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 26 회: 두 남자 --> (26/131)

<-- 26 회: 두 남자 -->

여차하면 도와준다는 핑계로 칼을 들이댈 심산이었다.

여차하면 불의를 눈뜨고 못 보는 의협심 때문이라고 되지도 않고 믿지도 않을 핑계거리 한번 대어보고 쌈판에 끼어들 생각이었다.

“어라?”

그런데 이게 웬 말인가.

왈패들이 우르르 달려들어 칼과 몽둥이를 휘두르는 데도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 짐군 청년이 덤벼드는 왈패들을 다 때려눕혀 버린 것이 아닌가.

“힘이 장사일세, 거참.”

끼어들 기회를 놓친 문한이 잠시 못된 생각을 해본다.

이렇게 된 것 저 청년을 도울 것이 아니라 왈패들을 도와서 저 청년과 한판 붙어볼까 하는 못된 생각이 슬슬 올라오고 있을 때 싸움이 끝났다.

“이대로 물러날 줄 알면 오산이야!”

청년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왈패들이 왔던 길로 우르르 몰려가자 뒤에 남은 청년이 왈패들이 쏟아놓은 쌀 가마니를 엎어놓고 쏟아진 낟알을 손으로 주워 퍼 담기 시작했다.

청년의 주위에서 그와 함께 짐을 나르던 짐군들이 웅성거리며 불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루터 왈패들이라는 작자들이 그냥 물러날 자들이 아닌 것이다.

지금은 몇 명이 와서 행패를 부렸지만 저렇게 두들겨 맞고 돌아갔으니 이제 그 패거리가 몽땅 몰려올 것이 분명했다.

배야 떠나면 그만이지만 엊그제 이 나루터에 도착해서 짐군으로 써달라고 하던 이 청년은 당장 처지가 위험해진 것이다.

왈패 패거리들이 몰려오면 무사하지 못할 것이 분명했다.

“저기, 이보게 총각. 그 놈들이 떼로 몰려오기 전에 빨리 달아나는 것이 좋아.”

짐군 중 한 명이 걱정스런 얼굴로 말해보지만 낟알을 주워 담는 청년의 얼굴에 요동은 없다.

“잘못한 것이 없으니 달아날 일 없습니다.”

맞는 말이지만 상황은 그렇지 않다.

“그 놈들이 떼로 몰려오면 자넨 죽어.”

“죽을 때 죽더라도 도망칠 생각은 없습니다. 제가 뭘 잘못해서 도망칩니까? 불법으로 자릿세나 뜯어먹고 사는 그 나쁜 놈들에게 꼬리 내리고 달아날 생각은 요만큼도 없습니다.”

“어허, 젊은 사람이 참나...”

낟알을 주워 담는 청년의 눈가에 단호한 결심이 떠올라 있었다.

적어도 잘못된 일 앞에서 등을 보이고 달아날 생각은 없었다.

이미 한번 도망친 것이다.

한번 잘못된 일 앞에서 도망쳤기에 이제 두 번 다시 옳지 않은 일 앞에서 달아날 생각은 없었다.

‘유경아, 나는 이제 도망치지 않아. 도망치지 않고 내 힘으로 당당하게 싸워 이겨서 내 터전을 넓힐 거야. 그리고 널 데리러 갈게.’

유경을 원했지만 그녀의 초야를 막아서지 못했었다.

그 누구보다 간절히 그녀를 원했지만 결국은 비겁하게 돌아서고 말았다.

도망치고 말았다.

두려워서 달아나고 말았다.

유경의 대답이, 그 후에 일어날 모든 일들이 무서워서 결국은 앞으로 한걸음도 나가지 못하고 달아나고 말았다.

도망쳐서 온 곳이 여기다.

여기에서도 도망쳐버리면 이제 갈 곳이 없는 것이다.

그녀에게로 당당하게 돌아가기 위해서 도망쳐왔건만 여기에서도 도망쳐버리면 그녀에게 돌아갈 길도, 앞으로 나아갈 길도 사라지는 것이다.

맞아 죽는 한이 있더라도 버텨야 한다고 그가, 산호가 생각했다.

“자, 배 떠나기 전에 짐 실읍시다.”

산호가 다시 쌀가마니를 어깨에 짊어졌다.

그런 패거리들이 다시 몰려오든 어쨌든 간에 일단 배에 짐은 다 실어줘야 하는 것이다.

다시 부지런히 움직이려는 짐군들의 뒤에서 소란스런 소리가 들려왔다.

“어떤 놈이야?!”

“그 놈이 어떤 놈이야!”

조금 전에 물러간 왈패들이 자기 패거리들을 불러 다시 온 것이었다.

눈으로 봐도 수십명이 칼과 몽둥이를 들고 나루터로 몰려오고 있었다.

험상궂은 그 얼굴과 살기등등한 그 모습에 나루터에 있던 사람들이 겁에 질려간다.

쌀가마니를 짊어지고 있던 산호가 입술을 살짝 깨물며 지고 있던 가마니를 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주먹을 꽉 쥐어본다.

물론 저 패거리들을 다 당해낼 재간은 없었다.

어느 정도 싸우다가 몰매를 맞을 거라는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몰매를 맞을 땐 맞더라도 죽을 힘을 다해 붙어보리라는 생각으로 산호가 한 걸음 앞으로 성큼 나설 때,

“귀식이 패거리들이네?”

산호의 앞을 누군가 가로막았다.

낯선 남자였다.

어깨에 칼을 지고 있는 낯선 남자가 산호와 왈패 패거리의 사이에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어...”

그 남자, 차문한의 얼굴을 확인한 왈패 패거리들이 당장이라도 다 때려 부술 듯 성나있던 걸음을 멈췄다.

“귀식이는 잘 있냐?”

어깨에 칼을 지고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왈패들의 두목 이름을 말하는 이 남자 차문한에 대해서는 한강 나루에서 왈패, 검계짓 하는 놈들치고는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그만큼 유명한 남자인 것이다 이 차문한이라는 남자는.

“차, 차, 차형...”

왈패들의 맨 앞에 서 있던 칼 든 사내가 말을 더듬거렸다.

“아직도 불쌍한 장사꾼들 세 뜯어먹고 살고 있냐? 내가 지난번에 말했잖아. 불쌍한 장사꾼들 세 뜯어먹고 살지 말고 차라리 세곡선이나 털어먹으라고 했잖아. 여기서 엽전 한 두닢 뜯어서 평생 거렁뱅이 신세나 면하겠냐?”

“우, 우리 앞가림은 우리가 하니 비켜주시오.”

얼굴에 잔뜩 겁을 먹은 것이 표시가 나는 남자가 문한을 향해 말을 더듬거린다.

“나도 비켜주고 싶은데 얘, 나하고 아는 애라서 내가 좀 간섭을 해야겠다.”

“네?”

등 뒤의 산호와 문한이 아는 사이라는 말에 왈패 남자들의 얼굴에 당황스러움이 퍼졌다.

“네?”

당황하기는 산호 역시 마찬가지였다.

생전 처음 보는 남자가 갑자기 앞을 가로막더니 아는 사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자, 결정하자. 나하고 한판 붙을래? 아니면 얘 그냥 보내줄래?”

문한이 건들 건들거리며 왈패 패거리들을 쳐다봤다.

얼굴을 웃고 있지만 그 미소에 담겨진 살기를 왈패 사내들이 느끼지 못할 리가 없었다.

그리고 그들은 알고 있었다.

이 능글능글한 남자가 한번 칼을 뽑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 볼일 보십시오.”

왈패들이 물러나겠다는 의사를 표시하자 문한이 큭큭거리며 웃으면서 돌아서는 왈패들을 향해서 한마디 던진다.

“귀식이한테 몸조리 잘 하라고 전해줘라. 물론 몸조리 잘 한다고 잘린 팔이 다시 돋아나지는 않을 테지만 말이야.”

바로 한달 전에 그 왈패 패거리의 두목인 귀식이라는 사내가 문한과 붙었다가 오른쪽 팔이 잘려나갔던 것이다.

그때로 무려 30:1로 붙었었지만 제대로 칼 한번 써보지 못하고 당해버린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차문한이라는 사내가 얼마나 무서운지 이 왈패들이 뼈저리게 알고 있는 것이다.

무서울 것도 없고, 거칠 것도 없어서 더 당당하고 무서운 사내, 차문한과는 웬만해서는 적을 지면 안 된다는 것이 한강 나루 모든 왈패들이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왈패들이 물러가자 문한이 자신의 등 뒤에서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당황하고 있는 산호를 돌아봤다.

“이름이 뭐냐?”

대뜸 이름을 묻는 문한의 말에 산호가 눈만 껌뻑거렸다.

도무지 이 상황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이다.

“쌀이나 나르기에는 힘이 아깝던데, 큰 일 한번 해볼 생각 없냐?”

“네?”

<큰 일>이라는 문한의 말에 산호의 표정이 바뀌었다.

그 큰 일이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나루터에서 뱃짐이나 나르는 일보다는 나은 일이 분명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남자가, 왈패들이 무서워서 칼 한번 빼들지 못하고 물러가는 이런 남자가 소개하는 일이라면 뭔가 괜찮은 일이라는 생각을 산호가 했다.

집을 떠나온 지 일년. 

하지만 신원보증도, 변변한 능력도 없는 산호에게 주어지는 일은 거의 없었다.

이런 허드렛 일 외에는 누구도 그에게 일을 주지 않았다.

세상은 그렇게 만만찮다는 것을 한양으로 와서야 깨달은 것이다.

그런데 이 낯선 남자가 자신에게 큰일을 해볼 생각이 없냐고 말하고 있었다.

이것은 어쩌면 기회일지 모른다고 산호가 생각했다.

전혀 모르는 남자이지만, 이 상황은 하늘이 내린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떤 일입니까?”

대답하는 산호의 눈에 단호한 빛이 떠올랐다.

행운처럼 찾아온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다는 눈빛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