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 회: 겨울 -->
“할멈, 뭐 하시오?”
마당에서 비질을 하다 말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할멈을 향해 유경이 넌지시 말을 걸었다.
요즘 들어 할멈이 저렇게 하늘을 올려다보는 일이 많아진 것이다.
“올 해는 유난히 눈이 적구만요.”
하늘을 올려다보던 할멈이 유경을 돌아봤다.
“날씨도 유난하게 따뜻하고...”
“춥지 않으면 좋지 뭘 그러오. 날이 추우면 사람 살기가 여간 힘들지 않겠소.”
유경의 말에 할멈이 작게 혀를 찼다.
“쯧쯧. 추울 때는 추워야 하고 더울 때는 더워야 하는 것이 하늘의 이치인데, 이렇게 따뜻한 겨울을 나면 꼭 사달이 나게 마련인데...”
다시 비질을 하는 할멈의 눈에 불안감이 어른거린다.
오랜 시간을 살아오며 몸으로 많은 것을 익힌 할멈이었다.
감추지 못하는 불안감을 쓸어내려는 듯 할멈이 마당 끝까지 눈을 쓸고 또 쓸었다.
그 불안감이 현실로 닥쳐온 것은 그로부터 약 보름 뒤였다.
*
돌림병이 돌기 시작했다.
유난히도 따뜻한 날씨가 원인이라고 나이 많은 노인들은 말했다.
한번 돌기 시작한 돌림병은 마치 마른 가지에 불이 붙듯이 송도 전체로 번져 나갔다.
마을 곳곳에 금줄이 쳐졌지만 금줄로 돌림병을 막을 수는 없었다.
차라리 눈이라도 많이 내리면, 이제라도 동장군이 기승을 부리면 돌림병의 기세가 한풀 꺾이겠지만 무심한 하늘은 눈도 내리지 않았고 매서운 추위도 허락하지 않았다.
이 마을, 저 마을 곳곳에서 매일 죽은 사람을 내가는 거적들만이 수레에 실려 나왔다.
나이 많은 노인과 어린 아이들부터 죽어나갔다.
송도 전체에 죽음의 냄새가 들끓고 있었다.
송도 관내의 의원들이 약통을 들고 병자가 있는 마을을 전부 찾아다니며 애를 썼지만 살리는 속도보다는 죽어가는 속도가 더 빨랐다.
손이 부족했다.
의원들을 도와줄 손이 부족했다.
의원들의 옆에서 수건을 짜주고, 약을 지으며, 병자들을 돌보는 일손이 부족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관노들과 관기들이 동원되었다.
하지만 그것으로도 부족해지자 결국에는 기생들이 불려나갔다.
물론 일패 기생들을 제외였다.
이패 기생들도 거의 제외되었다.
삼패 기생들이나 이패 기생 중에서 하급으로 취급받는 기생들이 그 자리로 불려나갔다.
그리고 그 자리에 유경도 끼어 있었다.
*
“이것 좀 저 쪽에 가서 태워주시게.”
수건으로 입을 가린 의원이 내미는 천 조각을 받아든 유경이 마당 한 켠으로 걸어갔다.
이미 그곳에 피 묻은 천 조각이 수북 쌓여 있었다.
유경 역시 수건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돌림병은 숨결과 숨결로 전염된다고 하기에 꼭 수건으로 입을 가리라고 의원들이 미리 충고해줬기 때문이다.
의원들은 자신들을 도우러 온 관노, 관기, 기생들에게 젊고 건강한 사람은 쉽게 병에 걸리지 않는다는 말로 안심을 시켜주었었다.
그 말이 맞는 것인지 돌림병이 도는 이 마을에 온지 사흘이 지났어도 누구 하나 병에 걸리는 사람은 없었다.
마을에서 죽어나가는 사람들도 거의 노인과 아이들이었다.
젊거나 건강한 사람들은 병에 걸려도 며칠 앓다가 회복되는 것을 유경도 종종 볼 수 있었다.
“하아...”
천 조각에 불을 놓고 그것이 타오르는 것을 보며 유경이 한숨을 쉬었다.
사람 목숨이 하잘 것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지만 너무 쉽게 생명이 꺼지는 것을 눈앞에서 수없이 봤기 때문이다.
“거기, 자네. 저 집에 있는 환자 좀 봐주겠나?”
천이 잘 타게 불쏘시개로 불길을 휘이 휘이 젓고 있는 유경을 뒤에서 의원 한명이 불렀다.
“네, 알겠습니다.”
의원이 가리키는 건너집 초가로 걸어간 유경이 닫혀있는 문을 조심스럽게 열었다.
어두컴컴한 방안에서 퀴퀴한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잠시 들어가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유경이 방 안으로 들어섰다.
방안은 온통 썩은 내가 진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썩은 내의 원인인 병자가 아랫목에 누워서 신음하고 있는 것이 그녀의 눈에 들어왔다.
“무...”
누가 들어서는 기척을 느꼈는지 누워서 신음하고 있던 병자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물 드릴까요?”
의원이 직접 병자에게 오지 않고 그녀를 보냈다는 것은 이 병자가 살아날 가망성이 없다는 것을 뜻했다.
살리지 못할 것이니 기다리고 있다가 그 주검을 수습해서 수레에 실을 준비를 하라는 것이었다.
유경이 얼른 밖으로 나가서 물을 한 대접 떠와 그 병자의 머리 맡에 앉았다.
그리고 손으로 병자의 머리를 들어서 물을 마실 수 있게 해준다.
“으...”
물을 한모금 마시자 정신이 돌아오는 듯 병자가 누운 채로 유경을 쳐다봤다.
아직 완전히 빛을 잃지 않은 그 초췌한 얼굴에 유경이 슬며시 물어본다.
“정신이 좀 드세요?”
“고, 고맙소...”
병자가 간신히 그 말을 짜내었다.
병자는 오십이 넘어 보이는 여인이었다.
혼자 살고 있는 듯 세간 살이에 남자의 물건은 보이지 않았다.
벽에 기대어진 가야금과 장구에 유경의 눈길이 잠시 멎었다.
보통 여념집에 가야금과 장구를 가져다 놓지는 않는다.
“선배님이신 듯 하오니 후배에게 말을 놓으셔요.”
유경의 다소곳한 대답에 병자가 힘없는 눈을 감았다 떴다.
그 바짝 말라 갈라진 입술이 다시 열렸다.
“기...생...이오..?”
힘겹게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유경의 가슴을 저리게 만들었다.
이 여인도 기생이었던 것이다.
이제는 물러난 퇴물이겠지만 한때 기생이었던 여인이라는 걸 깨달은 유경이 가슴이 아파왔다.
아무도 돌봐주지 않는 이런 곳에서 혼자 병에 걸려 죽어가는 이 모습이 훗날의 자신의 모습이 아니라고 누가 장담할 수 있겠는가.
“네, 선배님. 할 줄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지만...기생입니다.”
유경의 그녀의 땀이 맺히는 이마를 물에 적신 수건으로 닦아준다.
약도 쓸 수 없고, 더 이상 무엇 하나 해줄 수 없지만 몸의 열을 식혀준다던가 하는 일은 해줄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유경이 생각했다.
“기생...할 줄 아는 것이 없으면 어때서...그래도 기생은 기생인 것을...”
병자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가에 흐릿한 그리움이 담겨지고 있었다.
“어떻게 피어도...기생은 기생인 것을...”
그녀의 바짝 마른 입술도 물수건으로 닦아주며 유경이 조용히 대답한다.
“저는...기생 실격입니다...”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하던 괴로움이었다.
지난 몇 개월 동안 그녀를 괴롭혀온 자책감.
자신은 기생으로서 실격이라는 이 자괴감.
누굴 붙들고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지금 죽어가는 이 병자, 전에 기생이었던 이 병자에게밖에는 하소연 할 곳도 없는 유경이 눈물 젖은 한숨과 함께 다시 한번 중얼거렸다.
“기생이라는 이름도 아까울 정도로...”
괴로움을 섞어 중얼거리는 그녀의 손에 병자의 손이 올려졌다.
열이 섞여서 뜨거운 그 손이 유경의 손을 어루만지고 있었다.
“기생은 자격이라는 게 없다네...그러니 실망하지 말게나...”
그 주름진 손 위로 유경의 뜨거운 눈물이 뚝, 뚝 떨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