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3 회: 두 남자 -->
심지만 겨우 밝히고 있는 등잔 위에서 불꽃이 위태롭게 흔들린다.
그 위태로운 불빛으로 간신히 어둠을, 흐릿하게라도 어둠을 밝히고 있는 그 등잔을 유경이 대견스럽게 쳐다봤다.
기름 값이 아까워서 평소에는 잘 밝히지도 않는 등잔을 켜 놓은 남자가 유경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흐릿한 등잔에 비친 그녀의 얼룩 얼룩한 모습이 그의 눈에 담겨진다.
느닷없이 자신의 이름을 부른 여자였다.
하지만 이 남자, 우시영의 기억에는 이런 여자는 전혀 기억이 없다.
아무리 머릿속을 뒤져봐도 만난 기억이 없는 여자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 것이다.
“그래서...”
긴 침묵 끝에 드디어 우시영이 입을 열었다.
“나를 만나러 왔다는 것이냐?”
대뜸 반말이다.
유경의 생각에는 이 남자가 어림잡아도 스물 세네살 밖에는 되어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양반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갓을 쓰지는 않았지만 하고 있는 행색이 양반의 것은 아니다.
양반이 아니라면 아무리 사내라고는 하지만 생면부지의 계집에게 초면에 반말은 실례가 아닐까, 하고 유경이 생각을 했다.
그 생각을, 그 표정을 읽은 것일까.
“내가 겉으로 보이는 것보다는 나이가 제법 들었다. 그래서 말을 놓는 것이니 무례하다고 생각하지는 말아라.”
“네?”
표정이 그렇게 쉽게 드러난 것일까, 하여 유경의 얼굴이 붉어진다.
“하긴. 저 놈이 어리게 보이는 얼굴이지. 열이면 열 다들 저 놈이 갓 스무살 된 총각 놈인 줄 알지 누구도 나이 마흔 넘은 중늙은이라고 생각하는 놈은 없을 걸.”
동석하고 있던 또 다른 남자 문한이 말을 거든다.
차문한이라고 하는 이 남자가 유경과 우시영이라는 사내의 대화를 한 귀로 흘려들으며 방 한 켠에서 칼을 손질하고 있는 중이었다.
어둑한 방 한 켠에는 꼬다 만 새끼들과 짚신, 그리고 왕골이 있었고, 그 옆으로는 낡은 책이 수십권, 그리고 그 옆으로는 마찬가지로 낡은 이불 한 채가 아무렇게나 밀쳐져 있었다.
아무리 봐도 기생과 상관있어 보이는 남자는 아니었다.
가야금도, 그 흔한 북 한 채도 보이지 않았다.
죽어가던 그 기생이 왜 이런 남자에게 꼭 가라고 했는지 유경은 그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죽음이 목전이라서 제정신이 아니었을까?
그렇다고 보기에는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 또렷했었고 간절했었다.
- 우시영 나으리께...
그 말을 믿어보는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 온 이상 돌아갈 길은 없는 것이다.
“그래, 나를 만나보라 한 그 사람 이름이 뭐라고?”
“그건 잘...”
그러고 보니 그녀의 이름도 알지 못했다.
임종을 지켜주는 가족도 없었던 그녀.
그런 그녀의 이름이라도 물어볼 것을...하며 유경이 후회했다.
그랬더라면 자신이라도 그녀를 언제까지나 기억해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며 유경이 때늦은 후회를 해본다.
“허어...이것 참.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 날 만나보라 했다니. 그래, 어디서 왔느냐?”
“송도에서 왔습니다.”
“송도? 거 참 멀리서도 왔네.”
칼을 손질하던 문한이 또 한마디 끼어든다.
“송도에서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계집이 여기까지 찾아와?”
“송도라면, 혹 기생인가?”
우시영의 묻는 말에 유경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하옵니다.”
“기적에는 언제 올랐느냐?”
기생이라는 말에 그제야 우시영이 흥미를 보인다.
“작년 봄에 기적에 이름을 올렸습니다.”
“그러면 송도에서 기생 노릇을 할 것이지 뭣 하려고 한양까지 올라와? 한양 기생들 텃세가 얼마나 대단한지 송도에 소문이 나지 않았던 모양이지?”
“송도에서 기생 노릇을 하려니 가지 재주도 없고, 찾아주는 이도 없어서 이나마 길을 접어야 하나 고민하던 중에 제가 만난 선배님께서 한양에 가서 나으리를 만나 뵈라 하셨기에 이렇게 무례함을 알면서도 찾아왔습니다.”
“왜 기생 노릇을 접어? 병이라도 난 것이냐?”
“그것이 아니오라 가진 재주도 없고, 외모도 없으며 기생으로서 합당한 무엇 하나 가주지 못한 지라 스스로 기생 실격이라 생각이 되어...”
“기생도 자격이 있나?”
우시영이 빙그레 웃었다.
“진사 자격은 과거를 보면 주어지는 것이고, 무관이 되고 싶으면 무과를 보면 되는 것이지만 기생도 자격이 있다는 말은 처음 듣는 걸? 그래, 송도에서는 기생이 자격이 있어야 되는 것이냐? 그러하면 그 자격은 무엇이냐? 나는 모르니 내게도 좀 알려다오.”
“그것은...”
“사내가 찾지 않는다고 하였느냐? 사내가 찾지 않으면 찾게 만들면 되지 무엇 하러 한양까지와?”
“하오나 그렇게 쉬운 일이...”
“어디, 한번 돌아앉아 보거라.”
우시영의 말에 유경이 옆으로 살짝 돌아 앉았다.
“또 시작이네, 사람 간보는 것. 그 짓 그만둔다고 하더니 다 헛소리야.”
문한이 혀를 찬다.
“옆태는 괜찮고, 뒤돌아 앉아 보거라.”
계속되는 시영의 요구에 유경이 돌아앉는다.
“뒷태도 그만하면 됐어. 자, 다시 돌아 앉거라.”
유경이 우시영을 마주 보고 앉았다.
“저고리를 벗어 보거라.”
“네?”
시영의 말에 유경이 깜짝 놀라 그를 쳐다봤다.
옆에서 문한이 작은 소리로 웃는다.
“왜 벗기 싫으냐? 그러면 보따리를 챙겨서 가 보거라.”
“...”
담담하게 싫으면 나가라는 시영의 말에 유경이 잠시 망설임 끝에 저고리 고름을 풀기 시작했다.
새삼 부끄러울 것이 없었다.
어차피 처음 기적에 이름을 올릴 때 정 보기도 하지 않았던가.
저고리를 벗는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곳까지 모두 보여주기도 했는데 이것쯤 하지 못할 것이 없었다.
저고리를 벗자 흐릿한 어둠 속에서 유경의 매끄러운 어깨가 드러난다.
옴폭 파인 쇄골 아래로 치마끈에 묶여서 뭉툭하게 부푼 그녀의 젖가슴이 도드라진다.
“치마도 벗고.”
“속곳도 벗으리이까?”
대담한 유경의 대답에 시영의 얼굴에 웃음이 떠올랐다.
“영특하구나. 그래, 한번에 시원하게 다 벗어 보거라.”
만약 이 남자가 이곳에서 자신의 몸을 요구한다 할지라도 기꺼이 내어줄 마음이 유경에게는 이미 결심되어 있었다.
값을 무엇으로 치르든지 간에 기생으로서 살아갈 수 있다면 치르지 못할 것도 없었다.
“오랜만에 계집 알몸을 다 보겠네.”
칼 등을 천으로 닦으며 웃는 문한을 향해 시영이 천연덕스럽게 대답한다.
“다 내 것이라고 생각하게. 친구를 잘 둬서 공짜로 계집 알몸도 보게 됐다고 말이야.”
“별 걸 가지고 다 유세야. 게집 알몸이 뭐가 그리 대단해다고.”
시큰둥한 척 해보지만 문한의 시선이 치마를 벗고 안에 입고 있던 다리 속곳을 벗는 유경을 향한다.
흐릿한 방 안에 일어선 채로 한꺼풀 씩 입고 있던 옷을 벗어나가는 유경의 알몸이 드러나고 있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그녀가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으로 두 남자 앞에 서자 그때 마침 곰방대에 불을 붙이던 우시영이 연초를 한 모금 빨고 연기를 길게 내뱉었다.
“몸도 그럭저럭 보기에 나쁘지 않군.”
한번 더 연초를 빨며 우시영이 유경을 쳐다보는 그 눈매가 짓궂다는 것을 그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그리고 더 짓궂은 요구가 그의 입에서 나왔다.
“거기 앉아서 다리 한번 벌려 보거라.”
드디어 올 것이 왔다고 생각하며 유경이 살며시 입술을 깨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