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4 회: 그 꽃, 피어나다 -->
요즘은 어딜 가나 <그 놈>의 이야기가 판을 치고 있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수윤이었다.
모름지기 술자리에는 운치 있는 대화들이 오가야 하는데 술잔을 돌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지금까지 오가는 대화라고는 그 사람 모가지를 자르고 다니는 미친놈에 대한 이야기만 난무할 뿐인 것이다.
오랜만에 동문수학 하던 동기들이 만나 술 한잔 나누는 자리라고 해서 나왔건만 이놈 저놈 할 것 없이 <그 놈> 이야기만 꺼내는 통에 짜증이 제대로 나는 것이다.
게다가 옆에 앉은 기생이라는 것들도 기분을 맞춰줄 생각을 앉고 그 놈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지 않는가.
‘한양 기생은 글러 먹었어.’
수윤이 속으로 혀를 찼다.
지난번에 송도에 갔을 때 그 콧대 높은 송도 기생을 품고 왔어야 했는데 그 송도 기생년의 콧대가 얼마나 높은지 종실 어른이 아니면 얼굴도 보여주지 않겠다 하여 공을 치고 그냥 돌아온 것이다.
이래저래 기분이 한껏 나빠 있던 수윤이 술자리에서 과장된 무용담을 풀어내고 있던 동기들을 째려봤다.
무과를 치르고 좌포청 종사관으로 있는 두 놈들이었다.
수윤에게 무과를 치른 친구들이 여럿 있는데 그 중의 두 놈인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즘 추영이도 그 놈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지?”
동기들의 말에 수윤이 더 기분이 나빠졌다.
유일하게 말이 통하는 벗이라고 생각하는 추영조차 요즘은 <그 놈>을 잡는 일에 빠져서 자신을 등한시 하고 있지 않은가.
기생질도, 술도, 출세도, 무엇에도 도통 관심이 없는 추영이 그 미친 놈 일에는 옳다구나 하고 달려드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는 수윤이었다.
‘그 놈 하나 잡아서 세상이 바뀌는 것이 무엇이 있다고.’
수윤이 코웃음을 쳤다.
다른 친구들과는 달리 과거에도, 벼슬에도 이미 뜻을 접어버린 수윤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신동이 났다고 주변에서 말들이 자자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모든 것이 시들해져 버린 것이다.
그리하여 양친의 성화도 모른 척 무시하고 유유자적 유람이나 하며 기생 치마폭에나 싸여 한량처럼 살아온 지 몇 해이지만 여전히 질리지도 않고 이러고 사는 것이다.
이미 집안에 몇 대째 쌓여있는 재물이 산처럼 있으니 자신이 평생 놀고 먹어도 다 쓰지도 못하고 죽는다는 것이 수윤의 지론이었다.
그런 재물을 쌓아놓고 또 벼슬에 올라서 또 다른 재물을 축적하는 것은 죄이니 죄를 더하지 않고 그냥 쌓인 재물만 얌전히 쓰겠다는 것이 이유이긴 한데, 그 이유가 다른 사람들의 귀에는 그저 게으른 심보로 들리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
“나으리, 그 홍앵이라는 자가 복면을 벗으면 그리 미남자라고 하던데, 직접 보시니 정말 그렇습니까?”
목소리에 참기름을 바른 듯 착착 앵겨오는 기생을 흥건하게 취한 얼굴로 쳐다보며 포도청 종사관으로 있는 한 놈이 얼른 대답한다.
“그, 그런 놈이 생겨봐야 거기서 거기지.”
두 종사관의 말을 더는 못 들어주겠다 생각한 수윤이 일어나며 한마디 내뱉는다.
“직접 보기는 개뿔. 그림자도 못 본 주제에 허풍은. 아무렴 네 놈들 얼굴 보다야 낫겠지.”
“어허, 이 사람 수윤이, 취했구만.”
“얼씨구, 이젠 취한 놈들이 안 취한 날 취했다고 몰아붙여? 몹쓸 놈들이구만?”
수윤이 고개를 흔들며 방 문밖으로 나섰다.
푸른 도포를 흔들며 문 밖으로 나가자 기생 하나가 얼른 따라붙는다.
“오늘 밤 이 년이 모시겠습니다.”
눈치 빠른 기생이 얼른 수윤의 팔을 부축하듯 붙잡았다.
이 한량 같은 선비가 한양에서 내노라 하는 양반댁 자제인 것을 모르는 기생은 없다.
하룻밤에 화대로도 수백냥을 푸는 사내가 이 사내인 것이다.
이런 사내를 놓치면 바보라는 생각으로 기생이 찰싹 안겨 들어오고 있었다.
“이런 발칙한 년을 봤나. 그래, 날 어떻게 모실 작정이냐?”
“네?”
“지난번에 수청든다 하던 년은 아랫도리 술잔에 술을 가득 채워서 나더러 마시게 하던데, 넌 어떻게 날 즐겁게 해줄 것이냐?”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음탕한 말을 내뱉는 수윤의 팔을 꼭 붙잡고 섰던 기생이 얼굴이 붉어진다.
“저, 저는...”
“일 없다. 기생년이 맛이 있어야지 맛이. 얼굴만 번드르 해서 속에 꿀이 없어, 꿀이.”
그렇게 문간 밖에서 서서 기생과 잡스런 말을 주고받고 있는 수윤의 귀에 데리고 온 하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으리. 이판관 나으리께서 모시러 오셨습니다.”
“어? 추영이가?”
수윤의 친구 중에서 이판관이라고 하면 추영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래. 추영이가 데리러 왔으면 가야지. 내 친구가 날 데리러 왔다는 데 같이 가야지. 아쉽지만 네 교태는 나중에 보자구나.”
그때까지 팔을 붙잡고 서 있던 기생을 떠밀어놓고 수윤이 당혜를 신는다.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기생이 뒤에서 째려보는 것도 무시하고 수윤이 취기를 날려버리려는 듯 부채로 얼굴을 살랑이며 마당으로 걸어나갔다.
*
“어, 달 조오타!”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살짝 골려줄 탓으로 조금 과하게 혀를 꼬아가며 걸음을 휘청휘청거리니 아니나 다를까 추영이 모르는 척 수윤의 어깨를 붙들고 차분하게 걸음을 옮겨 놓는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친구는 추영 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수윤이 슬며시 웃었다.
“그래. 너도 요즘 그 미친놈을 잡으러 다닌다고?”
문득 술자리에서 떠들던 이야기가 생각이 나서 수윤이 추영을 쳐다봤다.
“일단은. 한양 안에서 판치고 돌아다니는 놈이니 누구 손으로 잡든 잡아야지.”
취하지도 않았으면서 취한 척 하는 수윤을 부축하며 걸음을 옮기는 추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대답은 담담하게 하지만 속은 이미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요즘 한양을 시끄럽게 만드는 그 <홍앵>이라는 살인자 때문이 아니었다.
추영의 마음을 무겁게 가라앉게 하는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었다.
‘어디로 갔을까...’
일전에 잠시 송도에 다녀온 추영이었다.
춘삼월이 되면 송도에 가서 그때까지도 그녀가 어렵게 살고 있으면 차라리 기적에서 빼내주겠다 생각하며 송도에 갔던 그였다.
그런데 그곳에 그녀는 없었다.
그 집에 덩그러니 남아 있던 늙은 노파는 그녀가 한양으로 갔다고만 전해주었다.
‘한양...’
한양은 넓고도 알 수 없는 곳이다.
같은 한양에서 같은 하늘을 이고 살고 있더라도 만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왜 하필 한양이었을까...’
송도보다 힘들다면 더 힘을 수 있는 이곳 한양을 그녀가 택한 이유를 추영은 알 수 없었다.
왜 그녀는 떠난 것일까.
왜 그녀는 한양으로 온 것일까.
그녀는 지금쯤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송도에서 실패한 기생짓을 한양에서 하고 있을리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녀는 지금쯤 한양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생각하지 말자고 아무리 해봐도 어느새 마음이 그녀에 대한 생각으로 가버리는 것은 측은지심 때문인 것일까.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마음이 안쓰러워서 그런 것일까.
추영이 슬쩍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봤다.
도포 자락에 감추어져 보이지는 않지만 그녀가 준 옥가락지는 끈에 잘 꿰어 목에 걸고 다니고 있었다.
이 옥가락지를 받아버려서, 그래서 그녀가 미련처럼 남아 떠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추영이 생각했다.
‘잘 살고 있어야 할 터인데...’
한양 어딘가에서 우연처럼 마주치는 일이 있으면 좋겠지만 세상 일이 그리 쉬운 것은 아니다.
“하아...”
추영이 무거운 마음에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쉬는 것이 수윤의 눈에는 그 미친놈을 잡을 생각 때문에 한숨을 쉬는 것으로 보였나보다.
“그 미친놈 때문에 우리 추영이가 한숨을 다 쉬네 그려. 그 놈을 내 손으로 잡던가 해야지.”
수윤의 말에 추영이 작게 웃음소리를 냈다.
“뭘로 잡으려고? 부채로?”
날고 긴다하는 포도청 종사관들도 놓쳤고, 추영 자신도 한번 놓친 적이 있는 놈이었다.
몸이 날래고 칼 쓰는 실력이 좋아서 거의 잡았던 것을 한번 놓쳤다.
‘그래. 지금은 딴 생각을 할 때가 아니지. 일단 지금은 그 놈을 잡아야 하니...’
추영이 마음을 가다듬는다.
지금은 그녀를 걱정해서 마음을 풀어놓을 때가 아닌 것이다.
취하지도 않았는데 취한 척 하는 친구를 부축하고 돌아가는 추영과, 언제 안 취했다고 이실직고해야 하나 고민하는 수윤의 머리 위로 훤한 달빛이 부서지고 있었다.
누군가는 초롱을 들고 걸어가는 밤길, 그 조금 옆의 길을 추영과 수윤이 걸어가고 있었다.
달빛이 이리 훤한데 그렇게 그 밤길을 걸어가는 그들이 서로를 알아차리지 못한 것은 어둠이 부린 심술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아직 하늘이 그들이 만나지 못하게 눈을 가렸기 때문일까.
그렇게 그들이 걷고 있었다.
시영와 유경이, 그리고 추영과 수윤이.
같은 달빛을 이고 같은 듯 다른 길을 그렇게 걷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