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회: 그 꽃, 피어나다 -->
유경이 얼른 돌아섰다.
괜히 그 선비가 자신을 알아보기라도 하면 그런 낭패가 없는 것이다.
그때도 저자거리에서 반나절도 넘게 잡혀 있었는데 기방에서 마주치기라도 하면 아예 이불 안으로 끌어들이고도 남을 위인이 아니던가.
입심도 좋아서 말로 이겨먹을 양반도 아니고 넉살도 좋아서 절대로 원하는 것을 얻기 전에는 물러서지도 않을 강적인 것이다.
저 선비만은 절대로 마주쳐서는 안된다고 생각하며 돌아선 유경이 서둘러서 그곳을 빠져나가려고 할 때,
“저 아이, 뒷모습이 남심을 울리는구나. 저 아이 좀 데려와보거라.”
수윤의 목소리가 유경의 등골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유경을 알아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냥 데리고 놀 기생이 필요한 것 뿐이리라.
유경이 돌아서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가만히 서 있었다.
“뭣 하느냐. 양반이 부르면 냉큼 달려와야지. 이리와 보거라.”
“나으리, 저 아이 대신 저희들과...”
선비를 옆에서 부축하고 있던 기생 두 명이 아양 섞인 목소리로 대답하는 것이 유경의 귀에도 들렸다.
행여나 손님을 빼앗길까 염려하는 목소리였다.
“네 년들은 꿀이 없어, 꿀이. 모름지기 꽃이 꿀이 흘러 넘쳐야지. 꿀도 없는 기생년 치마 자락을 붙잡고 무엇 하라고. 내, 저 아이 치마 안에는 꿀이 있나 없나 확인 좀 해봐야겠다. 저 아이 치마 안에도 꿀이 없으면 이제 한양 기생년들은 두 번 다시 찾지 않을 생각이다. 에이, 몹쓸 것들.”
“나으리.”
“거기서 그러고 서 있지 말고 냉큼 오지 못하겠느냐.”
“나으리이~”
뒤에서 옥신각신하는 소리를 들으며 유경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애꿎은 치맛자락만 잡았다 폈다 한다.
그런 유경에게 한줄기 구원의 빛이 비춘 것은 바로 그때였다.
“거기서 무엇하느냐?”
시영이었다.
아무리 기다려도 유경이 오지 않아, 오늘은 손님과 하룻밤을 보내려나 싶어 확인하러 온 시영이 마당 한가운데 멈춰 서 있는 유경을 발견한 것이다.
“아, 나으리.”
시영의 등장에 유경이 그보다 더 반가울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시영이라면 이 곤란하고 난처한 상황에서 그녀를 구해줄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것이, 저 선비님께오서...”
유경의 말에 시영이 뒤쪽에서 기생 두 명에게 이끌려 방 안으로 들어서고 있는 선비 수윤을 힐끗 쳐다봤다.
“네 년들 말고 저 아이를 들라 하라니까!”
기생들에게 양팔을 부축당해서 취한 걸음을 휘청거리며 방 안으로 끌려 들어가면서도 유경을 향해 손짓을 하는 수윤을 쳐다보던 시영이 유경의 귓가에 살며시 속삭였다.
“들어가서 하룻밤 모시거라.”
“네?”
뜻밖의 말에 유경의 눈이 커졌다.
마음이 없으면 다리를 벌리지 말라고 했던 것이 시영이 아니었던가.
시영이라면 그녀를 이 곤혹스런 상황에서 구해줄 줄 알았었다.
그런데 저런 마주하기도 곤란한 사내에게 다리를 벌려주라는 것이다.
몸을 허락하라는 것이다.
마음에도 없으면서 몸을 허락하는 것은 싸구려 창부라고 말했던 시영이 말이다.
“하오나 나으리...”
“나중에 네게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양반이다. 저런 양반은 붙잡고 봐야 하는 법이다.”
“하오나, 저는...”
“저런 양반이 곁에 있으면 잔챙이들이 꼬이지 않는 법이다. 때로는 마음이 열리지 않아도 목적을 위해서 취할 수도 있는 법. 가서 네 것으로 만들어보거라. 호락호락한 양반이 아닐 것이나 만약 네가 하룻밤으로 끝나지 않고 계속 저 양반을 네 치마 안에 가둘 수 있으면 넌 이제 날개를 핀 것이나 다를바 없다.”
“네...나으리...”
“나는 먼저 돌아가 있으마.”
유경을 떠밀 듯이 방 쪽으로 보내며 시영이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단수윤...’
시영이 그의 얼굴을 알아본 것이다.
물론 수윤은 날도 어둡고 취해 있어서 시영을 알아보지 못했겠지만 시영은 수윤을 알아본 것이다.
‘병조판서의 독자 단수윤. 한양에서 저만한 양반을 끼고 있으면 무서울 것이 없는 법.’
유경이 운이 좋다고 시영이 생각했다.
하지만 운도 재능이 아니던가.
어떤 이는 운이 지지리도 없어서 평생을 살며 찾아오지 않는 기회가 어떤 이에게는 때마다 적절하게 찾아오기도 한다.
그런 운도 재능이라고 시영이 생각했다.
그리고 유경은 그런 운을 타고난 것이다.
운을 타고 났기에 시영 자신과도 만난 것이고, 운을 타고 났기에 단수윤 같은 선비와도 만난 것이다.
누군가는 그렇게 애타게 바라는 기회가 누군가에게는 이렇게나 쉽게 찾아오는 법이다.
‘그를 네 사내로 만들어버리면...한양의 모든 양반들이 너를 보기 원할 것이다. 손에 잡히는 법이 없는 버들잎 같은 선비를 치마 자락 안에 휘어감은 기생을 너도나도 찾아댈 것이다. 그러니 유경아, 이 기회를 놓치지 마라.’
문이 닫히고 유경이 방으로 들어간지 얼마 못되어 방안에 있던 두 명의 기생이 밖으로 걸어나왔다.
그녀들의 얼굴에 얽혀있는 질투의 감정을 읽으며 시영이 돌아섰다.
이제 긴긴 밤이 뜨거울 것이다.
수윤이 만만찮은 상대라는 것은 시영도 알고 있었다.
여자를 데리고 노는 것이 이력이 난 사내가 아니던가.
하지만 만만찮기로는 유경도 지지 않는다고 시영이 생각했다.
“아...”
밖으로 걸어가던 시영의 앞에서 누군가 멈춰 섰다.
그 붉은 도포자락을 시영은 알고 있었다.
“오랜만에 뵙겠습니다. 그동안 평안하셨습니까.”
붉은 도포에 관모를 쓴 사내가 시영을 향해 허리를 숙였다.
“자네는 판윤 어르신 댁...”
“추영이옵니다.”
숙였던 허리를 핀 추영이 자신보다 십 몇 년이나 위인 시영을 천천히 바라봤다.
일찍이 신동이라 소문이 자자했으나 자기 발로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난 사내가 눈 앞에 있었다.
보장된 출세길도 버리고 한양 기생들 틈바구니에 자리 잡는 바람에 한때 소문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시영을 앞에 두고 추영이 인사말 외에 다른 말을 찾지 못했다.
추영이 어렸을 때는 이 사내를 동경한 적도 있었다.
어깨를 굽히는 법을 모르던 이 사내를 동경한 적이 있었지만 이 사내가 모든 것을 훌훌 버리고 떠난 후로는 인연도 동경도 끝이 나 버렸다.
“여기는 어쩐 일인가? 기방 출입도 하는가 보군.”
“그것이 아니오라 친구를 데리러 온 것입니다.”
“단선비?”
“네.”
추영이 단수윤과 단짝이라는 것은 한양 양반들 중 모르는 사람이 없다.
어렸을 때부터 단짝이었더니 커서도 단짝인 것이다.
“단선비라면 지금 기생 하나를 데리고 막 방에 들어가는 것을 내가 보았네. 아마 긴긴 밤을 보내려 들어간 듯 싶으니 방해하지 않으면 좋을 듯 하네.”
“보셨습니까?”
“그런 것은 아무리 친구라도 방해하는 법이 아니지.”
시영의 말에 추영이 잠시 머뭇거리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뭔가가 생각난 듯 시영을 향해 다시 입을 연다.
“차포교 나으리께서도 여전하시지요?”
“문한이? 늘 그렇지.”
“제가 차포교 나으리께 여쭐 것이 있어서 그러니 조만간 한번 찾아뵈어도 되겠습니까?”
“사람 만나러 오는데 여쭈고 말 것이 어디 있어. 와서 있으면 만나는 거고 없으면 못 만나는 거고. 마음대로 하게.”
거기까지 말한 시영이 다시 걸음을 옮겨 놓는다.
천천히 걸음을 옮기는 시영의 뒤로 추영이 따라서 걷기 시작했다.
어차피 수윤이 기생과 밤을 보내기로 작정하고 방으로 들어섰다면 내일 아침까지는 나오지 않을 것이다.
수윤을 제발 집으로 데리고 와달라던 병조판서댁 정부인의 부탁은 들어주지 못하게 되었지만 우연히 시영을 만나게 된 것은 뜻밖의 성과라고 추영이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풀리지 않는 문제 때문에 시영과 함께 살고 있는 차문한이라는 사내를 만나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밤이 깊었으니 제가 댁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내가 무슨 계집인가...”
그러면서도 같이 가주겠다는 추영의 말이 기분 나쁘지는 않은지 시영이 입가에 미소를 띠고 걸음을 옮긴다.
달이 휘엉청 밝은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