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회: 두 남자 -->
“정말 한양으로 갈 생각이오?”
할멈이 유경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이젠 정리할 세간도 거의 남지 않고 옷가지도 남지 않아서 챙길 짐도 없었다.
남아있는 옷 몇 가지와 비녀며 떨잠 몇 개를 싼 보따리를 여민 유경이 할멈을 쳐다봤다.
이 집은 할멈에게 맡고 떠나기로 결심한 것이다.
다행히 누군지 알 수 없는 손길에 쌀섬이며 땔나무는 겨울을 지내기에 충분히 있었다.
할멈 혼자서 겨울을 나기에 부족한 것이 없는 것이다.
“정 가기로 결심했으면 내가 무슨 재주로 막겠소만, 그래도 겨울은 나고 가시오. 이 엄동설한에 아는 사람 하나 없는 한양에 가면 얼어 죽거나 굶어죽기 딱 좋기에 하는 말이오.”
“아니요, 할멈.”
유경이 고개를 저었다.
“마음 먹었을 때 가려구요. 괜히 겨울을 나고 가겠다고 미뤘다가 마음이 변할까 무서워서 그래요. 나는 날 너무 잘 알거든요.”
조금만 더 있다가, 조금만 더 있다가, 하면서 이런 이유 저런 이유를 붙여 결국 이곳을 떠나지 못하게 될 까 그것이 두려워서 지금 당장 마음을 먹었을 때 떠나기로 결정을 내린 것이다.
아는 사람 한 명 없는 한양.
이름도 모르는 병든 퇴기의 한마디에 모든 것을 두고 떠나기에는 낯설기만 한 곳.
아는 것이라고는 삼짓나루의 우시영 나으리라는 이름 석자 뿐.
그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그곳에서 자신이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조차 아는 것이 없지만 지금 이곳에 이대로 머물러 있는 것보다는 나을 것이라고 유경이 생각했다.
이곳 송도에 남아서 이전과 변함없이 살아가는 것보다는 차라리 아무도 모르는 곳에서 다시 시작하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이 모진 겨울에 살을 에는 바람이 그녀를 잡아 삼킬 듯 몰아닥쳐도 차라리 그 모진 바람을 맞으며 한걸음 한걸음 나아가는 것이 더 나을 것이라고 그녀가 생각했다.
지금까지의 삶은 언제나 누군가의 울타리 안에서 보호받는 삶이었다.
머리를 올리기까지는 항상 누군가의 보호 안에서 살아왔던 자신을 유경이 되돌아봤다.
언제나 청지기 유씨와 강씨가 옆에서 돌봐주었고, 산호가 늘 지켜주었으며, 행수 기생 추월이 알게 모르게 뒤를 봐주었었다.
그랬었다.
한번도 그녀 혼자 힘으로 무엇 하나 해본 적이 없는 것이다.
지금 살고 있는 집도, 이 집에 쌓여 있는 양식도 그녀의 손으로 얻어낸 것이 아니다.
알 수 없는 누군가의 도움이 있었던 것이다.
결국 그녀 자신은 온실 속에서 얌전히 자라온 화초에 불과한 것이다.
한번도 세상의 모진 바람을 맞아본 적이 없는 그런 약하디 약한 화초였던 것이다.
바람 한번 맞으면 그대로 쓰러지고 마는...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러기 싫었다.
- 어차피 한번은 지는 꽃, 바람에 지는 꽃이 기생.,..
온실 안에서 고이 자라다가 있는 듯 없는 듯 사라지는 꽃이 되기는 싫었다.
뜨거운 햇살 하나 견디지 못하고, 모진 바람 하나 견디지 못하고 사그라드는 꽃이 되기는 싫었다.
어차피 한번 피었다면, 세찬 바람에 꽃잎을 한번 활짝 펴보고 싶어진 것이다.
그것이 어떤 바람이라 할지라도...
바람을 맞고 싶어졌다.
스스로의 발로 세상에 서서 불어오는 바람을 당당히 맞고 싶어졌다.
모질다 해도, 시리다 해도, 저리듯이 아프다 할지라도 그 바람을 맞고, 그 바람에 지는 꽃이 되고 싶어졌다.
그녀의 말처럼, 바람이 불어오면 그 바람을 휘어감고, 그 바람에 향기를 퍼뜨리다, 그 바람에 지는 꽃이 되고 싶어졌다.
“할멈. 건강해요. 그동안 고마웠어요.”
유경이 진심으로 감사를 담아 할멈의 주름진 손을 잡았다.
“고맙긴, 내가 더 고맙지. 어디 가서 어깨 움츠리지 말고, 기생 중에 최고는 송도 기생이라 하였으니 한양 기생들 텃새에 울지 말고, 알았소?”
“알고 있어요. 나중에, 아주 나중에 송도에 오게 되면...그때까지 할멈이 건강히 있어야 내가 할멈 얼굴을 볼 수 있지 않겠어요?”
“그러려면 내가 백살까지 살아야겠구만.”
“백수하세요, 할멈.”
그 주름진 손을 꼬옥 잡으며 유경이 살며시 고개를 떨궜다.
이제 이 집을 떠나는 것이다.
머리를 올려주었던 이추영, 그 남자가 마련해준 이 집을 떠나는 것이다.
이것으로 그 남자와의 인연도 끝이 나는 것이다.
이 집에 살고 있으면 언젠가는 그 남자와 다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는 막연한 희망을 가져보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언젠가 거짓말처럼 그 남자가 이 집으로 자신을 찾아오는 꿈을 꿔보지 않았다면...
하지만 이 집을 떠나는 순간 그 남자와의 인연은 끝이 난다.
세상 어디에서 다시 만나게 될 일도 없을 것이다.
유경은 그 남자의 얼굴을 모르고, 그 남자 역시 유경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여기서 이제 인연은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산호와의 인연도 여기서 끝이 난다.
산호는 언젠가 이곳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가 돌아올 때를 기다려 강씨와 유씨도 새로 이사 가는 곳의 위치를 청연루에 남겨놓았다.
하지만 그녀가 이곳을 떠나면 산호와의 인연도 끝이 나는 것이다.
모든 것과의 이별, 그것이 그녀의 한양행이었다.
그녀를 지켜주던 모든 것과의 이별, 그리고 동시에 그녀가 혼자 스스로의 발로 홀로서기를 하는 그 시작인 것이다.
고개를 숙인 유경의 눈에서 눈물이 한줄기 흘러내렸다.
그리하여 그녀가 송도를 떠난 것은 그해 정월 중순이었다.
한참 함박눈이 온 세상을 덮던 어느날의 일이었다.
◈
정월인데도 나루터 주변은 시끄럽기 이루 말할 데 없었다.
그 소란스럽고 어지러운 풍경이 송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어서 유경이 어리둥절 서 있다가 이리저리 오가는 사람들에게 채이기도 많이 채였다.
송도의 느긋함이라고는 이곳 한양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길 가는 누구라도 잡고 ‘삼짓나루 우시영’이라는 사내에 대해 물어보고 싶은데 누구 하나 유경의 손에 잡혀주는 이가 없었다.
물어 물어 한강 나루터 중 삼짓나루까지 겨우 찾아는 왔지만 이곳에서 그 ‘우시영 나으리’를 어찌 찾아야 할지 막막해진 유경이 솥을 걸고 해장국밥을 팔고 있는 여인네에게로 다가갔다.
“저어...”
“한그릇 드릴까?”
손님이라고 생각했는지 여인네가 국자를 들어 보인다.
“아니요. 사람을 찾고 있는데...”
“국밥 먹을 거 아니면 딴 데 가서 일 보시오. 바빠 죽겠는데 말을 걸고 지랄이야, 지랄은.”
여인네의 입에서 나오는 험한 말과 차가운 눈초리에 유경이 얼른 뒤로 물러났다.
국밥이라도 한그릇 사먹으며 물어보았어야 했다고 뒤늦은 후회를 하며 유경이 주변을 둘러본다.
매서운 강바람이 정월의 한기를 담아서 불고 있었다.
솜옷을 두텁게 입는다고 입은 유경이지만 강에서 불어오는 그 칼바람에 몸이 시려오고 있었다.
버선을 신은 짚신발은 꽁꽁 언지 오래였고 그녀의 뺨도 얼어서 새빨갛게 변해 있었다.
“사람 찾으오?”
유경의 뒤에서 누군가 말을 걸어온 것은 그때였다.
“네?”
낯선 사내였다.
“사람을 찾냐고 물었소.”
“네. 삼짓 나루에 사시는 우시영 나으리라고, 혹시 알고 계십니까?”
유경의 물음에 사내가 잠시 골똘히 생각하더니 손뼉을 친다.
“아, 그 양반이구만.”
“알고 계십니까?”
유경이 반색하며 사내를 쳐다봤다.
“알다 마다. 내 아는 양반이니 내가 안내해주겠소. 따라 오시오.”
따라 오라는 말에 유경이 얼굴에 안도의 표정을 지으며 사내의 뒤를 따라 걸음을 옮겼다.
다행이라고 그녀가 생각했다.
해가 지기 전에 그를 찾지 못하면 어디 주막에라도 가서 묵으며 다음날 또 이 근처를 뒤져야 했는데 다행히 그를 아는 사람을 만나서 하늘이 돕는 것이라고 그녀가 생각했다.
뒤따라오는 유경을 힐끗 곁눈질로 쳐다보는 사내의 눈가에 히죽, 웃음이 떠올랐다.
‘오랜만에 물건 하나 건졌네.’
사내가 눈웃음을 히죽 히죽 지었다.
어디 시골에서 올라온 것인지 촌티를 팍팍 내며 멍청하게 서 있는 계집 하나를 꼬여내는 것은 일도 아닌 것이다.
사내의 음흉한 속셈을 모르는 유경만 그저 이제 그 우시영을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들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