오라버니는 더더욱 좋고, 손 한번 모르는 척 잡아보고 싶지만 욕심이 많으면 놓치는 법이니 참자, 참아. 참는 자에게 복이 있나니...아부지~ 아부지 딸 오늘 땡 잡았수~~’

*

“카악! 퉤퉤!”

허리 춤에는 사거리 인심 좋고 손심 좋은 주모에게서 술값 반절 후려치고 받아온 탁주 한병을 꿰어 차고, 양 손에 퉤퉤 침을 뱉기를 집중한 다음, 소싯적부터 날다람쥐 소리를 들었던 재주를 살려 잽싸게 나무를 오르는 단이다.

이 말만한 계집애는 코흘리개 적부터 나무를 타고 놀아서 나무 타기에는 이력이 난 부류인지라 이제 도성 안에 높다는 나무에는 다 올라서 더 이상 오를 나무가 없다고 스스로 자부하는 나무타기의 일인자가 아니던가.

옷고름에 콧물 찍찍 묻혀 다닐 때부터 손에 나뭇가지 하나 쥐고 한양 장터에 떠억 하니 등장하면 또래 사내아이들이 계집애 다리 사이로 설설 기어 다닐 정도로 손이 매섭고 성질이 괄괄하기가 딱 왈패 수준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계집애였지만 이 산호라는 사내 앞에서는 영락없이 내숭떠는 순딩이 여우가 되니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이리 요사스러운 것이다.

“이햐~ 탁 트인데 아주 경치가 일품이구나아~ 한양에서 여기보다 더 경치 구경하기 좋은 곳이 없어요, 명당이라니까요, 명당.”

높다란 나무 가지 위에 턱 하니 걸쳐 앉아서 손으로 눈가를 짚고 이리 저리 구경하며 감탄사를 내지르는 단이를 나무 밑에서 산호가 난처한 표정으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꼭 거기까지 올라가야 하는 것이냐?”

올라가기 꺼려하는 산로를 내려다보며 단이가 음흉스런 눈웃음을 짓는다.

“올라오기 힘들면 제가 손을...”

이 핑계로 고운 님 손 한번 잡아보려는 속셈으로 단이가 손을 내밀려는 찰나,

“그냥 손 버리기 싫었을 뿐이다.”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나무 위에 올라와 있는 산호다.

“정말, 아래에서 보는 것과 위에서 보는 것이 다르기는 다르구나. 한양이 한눈에 다 보이다니...”

바람에 가볍게 날리는 머리카락 끝에서 사내의 냄새가 났다.

그 냄새에 단이가 살짝 달아오른 뺨을 땀을 닦는 척 꼬질한 손바닥으로 쓱쓱 비벼 문지르고 허리춤에 차고 있던 술병을 건넨다.

“자자, 이런 경치는 자고로 술을 마시며 보는 법. 내가 이쪽으로 마셨으니까 오라버니는 저 쪽으로~”

나름 배려를 듬뿍 담아 술병을 건네지만 산호가 좋게 거절을 한다.

“됐다.”

“에이~ 그러지말고 딱 한모금만. 내 정성을 봐서 딱 한모금만.”

“그럼 딱 한모금만이다.”

딱 한모금이라고 말하며 술병을 입에 대는 산호를 단이가 음흉하고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봤다.

*

“오라버니?”

불러도 대답이 없다.

“오라버니?”

다시 불러도 대답이 없다.

술 한모금 입에 대는 것을 못봐서 설마 했는데 역시나 술을 못 마시는 것이다.

그러니 딱 두 모금에 잠들어버린 것이 아닌가.

“오라버니 정말 주무세요?”

대답이 없다.

정말 취해서 잠들어버린 것이다.

“...”

기회는 이때다 해서 단이가 산호의 뺨에 손을 가져다 대어본다.

“세모금만 입에 대면 큰일나겠수다 오라버니.”

단이의 손가락이 천천히 산호의 반듯한 이마에서 코까지 선을 그어본다.

그리고 입술에서 멈췄다.

그리고 살며시 입을 맞췄다.

살짝 붙였다 떼어낸 그 입술에서 향긋한 탁주의 냄새가 났다.

단이가 잠든 산호의 옆에서 그저 그 잠든 얼굴을 바라보며 빙그레 미소 짓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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