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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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경이 펼쳐놓은 보자기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보자기 안에 곱게 개어진 비단 저고리와 치마가 그녀의 눈안에 담겨진다.

머리를 올려준 이추영이라는 교위 양반이 마련해준 옷이었다.

이 집과 그녀의 옷들은 모두 그 남자가 마련해준 것이다

소중히 여겼다.

얼굴도 모르는 그 남자 대신으로 생각하고 소중히 여긴 옷이다.

그런데 이제 이것을 팔아야 하는 것이다.

기생으로 입문한 지 벌써 8개월이나 지났다.

처음 머리를 올리던 그때는 꽃잎이 눈바람처럼 담겨지던 춘삼월이었지만 지금은 곧 진짜 눈이 내릴 것 같은 11월의 초입새.

날도 추워지고 서리가 엊그제 내렸다.

이젠 얇은 여름 저고리는 문갑에 넣어두고 두터운 솜을 누빈 저고리를 마련해야 하는 계절이지만 솜을 누빈 저고리를 마련할 형편이 되지 않는 유경은 아직도 여름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이제 곧 겨울이건만 부엌 아궁이 옆 쌀 단지에는 쌀이 떨어져간다고 할멈이 넌지시 귀뜸을 해주었다.

쌀만 떨어지는가.

땔감 나무도 들여놓아야 하고 이것저것 월동 준비를 해놓아야 하건만 유경이 가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아무것도 없이 겨울을 나는 것을 얼어 죽기 이전에 굶어죽을 수도 있다는 뜻이다.

지난 3월부터 지금까지 유경을 찾아주는 손님은 없었다.

아니, 청연루 잔치 자리에 나가도 그녀와의 합방을 원하는 손님이 없었다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제는 쳥연루에서도 그녀가 잔치 자리에 나오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 눈치였다.

기방에서 불러주지 않으면 기생 스스로 자기 손님을 끌어 들여야 하지만 유경에게는 그런 손님도 없었다.

그나마 그녀를 챙겨주던 청연루 행수 추월이 지난 6월 한양으로 떠난 다음부터 유경은 혼자가 되어 버렸다.

추월이 떠나고 그 다음달, 청연루에서 청지기로 일하던 유씨와 강씨도 다른 곳으로 떠났다.

나중에 행여나 산호가 이곳으로 찾아오면 알려주라고 이사 가는 곳 지리만 알려주고 떠난 것이다.

그렇게 유경은 혼자가 되었다.

정말 혼자가 되었다.

추운 겨울을 앞두고 혼자 차가운 바람 앞에 내동댕이 쳐진 것이다.

그녀가 지금 할 수 있는 것은 하나 밖에 없었다.

가지고 있는 것을 파는 것.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은 이추영이라는 양반이 해주었던 세간과 옷가지, 그리고 패물 뿐이었다.

처음에는 패물을 팔고, 그 다음으로는 세간을 팔고, 마지막으로 옷을 팔게 된 것이다.

기생이 잔치 자리에 입고 나갈 옷이 없으면 그것이 진짜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옷은 가장 마지막으로 미루어 두었었다.

그러나 지금, 한 벌 옷만 남겨두고 나머지 옷을 다 팔아버리려는 생각을 하는 것은, 이제 더 이상 팔 패물도, 세간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옷들을 팔아 사는 양식까지 다 먹어버리고 나면...

“하아...”

유경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입술에서 뽀얀 입김이 흘러나왔다.

땔나무가 없어 불을 때지 못한 차가운 방이 그녀의 입에서 입김이 나오게 만들었다.

그 양식을 다 먹을 동안에도 잔치 자리에 불려나가지 못하게 되면, 합방을 할 손님이 없으면 그녀에게 남은 길은 한 가지 뿐이다.

죽기보다 싫지만 한 가지 길 외에는 없는 것이다.

나루터에 나가 뜨내기 보따리상이나 뱃군들, 그리고 물장수 같은 사내들에게 몸을 팔아야 하는 것이다.

그리고 한번 그렇게 싸구려로 몸을 팔고 나면 더 이상 기생 취급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다.

동기 기생들도 그녀를 멸시하게 될 것이고 그녀는 기생이 아니라 창부로 전락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저 치마 자락만 들추고 이 남자 저 남자 가리지 않고 받아내는 창부.

그것만은 될 수 없었다.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그렇게 될 수는 없었다.

유경이 보자기에 담아놓은 옷가지를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미련이 남은 손 끝으로 보자기를 묶는다.

“할멈. 밖에 있소?”

유경이 문을 손으로 밀며 할멈을 넌지시 불렀다.

그런데 불러도 할멈이 대답이 없다.

“할멈?”

문을 조금 더 열어서 밖으로 몸을 내밀자 유경의 눈에 부엌 입구에 쪼그려 앉은 할멈의 뒷모습이 들어왔다.

“할멈, 거기서 뭐 하시오?”

아무리 말을 해도 대답이 없자 유경이 댓돌에 벗어둔 짚신을 신고 방을 나섰다.

“대체 뭘 하기에 사람이 불러도 대답을...”

할멈의 어깨를 손으로 누르려던 유경이 그 자리에 멈춰 섰다.

그리고 그만 입을 벌리고 말았다.

“이게 대체...”

그제야 할멈이 유경을 올려다봤다.

할멈의 눈에도 놀라움이 가득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할멈?”

텅 비어있던 부엌 안에 쌀섬이 가득 쌓인 것이 유경의 눈에 들어왔다.

쌀섬만 쌓인 것이 아니라 부엌에 이어져 있는 헛간에 땔감까지 가득 쌓여 있었다.

대체 누가 가져다 놓은 것인지 알 수가 없어서 유경이 할멈을 내려다봤다.

“나도 모르니까 이러고 있지 않소. 어느 양반이 먼 발치서 보고 홀딱 반해서 몰래 가져다 놓았나? 아니지. 그런 양반이 있으면 왜 지금까지 부르지 않았겠어? 나원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

“그래도 누가 갖다 놨어도 이번 겨울은 넉넉히 나겠소. 겨울 넉넉히 나고도 남을 양식이니 그 옷 가져다 팔지 않아도 될 것이오.”

할멈의 주름진 얼굴에 베시시 웃음이 피어났다.

이제 겨울 날 걱정이 사라진 것이다.

눈앞에 기적처럼 일어난 장면을 보며 유경이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이렇게 해줄 만한 사람은 알지 못하기 때문이었다.

‘혹시...오라버니께서...’

어쩌면 산호가 이렇게 했을지도 모른다고 유경이 잠시 생각했지만 이내 생각을 지웠다.

산호가 이곳을 떠난 지 겨우 몇 개월. 이렇게 많은 쌀섬과 땔감을 살 돈을 마련할 돈을 벌었을 리는 없다.

‘그렇다면 누가...’

그때 문득, 한 명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이내 유경이 고개를 저었다.

절대 그럴 리가 없었다.

얼굴도 보여주지 않고 그렇게 차갑게 떠나버린 그 남자일 리가 없다.

하지만 누구인지는 몰라도 반가웠다.

고마웠다.

‘고맙...습니다...’

유경이 마음으로 알지 못하는 누군가에게 깊이 감사해본다.

누군가 자신을 보이지 않는 곳에서 도와주고 있다는 사실이, 자신이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자신을 염려하고 있다는 사실이 이렇게나 가슴을 따뜻하게 만들고 있었다.

“전해 주었느냐?”

“네, 나으리.”

“그러면 그만 돌아가자.”

천천히 말을 돌리는 남자의 뒤를 하인이 얼른 뒤따른다.

주인의 명령으로 강가에 사는 기생의 집에 쌀섬과 땔감을 갖다 놓고 온 하인이었다.

주인과 그 기생이 어떤 사이인지는 몰라도 따로 물어볼 생각은 들지 않았다.

주인이 생각없이 이런 일을 할 리가 없는 것이다.

‘잘 살 줄 알았더니...하여간에 기생에 어울리지 않는 아이라니까...’

말을 몰고 천천히 앞으로 나가며 추영이 살며시 눈을 감았다 뜬다.

기생이라고는 믿어지지 않는 그 어리숙한 계집 아이의 얼굴을 한번 떠올렸다가 이내 지워버리는 추영의 얼굴 위로 하얀 눈 한송이가 떨어지고 있었다.

그 아이를 처음 만났을 때는 꽃잎이 눈송이처럼 흩날리더니 이제 진짜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봄이 되면 다시 한번 찾아와서 아직도 그렇게 살고 있으면 차라리 기적에서 빼주는 것이 나으려나...’

한번 맺은 인연을 잊어버리는 것이 이렇게 어려운 것이라는 걸 추영이 이제야 느끼는 참이었다.

오랜만에 들러본 송도에서 떠나기 직전, 그 얼굴이 떠올랐으니 말이다.

그 얼굴이 떠올라 어떻게 사는 지 궁금하여 차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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