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회: 그 꽃, 피어나다 -->
달빛이 부서지는 밤 길.
부서지는 달빛 속에서 시영이 바스락거리는 소리를 놓치지 않았다.
그를 바래다주겠노라 한 추영을 일찌감치 돌려보낸 후였다.
차일에 집으로 한번 찾아오라 말해놓고 추영을 돌려보낸 시영이 달빛 휘엉청 밝게 빛나는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다.
“거기 누구 있소?”
한발자국을 내밀고 말을 걸어보지만 대답 대신 발자국만 들려온다.
저벅 저벅 거리는 그 발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 것 같아서 시영이 빙그레 웃고 말았다.
일부러 저벅 저벅 크게 내는 저 발소리는 행여나 인적 없는 밤길에 봉변이라도 당할까봐 마중 나온 벗의 것이 분명했다.
언제나 그랬다.
시영이 무슨 일로 늦게 돌아오는 밤이며 언제나 마중나오는 발이 있었다.
자기 한 몸 지킬 수는 있건만 무엇이 그리 미덥지 못한지 어김없이 마중나오는 그 벗의 마음이 갸륵해서 시영이 픽, 하고 웃어버리고 말았다.
문득, 앵화 향기가 나는 것 같다고 시영이 생각했다.
어디에서 앵화가 만개한 것인지 앵화 향기가 풍겨오며 꼭 앵화 꽃잎이 날리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강변의 앵화가 만개하기는 했었다.
벌써 앵화의 계절이구나 싶어, 이 계절에는 야앵도 괜찮겠다 싶지만 유경의 일을 봐주느라 올해 야앵도 모르고 지나칠 뻔한 것이다.
달빛 부서지는 어둠 아래 자신을 바라보며 다가오는 그림자를 보며 시영이 이 달빛 어린 밤을 걷기만 해도 야앵이려니 생각했다.
그저 함께 걸으며 어디선가 풍겨오는 앵화의 향기를 맡으며 이 밤의 어둠을 머리 위로 맞기만 해도 그것 역시 야앵이리라.
굳이 꽃을 보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향기만 맡아도 이렇듯 느껴지는 것이니 굳이 꽃을 보아야 할 이유는 없었다.
“유경이는?”
가까이 다가온 문한이 첫마디를 그렇게 열었다.
“오늘은 임자를 만났으니 내일이라야 돌아오겠지.”
시영의 대답에 문한이 쓴 웃음을 짓는다.
“밤길을 혼자 걸어오지 말고 자네도 내일 돌아오지 그랬어.”
“그러면 나를 마중 나올 누군가가 허탕을 칠 것 같아서 말이야.”
시영의 말에 문한이 웃으면서 그의 옆에 서서 걷기 시작한다.
한 사람이 걷던 길을 두 사람이 걷고 있었다.
달빛 부서지는 어둠 아래 잔잔히 웃으면서 걷고 있는 문한을 쳐다보던 시영이 문득 생각했다.
참 따뜻한 눈이라고.
언제나 따뜻한 눈이라고...
이 벗은 언제나 이렇게 따뜻한 눈으로 자신을 봐주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오직 한 사람만이...
‘오직 자네만이 나를 그런 따뜻한 눈으로 봐주어서...’
시영이 살며시 눈을 감았다.
‘나의 모든 운은 자네를 만나는 것에 다 써버려서 내게는 남아있는 운이 없지만, 그래도...그런 따뜻한 눈으로 봐주는 자네가 있어서...’
달빛 부서지는 길을 걸으며 시영이 눈을 감았다.
눈이 시려왔기 때문이다.
달빛에...눈이 시린다.
◈
“...”
딱 봐도 술이 곤드레 만드레 취한 것이 틀림없었다.
얼마나 취했는지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수윤을 보며 유경이 기뻐해야 하는지 어째야 하는지 감을 잡지 못했다.
술에 취해서 자신을 바로 앞에 두고도 알아보지 못하는 수윤인 것이다.
아니면 전날과 다르게 곱게 분화장에 연지를 바르고 머리를 올려서 알아보지 못하는 것일까.
전날의 그녀는 화장기도 없이 저자거리를 돌아다니지 않았던가.
술에 취해서 절반, 화장을 해서 절반, 그가 자신을 알아보지 못한다고 유경이 생각했다.
“나으리, 너무 취하셨으니 그만 잠자리에 드셔요.”
시영은 이 사내를 잡으라 했다.
이 사내에게 몸을 열어주고 이 사내를 잡아야 한다고 시영은 그렇게 속삭였다.
한량 같아 보이는 이 사내가 대단한 양반인 것은 틀림없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영이 그렇게 말할 리가 없었다.
차라리 취한 것이 낫다고 유경이 생각했다.
안면 있는 사이에, 그것도 그렇게 어색하던 사이에 지금에 와서 갑자기 교태를 부리며 안겨드는 것도 못할 짓인 것이다.
그러니 차라리 취한 사내에게 안기는 편이 낫다고 생각하며 유경이 저고리 고름을 풀었다.
수윤은 벌써 금침 위에 누워서 반은 졸고 반은 술기운에 헤롱거리고 있었다.
사락, 저고리 벗는 소리가 촛불을 밝힌 방안에 흐르며 그녀의 매끄러운 어깨가 드러났다.
취한 사내에게 기대할 수 없어서 유경이 스스로의 손으로 치마끈을 풀고 수윤의 곁으로 다가 앉았다.
오늘은 작정을 하고 온 것이라 안에 속곳도 입지 않은 그녀였다.
몸을 가리고 있던 것이 딱 저고리 하나와 치마 하나인지라 저고리와 치마를 벗고 나자 알몸이 된 그녀가 수윤의 곁으로 다가 앉았다.
그리고 수윤의 도포에 손을 가져다 댄다.
“나으리, 제가 벗겨드릴 것이니...”
“응?”
반쯤 취한 눈을 뜬 수윤이 자신의 도포를 벗기는 유경을 올려다봤다.
뭔가 아직도 분간이 안가는 얼굴이었다.
“네 이름이...”
“자, 나으리, 다리를 드셔요.”
“네 이름이 월향이였던가?”
알아보지 못하는 것이 확실했다.
“네, 나으리, 월향이옵니다. 그러니 자, 허리를 드시어요.”
“아니야, 아니야. 월향이가 아니라 매월이? 콧날이 매월이 콧날인데?”
“네, 네. 매월이옵니다.”
“아니야. 매월이는 이렇게 눈이 크지 않지. 눈이 큰 것을 보니...휘양이?”
이쯤되자 그 입에서 대체 몇 명이나 기생의 이름이 나올지 궁금해지는 유경이다.
가만히 내버려두면 밤새도록 한양의 기생이라는 기생 이름은 다 그 입에서 나올 것 같아서 유경이 얼른 그 입술을 막아 버린다.
“으읍...”
유경의 연지 바른 입술이 수윤의 입술을 내리 덮자 수윤의 눈이 잠시 크게 벌어졌다가 이내 가늘어진다.
그리고 가만히 눈을 감고 그녀의 입술을 만끽하는 것이다.
향긋한 홍화향이 그녀의 부드러운 입술과 함께 수윤의 입안으로 흘러들어오고 있었다.
천천히 들어 올린 수윤의 손이 그녀의 매끄러운 등에 닿았다.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그녀의 매끄러운 등으로 수윤의 손가락이 더듬기 시작했다.
유경이 도포를 벗겨낸 그의 가슴에 유경의 젖가슴이 뭉클거리며 닿고 있었다.
“으, 으응...”
유경이 은근한 신음을 흘리며 수윤의 아랫입술을 깨물 듯 빨았다.
아랫입술을 자극하는 것이 사내의 흥분을 부추긴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른 말은 필요 없었다.
이럴 때는 몸이 가장 정직한 것이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으로 다가서는 여인을 마다할 사내는 없는 것이다.
“아응...나으리...”
빨고 있던 수윤의 입술에서 입을 떼어내며 유경이 안타까운 신음을 흘렸다.
수윤의 손이 그녀의 허리를 미끄러져 내려가 그녀의 엉덩이를 잡았기 때문이다.
부드럽게 엉덩이를 어루만지는 수윤의 손길에 유경이 낮게 신음하며 가슴을 들었다.
맞대고 있던 가슴을 들어올리자 그녀의 젖가슴이 수윤의 얼굴에 문질러진다.
야릇한 광경이었다.
촛불 하나 만이 밝혀진 방 안에 알몸의 사내 위에 알몸의 여인이 올라타서 등을 휜 채로 뜨거운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사내의 손은 여인의 엉덩이를 어루만지고 있었고 여인의 손은 그런 사내의 가슴에 올린 채 그녀의 젖가슴이 사내의 입가를 유혹하듯 문지르고 있었다.
입술 안에 들어올락 말락하는 분홍빛 유두를 혀끝으로 할짝이던 수윤이 뭔가 생각난 듯이 엉덩이를 만지던 손을 멈췄다.
그리고 눈을 깜빡이며 말했다.
“소향이었어.”
그제야 기억이 난다는 그 목소리에 놀라 당황한 것은 유경이었다.
“네?”
너무 당황해서 유경이 수윤의 몸 위에서 그만 벌떡 일어났다.
당황해서 일어나는 유경의 허리를 수윤의 손이 꽉 잡은 것은 그때였다.
“향은 향인데 소향이었어. 소향이. 이름도 비싼 소향 낭자. 이름은 비싼데 몸은 비싸지 않은 모양이지? 이름은 두 식경 만에 가르쳐주더니 몸은 한다경도 되기 전에 열어주니 말이야.”
수윤의 능청스런 말에 유경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이 능글맞은 사내는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가 유경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알고도 모르는 척 그녀를 방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 그녀의 이름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딴 이름들을 불러보고, 그녀인걸 알면서도 모르는 척 그녀가 자신의 옷을 벗기고 안겨드는 것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다 알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