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 회: 겨울 -->
찬바람이 뺨을 스치고 지나가자 유경의 여린 피부에 흔적이 남았다.
언 손을 호호 불며 유경이 대야를 들고 방 안으로 들어갔다.
군불을 뗀 방 아랫목에 병자가 누워 있었다.
의원은 이미 병이 깊어 살릴 수 없으니 다른 병자나 돌보라고 했지만 유경은 그녀를 두고 돌아설 수 없었다.
다른 병자들을 돌보는 틈틈이 이 집으로 와서 그녀를 돌본지 하루 반나절이 지나고 있었다.
보통 이 돌림병에 걸리면 고열에 시달리다가 거의가 일주일이면 숨이 끊어진다고 했었다.
민간에 열병에는 아주까리 기름이 효험이 있다고 해서 머리에 바르는 아주까리 기름을 그녀가 챙겨왔다.
“선배님, 저 왔어요.”
돌보는 이가 없어서 먹지 못해 기진해 있었던 병자는 유경이 미음을 끓여 먹이고 방을 따뜻하게 해주자 처음보다 많이 호전되어 있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살 가망이 있다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제법 또렷한 말을 할 수 있을 정도가 된 것이다.
“다른 사람이나 돌보라니까...”
누운 채로 병자가 힘없이 말했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찾아와 준 것이 싫지는 않은 표정이다.
“이것 좀 드셔보세요, 아주까리 기름이어요. 돌림병에 좋다고 해서 가져왔어요.”
병자를 일으켜서 앉힌 유경이 그녀의 입가에 기름을 뜬 수저를 내밀었다.
유경이 떠먹여주는 기름 한 수저를 받아먹은 병자가 눈가를 찡그렸다.
목이 부어서 뭔가를 삼키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오늘은 몸이 좀 어떠세요? 제 보기에는 어제보다는 한결 나은 듯 합니다만...”
“괜찮아. 이러다가 죽겠지. 너무 신경 쓰지 마. 다 늙고 병들어 죽을 날 기다리는 나보다는 자네나 몸을 챙기게. 괜히 나쁜 병이 옮아서 앞날이 창창한 자네 같은 젊은 기생이 인생을 망치면 쓰겠는가.”
“저는...기생짓을 그만둬야 할까 봐요.”
유경이 씁쓸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내내 마음에 담고 있는 말이었지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것이었다.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그녀만의 고민을 이 죽어가는 선배에게는 털어 놓을 수 있었다.
그녀가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일 것이다.
그녀의 죽음과 함께 유경의 넋두리도 묻혀버릴 것이기에 마음 놓고 속에 있는 말을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기생이 그만둔다고 기생이 아닌가...”
“부끄러운 말이지만 머리를 올린 이후로 찾아주는 분이 한분도 없으셔요. 이제는 잔치 자리에도 불러주지 않고...이러다가 굶어죽을 것 같기도 하고...굶어죽기 싫으면 들병이라도 되어야겠지요...”
들병이는 장터 같은 곳에 앉아 있다가 아무 사내라도 원하면 따라가서 치마를 들추고 원하는 대로 몸을 내주는 그런 싸구려 창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처음부터 제가 기생이 될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어요. 전 다른 동기들처럼 얼굴이 어여쁘지도 않고, 말주변이 있는 것도 아니고...재주는 더더욱이나 없으니 머리를 올려준 분이 있다는 사실이 신기할 뿐이지요. 그리고 이런 저라서, 제 머리를 올려주신 그 분도 아마 다시 저를 찾지 않으시는 거라고 생각해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으니...하늘은 왜 저 같은 쓸모없는 년은 그냥 두시고 선배님이나 다른 분들을 먼저 데려가시려 하는 걸까요...데려가시려면 저처럼 쓸모없는 년이나 먼저 데려가시지...”
눈물 섞인 한숨을 한번 내쉰 유경이 병자를 다시 침요에 눕혀준다.
이불을 덮어주는 유경을 바라보던 병자가 조용히 그 거칠어진 입을 열었다.
“왜 기생이 되었나?”
“네?”
병자의 물음에 유경이 눈가의 눈물을 닦으며 그녀를 내려다봤다.
“왜 기생이 되었냐고 물었어. 어미가 팔았나? 아니면...”
“어머니는 기억에 없어요. 제가 아주 어렸을 때 얼어 죽었다고 들었을 뿐...”
“저런...”
“어머니가 얼어 죽고 제가 맡겨진 곳이 기방이었어요. 그곳에서 먹고 자고 키워주셨어요. 그 은혜를 갚을 길은 기생이 되는 길 외에는 없었어요.”
“이보게, 기생은...”
말을 하려다 말고 병자가 잠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런 그녀의 입가로 유경이 물을 한 수저 떠 넘겨준다.
물로 목을 축인 병자가 다시 유경을 쳐다봤다.
“나도 수십년 기생 노릇을 하다 보니 깨달은 것이 하나 있는데...기생은 누구 좋으라고 하는 일이 아니라네. 내가 좋아서 해야지 남을 위해 할 짓이 못된다네. 세상사 모든 일이 그렇겠지만 기생짓은 더 그렇다네. 돈을 벌기 위해서든, 은혜를 갚기 위해서든 바라는 것이 있어서 기생짓을 하려한다면 기생짓 만큼 어렵고 비참하고 수치스러운 일이 없지. 만약 벌어먹고 살기 위해 기생이 되려는 이들이 있다면 난 그들에게 차라리 거렁뱅이가 되라고 할 걸세, 먹고 살기 위해서라면 거렁뱅이가 기생보다는 나을 것이니...”
병자가 유경의 손을 살며시 잡았다.
열이 올라 뜨거운 손이었다.
“사람들이 꽃을 찾는 이유는 행복해지고 싶어서지. 꽃을 보며 위안을 얻고 꽃을 보며 기쁨을 얻고...그래서 꽃은 언제나 웃고 있어야 해. 언제나 꽃잎을 활짝 피고 웃고 있어야 해. 움츠린 꽃은 누구도 반기지 않으니까. 꽃잎이 움츠러져 있으면 나비가 찾지 않아. 왜 양반들이 자네를 찾지 않는지 자네는 그것부터 알아야 해. 인물은 상관없어. 재주도 상관없어. 인물이 없고 재주가 없는 기생은 많아. 하지만 자네처럼 스스로 비관해서 주눅 들어 있는 기생은 없지. 주눅 들어 있는 기생을 찾는 사내는 없어. 보고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보고 기분이 나빠지면 왜 굳이 기생을 찾겠는가. 사내를 두려워하는 기생도 없어. 사내를 두려워하면 기생이 될 수 없네. 기생은 사내를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사내를 품을 줄 알아야 하는 법이야. 어떤 사내든, 세상 모든 사내를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품을 줄 알아야 비로소 기생이지. 그리고 자신을 반기는 기생은 반드시 사내가 찾게 되어 있고. 자네 스스로 자네가 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해. 꽃은 그 자체만으로 이미 아름다운 것이라네. 어떤 꽃이라해도 나비도, 벌도 찾아들기 마련이고, 꽃은 나비도 벌도 가리지 않고 꽃잎을 활짝 여는 법. 자네가 나비든 벌이든 가리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마음으로 사내를 품을 준비가 되면 사내들이 알아서 자네 품에 뛰어들걸세. 그걸 기억하게나. 왜 기생이 되려 하는가. 화려함이 좋아서? 돈이 좋아서? 아닐세. 세상 모든 사내를 품을 치마폭은 기생의 치마폭 외에는 없어서 기생이 되는 거라네. 기생은 어떤 사내도 그 치마폭에 감쌀 수 있지. 그래서 좋은 거야. 세상을 움직이는 사내들에게 쉴 수 있는 품을 주는 것도, 서로 죽고 죽이는 사내들에게 안식처를 주는 것도 기생의 치마폭이라면, 사내에게 짓밟히는 것이 아니라 사내를 품는 것이 기생이라면 해 볼만 하지 않은가? 어차피 한번 피고 지는 꽃이라면, 사내라는 바람에 지는 기생이라는 꽃도 나쁘지는 않아.”
오랜만에 말을 많이 한 것이 부담스러웠는지 병자가 길게 한숨을 내쉬며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 얼굴에는 은은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예쁘지 않아도 꽃은 꽃이네...”
병자의 말을 들으며 유경이 그녀에게 먹이려 했던 약그릇을 잡은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 왜 기생이 되려 하는가...
병자의 목소리가 그녀의 귀에 맴돌고 있었다.
- 사내를 두려워해서 주눅 들어 있는, 겁 먹고 있는 기생을 찾는 사내는 없어...
유경 자신을 정확하게 찌르고 있는 말이었다.
사내를 두려워하는 기생. 그것이 바로 유경 자신이었다.
사내를 치마폭에 감싸야 하는 자신이 사내를 두려워하고 있는 것이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꽃.
병자의 말이 모두 옳았다.
스스로를 부끄러워하여 잎을 움츠린 꽃을 찾아오는 나비는 없다.
결국 사내들이 그녀를 찾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사내가 찾지 않는 숨은 꽃이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예쁘지 않다는 말로, 재주가 없다는 말로 스스로를 구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말로 두려움에서, 사내에게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기생이 되어야 한다 말하며 기생의 길에서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약 다 드시면 미음을 올릴게요, 선배님...”
유경이 약그릇에 수저를 넣었다.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더 늦어버리기 전에 이렇게 좋은 선배를 만나 다행이라고 그녀가 생각했다.
*
그 집의 병자가 갑자기 나빠진 것은 다음날 새벽이었다.
아궁이에 장작을 넣으려던 유경이 방 안에서 들려오는 기침 소리에 문을 열자 그 안에서 병자가 가쁜 호흡을 내쉬고 있었던 것이다.
“선배님!”
방으로 뛰어 들어간 유경이 병자의 손을 잡았다.
그녀의 손에서 온기가 식어가고 있었다.
그 얼굴에 이미 죽음의 기운이 퍼져가는 중이었다.
“한양...으로 가게나...”
가쁜 숨을 겨우 몰아쉬며 병자가 유경을 향해 끊어질 듯한 목소리를 냈다.
“선배님, 제가 약을...”
“한양으로 가서...삼짓 나루...삼짓 나루...우..우시영 나으리를 찾아서...”
“선배님...!”
“우...시영 나으리네...그 분께...가게나...자넬...꽃으로...만들어주실 것이니...”
그 말을 끝으로 병자가 왈칵, 붉은 피를 입으로 토해냈다.
우경의 저고리가 병자의 붉은 피로 젖어들어갔다.
하지만 손이, 저고리가 젖는 것도 모른 채로 유경이 병자의 손을 쥐고 그녀의 몸을 흔들었다.
그러나 아무리 흔들어도 이미 혼이 떠난 몸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군불을 지핀 방안은 이렇게나 따뜻한데 혼이 떠난 늙은 기생의 몸은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