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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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리 위로 떨어지는 가벼운 눈송이를 맞으며 추영이 어딘가를 쳐다봤다.

조금 전 떠나온 강가였다.

그 강변에 자신이 마련해준 집에서 홀로 살고 있는 한 어린 기생을 떠올리며 추영이 무거운 마음을 지우지 못했다.

‘어쩌면 그렇게 미숙할까...’

흔히 볼 수 있는 기생으로서의 영민함은 찾아볼 수 없는 그 아이가 추영 자신이 머리를 올려준 기생이었다.

간드러지는 애교도, 사내의 마음을 움직이는 말솜씨도 없으니 찾아줄 양반이 있을 리 만무하다는 것은 추영도 알고 있었다.

유경과 첫날밤을 지내던 그 날밤, 사내의 몸 앞에서 얼어붙은 듯 떨고 있던 그 아이를 안으며 직감했던 일이었다.

태생적으로 기생이 되어서는 안되는 아이라는 것을, 절대로 기생과는 어울리지 않는 아이라는 것을 느꼈지만 추영이 해줄 수 있는 전부는 그 아이의 머리를 올려주고 살 집을 마련해주는 것 뿐이었다.

‘어쩌면 그리도 재주가 없어...’

어차피 다시 보지 않을 사이, 얼굴을 보여주면 무엇하랴는 생각으로 돌아섰지만 그래도 그동안 보고 배운 것이 기생질이라면 못해도 자기 입에 풀칠은 하고 살 줄 알고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친하게 지내는 친구가 송도에 볼 일이 있다 하여 같이 동행하는 길이 아니었다면 언제까지나 그렇게 믿고 살아갈 뻔 했었다.

동행한 친구가 잠시 볼 일을 보고 오는 사이에 문득 그 아이, 유경이 떠오른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송도에 발걸음을 할 때부터 머릿속에 살며시 떠오르던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그저 어떻게 사는가 확인만 할 요량이었다.

하지만 주변에 사는 이들에게서 그 집 어린 기생은 찾아주는 양반도 없고 잔치 자리에도 불려가지 못해 세간이며 옷들이며 이것 저것들을 팔아서 겨우 연명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는 기가 막혔었다.

겨우 그렇게 살라고 머리를 올려준 것은 아니었다.

‘얼굴도 예쁘지 않은 것이 어떻게 기생 노릇을 해먹겠다고...차라리 머리를 올리지 말고 여념집에 시집이나 갔으면 이렇게 살지는 않았을 것을...’

그녀가 왜 기생이 되었는지는 추영도 알지 못한다.

어떤 사연이 있어서 재주도 없고 어울리지도 않는 기생이 되려 했는지는 추영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딱해지는 것이다.

차라리 어느 농군에게 시집갔으면 저렇게 초라하게 살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다못해 봇짐 장수에게 시집을 갔었더라도 저 꼴은 면했을 것이다.

추영이 새끼 손가락에 끼워진 가락지를 내려다봤다.

그날 이후로 한번도 빼지 않은 가락지였다.

‘이쁘지도 않은 것이...앞으로 어찌 기생 노릇을 하려고...’

그랬다.

정말 그랬다.

차라리 예쁘기라도 했다면 어느 양반댁 소실로 들어가게 주선이라도 하겠지만 이쁘지도 않은 것이라 누구에게 주선해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그만그만한 얼굴의 기생을 누가 소실로 데려갈 것인가.

‘봄에 다시 와서 기적에서 빼줘야 하는 걸까...’

기적에서 이름을 빼고 다시 여념집 아녀자로 돌아가 어느 참한 사내의 아내로 살게 하는 편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추영이 날짜를 곱씹어 본다.

내년 춘삼월이 되려면 앞으로 다섯달은 더 지나야 한다.

그때까지는 가져다준 쌀섬과 땔감으로 어찌 어찌 살기는 할 것이다.

추영이 문득 뭔가가 생각났는지 품 안에서 낡은 천을 꺼내본다.

피가 얼룩져 있는 그 낡은 천은 그때, 유경과 처음 만난 날, 꽃잎이 눈처럼 흩날리던 그날 밤, 유경이 자신의 속치마를 찢어 상처를 싸매준, 그 찢어낸 속치마였다.

그 때 상처를 싸매준 피 묻은 낡은 천을 아직도 버리지 않고 있었다.

아마 평생을 두고 버리기는 어려울 것이다.

‘마음씨만 착해서 어찌 살려고...’

착한 사람들은 세상 살기가 힘들다는 것을 추영은 알고 있었다.

착해서는 세상에서 살아남기가 힘이 든다.

그래서 적당히 교활하고 적당히 악해야 하는 것이다.

자신의 부친처럼 겉으로는 선한 척 가면을 쓰고 뒤로는 악한 짓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어야 세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것이다.

그날밤, 그 여자 아이는 착했다.

어둠 속에서 쓰러진 낯선 사내를 보고 지나치지 않을 만큼 착했다.

자신의 속치마를 찢어 상처를 싸매줄 만큼 착했다.

착한 사람이 세상에서 살아남는 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착한 사람은 마음에 깊이 새겨진다.

그 사람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비참해질지라도 착한 사람은 마음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는 법이다.

비록 누군가의 마음에 새겨졌다고 한들 그 사람에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지라도...

그 여자 아이는 착했다.

첫날밤을 보내고 매정하게 떠나려는 남자의 손에 가락지를 쥐어줄 만큼 착했다.

착해서...마음이 아픈 것이다.

그 어리숙한 착함에 마음이 이렇게나 아픈 것이다.

“11월에 눈일세. 올 겨울은 이렇게 빠르다니...”

누군가의 목소리에 추영이 상념에서 깨어났다.

넓은 갓을 쓴 남자가 어느새 추영의 앞까지 와 있었다.

송도 길에 동행한 추영의 벗이었다.

송도 어느 이름난 기생을 꼭 만나야 한다며 세월 좋게 풍류 여행을 온 친구이기도 했다.

“그래. 만나고 싶다던 기생은 만나 보았나?”

추영이 웃으며 벗을 올려다봤다.

“못 만났네. 콧대가 얼마나 높은지 종실의 어른이 아니면 상종도 아니한다 소문이 났으니 어련할까. 그 고고한 얼굴이 어떻게 생겼나 확인 한번 해보려 했더니...덕분에 송도 구경 한번 잘했지.”

“하여간에 수윤이 자네도 참 대단하네. 소문난 기생 얼굴 한번 보려고 한양서 송도까지 라니...”

“사내에게서 풍류를 빼면 무엇이 남겠나. 어차피 한번 피고 지는 세상, 마음껏 풍류나 즐기고 가야 하지 않겠나?”

눈웃음이 시원한 이 남자의 이름은 단수윤.

입고 있는 옥빛 도포가 그 시원한 눈매가 잘 어울려서 한양 사람들의 입에 ‘버들잎 선비’라고 불리는 남자였다.

과거에는 관심도 없고, 벼슬에는 더더욱 관심이 없고, 오직 벗들과 어울리며 시를 짓고, 술을 마시고, 경치 좋은 곳을 다니며 그림을 그리는 것을, 거기에 더하여 기생들의 치마폭에 그림을 그리는 것을 좋아하는 한량 선비라는 것을 빗대서 팔자 좋은 ‘버들잎 선비’라고 불리기도 했고, 하늘 하늘 버들잎을 닮았다 ‘버들잎 선비’라고도 불리는 남자였다.

“볼 일 끝났으면 그만 가세. 눈이 내리는 걸 보니 서두르지 않으면 산길이 어렵겠어.”

“송도에 미색이 많다하니 떠나는 발걸음이 아쉽지만, 내가 가지 않으면 한양 기생들의 옷고름에 눈물이 마르지 않을 것이니, 가야지. 암, 가고 말고.”

허튼 소리를 내뱉는 이 남자가 밉게 보이지 않는 것은 그 목소리가 다정할뿐더러 그 눈웃음이 다정하기 때문일 것이다.

단수윤, 이추영.

서로를 둘도 없는 벗이라 여기는 이 두 남자가 그렇게 송도를 떠나고 있었다.

11월. 송도에 첫눈이 내리던 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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