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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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여간에 우리 안방마님께서도 대단하시지. 나랏일에 바쁜 판관 나으리를 어쩌자고 자꾸 불러서 이런 심부름을 시키신단 말이야, 대단해. 정말 대단해.”

추영이 자신을 데리러 온 것이 못내 무안해서 수윤이 자꾸만 딴 소리를 하는 중이었다.

집안 하인들을 보내면 수윤이 절대 오지 않을 것을 알기에 바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수윤의 모친이 추영에게 부탁을 하는 것이다.

바쁜 와중에 추영이 직접 데리러 가면 절대 버티지 못할 것을 알기에 그러는 거라는 걸 수윤도 알고, 추영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 이제 기방 출입은 자제하게. 아주 끊으란 말은 아니고 조금 줄이란 말일세”

추영의 담담한 목소리가 알게 모르게 굳어 있었다.

추영 자신은 모르겠지만 그 은근히 굳은 목소리를 수윤은 단박에 알아챘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이 친구의 심기가 조금 불편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자신을 데리러 온 것 때문에 상한 심기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수윤도 알고 있었다.

그 정도에 상하고 말고 할 사이가 아닌 것이다.

뭔가 하고 있는 일이 문제가 있는 건가 보다, 정도로만 생각한 수윤이 말을 다른 것으로 돌린다.

“조금 전에 그 아이 이름이 유경이야. 어디 시골에서 갓 상경한 아이인데 풋냄새가 나는 것이 아주 예뻐.”

수윤의 입에서 유경에 대한 말이 나오자 추영이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인물은 영 아니올시다인데 보면 볼수록 예뻐. 참 이상도 하지? 예쁜 구석이 하나도 없는데 내 눈에는 그리 예뻐 보이니 말이야. 자네 보기에는 어땠나?”

보면 볼수록 예쁘다는 수윤의 말에 추영이 입술을 꽉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그녀가 예쁘지 않다는 것은 추영이 훨씬 먼저 알고 있었다.

아니, 그녀를 먼저 안 것은 추영 자신인 것이다.

추영 자신은 수윤보다 그녀에게 대해 훨씬 더 많이 알고 있다.

그녀가 머리 올린 기생이 되기 전의 모습이 어떠했는지, 처음 보는 낯선 남자에게 친절을 베풀어줄 만큼 마음이 곱다든지, 그녀의 첫날밤의 모습이 어떠했다든지 하는 것은 자신이 수윤보다 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추영이었다.

자신이 더 잘 알고, 자신이 먼저 알았었다.

그리고 그녀의 몸을 연 것도 추영 자신이었다.

그녀의 머리를 올려 기생으로 만든 것 역시 추영 자신이었다.

그런데 지금 수윤 앞에서 차마 그녀를 알고 있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차마 그녀가 예쁘지는 않지만 이상하게도 예뻐 보인다는 말이 나오지 않는 것이다.

“당분간은 다른 기생들은 쳐다도 보지 않을 걸세. 그 아이를 조금 더 지켜보다가 기회가 되면 내가 그 아이를 기적에서 빼낼 생각이야.”

“자네 지금 제정신인가?”

드디어 추영이 한마디 내뱉었다.

“응?”

“정실도 들이지 않고 첩실부터 들이겠다는 말인가? 자네 양친께서 그것을 허락하시겠나? 제발 생각이라는 것을 좀 하고 살게.”

“뭐, 아무렴 어때. 내 마음이 가는 사람하고 사는 것이 제일이지, 마음에도 없는 여자를 데려다가 청상과부 만들면 그게 더 못할 짓 아닌가?”

“기생일세. 정혼도 하지 아니한 자네가 기생부터 집 안에 들어앉히면 사람들이 손가락질 할 걸세. 그리고 그 손가락질의 대부분은 그 기생이 받을 것이고. 자네가 좋다고 그 기생에게 그런 무거운 짐을 안길 것인가?”

추영의 목소리에 욱한 심정이 배어나오고 있었다.

물론 수윤을 걱정해서 그러는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수윤의 행실이야 오래전부터 소문이 나있지 않은가.

그가 정혼 전에 기생을 집안에 들어 앉혀도 그의 양친이나 다른 사람들은 그러려니 할 것이다.

하지만 추영 자신이 싫었다.

그녀를 수윤이 기적에서 빼내 그의 첩으로 삼는다는 것이 싫었다.

추영이 살며시 주먹을 쥐었다.

그의 새끼손가락에는 아직 유경이 주었던 옥가락지가 끼워져 있었다.

‘참 못났다, 추영아...네가 책임질 생각도 아니었으면서 이제 와서 수윤이 그녀를 책임지겠다니 그건 또 싫으냐. 참으로 못났다 추영아...’

마음이 복잡해서 추영의 눈가가 어두워진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마음에 추영의 눈가가 어두워지는 것을 수윤이 힐끗 쳐다봤다.

“듣고보니 그렇긴 한데...그래도 너무 그렇게 화 내지는 말게. 화를 안내는 사람이 화를 내니 무섭지 않은가.”

처음 보는 추영의 화난 모습에 수윤이 슬쩍 긴장한 것이다.

자기가 정말 너무 무리한 일을 생각하고 있나 스스로 다시 생각할 정도로 추영의 모습이 수윤에게 무섭게 비치고 있었던 것이다.

언제나 묵묵히 감정의 변화가 없던 친구가 딱딱하게 굳어져서 화를 내니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정말 예뻐. 그건 자네도 인정해야 해. 유경이 그 아이가 정말 예뻐.”

수윤이 중얼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추영이 힐끔 뒤를 돌아봤다.

기방은 벌써 보이지 않을 만큼 멀어졌지만 문을 열었을 때 그곳에 앉아 있던 유경의 모습이 아직 눈 안에 어른거리고 있었다.

하나도 변하지 않은 모습이었다.

작년 이맘때 송도에서 본 그 모습과 그대로였다.

여전히 그대로 선한 눈매를 한 채 그곳에 앉아 있었다.

그 눈매를 다시 보는 순간 설레기 시작한 가슴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그때도, 그녀를 안을 때도 설레지 않았던 가슴이 그녀를 일년 만에 다시 보는 순간 설레기 시작한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설레임.

그 생소한 감정에 추영이 눈을 감았다 뜬다.

감았던 눈 안에 그녀를 처음 봤을 때 어둠 속에서 나부끼던 그 하얀 꽃잎이 여전히 흩날리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머리 위에서 흩날리는 마지막 앵화 꽃잎이 마치 그때의 꽃잎인양 흩날리고 있었다.

“오라버니이이~~~”

이 경망스런 목소리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산호는 알고 있었다.

돌아서서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틀림없는 그 아이인 것이다.

그 아이 외에는 자신을 이렇게 경망스럽게 호들갑을 떨며 부를 사람이 없다.

돌아서는 산호의 눈에 목소리만큼이나 경망스럽게 달려와서 숨을 헉헉 거리는 계집 아이의 모습이 들어왔다.

얼마나 경망스러운지 머리는 헝클어져 창피한 것도 모르고 치맛단에는 흙이 묻어 투둑 투둑 떨어지고 있건만, 신고 있는 짚신의 앞섶이 튿어진 것도 모르고 그저 히죽거리고 있고 있는 모습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정신 나간 년처럼 보이지만 그 정신이 온전하다는 것은 산호도 알고 있는 바였다.

정신은 온전하지만 행실은 온전하지 못하다는 것을.

듣기로는 일찍 어미를 잃고 제 아비 손에 길러졌다고 했다.

여느 조신한 계집 아이들처럼 새침스럽게 걷는 법을 배우지 못해서 성큼 성큼 걷는 것이 몸에 배어버렸고, 여느 앙칼진 계집아이들처럼 눈을 흘기는 법을 배우지 못해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실성한 것처럼 웃는 얼굴이 배어버렸다는 것 정도는 산호도 알고 있었다.

알고 있었다.

실은 얼마나 착한 아이인지, 실은 얼마나 심성이 여리고 고운 아이인지.

실은 얼마나 맑은 아이인지.

그래서 이 아이를 볼 때마다 두고 온 유경이 생각이 나서 매몰차게 걷어내지 못하는 건지도 몰랐다.

이 아이처럼 착하고, 여리고, 고운 유경이가 이 얼굴을 볼 때마다 생각이 나서.

“어디 가시는 길이어요?”

“네가 알면 무엇하려고?”

산호가 퉁명스럽게 한마디 내뱉어보지만 그 목소리에 계집 아이의 눈가가 휘어진다.

“오라버니도 참, 오늘은 왜 이리 박정하시대? 갈 길이 바쁘지 않으면 저와 함께 저~기, 저어~기 한번 가보실라우?”

지치지도 않고 뒤를 따라오며 조잘조잘거리는 목소리에 산호가 돌아봤다.

“오늘은 내가 바빠서 너와 놀아줄 시간이 없다. 따라오지 말거라.”

냉정하게 말해보지만 씨도 안 먹힐 거라는 걸 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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