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회: 초야 -->
“추영이 안에 있느냐?”
밖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읽고 있던 서책을 덮은 추영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네, 숙부님.”
추영이 미처 자리에서 다 일어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며 그의 숙부인 이좌랑이 들어섰다.
벼슬에 큰 욕심이 없어서 집안에서 밀어주는 벼슬들을 다 거절하고 지금의 벼슬인 홍문관 좌랑에 만족하며 있는 숙부에게 추영이 상석을 내어주고 그 앞에 앉는다.
“몸은 좀 어떠하냐?”
이틀 전 자신을 만나러 오던 추영이 산길에서 굴러 다친 상처를 말하는 것이다.
약속한 시간에 늦는 성격이 아닌데 이상하게 늦는다 싶더니 옷이 찢어지고 얼굴과 팔다리에 상처를 입고 자신의 별저로 찾아온 추영을 보고 깜짝 놀란 이좌랑이었다.
처음에는 산적이라도 만났는가 싶었지만 산적 정도에 다칠 추영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자초지종을 물으니 산길에서 굴렀다며 칭피해 하며 대답한 추영이었다.
그날 급하게 의관을 바꾸어 입고 얼굴의 상처에만 대충 약을 발라놓았기에 이틀 지난 지금 혹시 몸이 불편한 곳은 없는지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추영은 이좌랑의 형님의 아들, 즉 조카가 되는 사이다.
한성부 판윤으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권세를 자랑하는 한성부 판윤의 하나 밖에 없는 독자가 산길에서 굴러서 많이 다치기라도 했으면 형님을 볼 낯이 없는 것이다.
가뜩이나 한성에서 바쁜 추영이 이곳까지 온 것은 한성을 오래도록 비우고 돌아가지 않고 있는 자신을 데려가기 위해 형님이 보낸 것이다.
자기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데 자기 때문에 다치기라도 하면 그야말로 낭패다 싶어 이좌랑이 추영에게 다시금 다친 곳이 없냐고 물어본다.
“별다르게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심려 놓으십시오.”
이좌랑을 안심시키기 위해 말은 이렇게 하지만 사실 아무렇지 않은 정도는 아니다.
그 일을 당했을 때는 혼절까지 할 정도였었다.
아직 도포 안의 가슴에는 상처가 남아 있는 것이다.
팔 다리 여기저기에 멍이 들어 있고 그 중에는 아직도 피가 고인 상처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불편한 내색을 하면 숙부에게 폐를 끼친다는 생각에 추영이 아무렇지 않은 척 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여기서 지낼만 한 것이냐?”
한성과는 모든 것이 다를 것이라고 이좌랑이 생각했다.
한성에는 없는 여유로움이 있지만 반대로 한성에 비하면 모든 것이 단조롭고 불편한 곳이기도 할 거라는 생각에서였다.
“지내기에는 부족함이 없지만 하루라도 빨리 숙부님을 모시고 상경하라는 아버님의 당부가 생각나서 마음이 편하지는 않습니다.”
추영의 그 말 이면에는 빨리 이곳 생활을 청산하고 한성으로 돌아가자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나도 이제 슬슬 한성으로 돌아갈 생각이지만, 같이 데리고 갈 식구가 있어서 준비가 늦어질 듯 한데, 내 준비가 늦어지면 너도 늦어질 텐데 그리 오래 한성을 비워도 되겠느냐?”
“데려갈 식구라면...”
“엊그제 보았던 그 아이 말이다. 청연루에 추월이라고...”
“기생을 들어 앉히실 생각이십니까?”
추영이 의외라는 듯 이좌랑을 바라봤다.
숙부인 이좌랑이 상처한 지 벌써 5년이 지났지만 아직 재가를 하지 않고 있었다.
5년 동안 혼자였던 이좌랑이 지금에서야 첩실로 기생을 들어 앉히겠다는 말에 추영이 살짝 놀라는 표정을 짓는다.
항상 반듯한 선비의 모습을 보여주었던 숙부가 가까이 하는 기생이 있다는 사실에 놀랐었고, 지금은 그 기생을 아예 첩실로 들이려는 생각에 놀란 것이다.
“추월이 그 아이가 기생이긴 하지만 마음씨도 곱고 생각도 깊어서 나무랄 데가 없는 아이다. 네 숙모를 그리 보내고 한참 동안 허전하던 내 마음이 그 아이 때문에 많이 위로 받았단다. 이제 그 아이도 나이가 나이라서 기생 노릇을 언제까지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해서 이번차에 내가 그 아이를 데리고 한성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그래서 준비가 길어지는 것을 형님께서 못 참으시고 널 보내셨구나.”
“...”
“어찌하겠느냐? 내 준비가 끝날 때까지 기다리겠느냐? 아니면 먼저 돌아가겠느냐?”
“그 준비라는 것이 얼마나 걸릴 듯 하옵니까?”
“못 잡아도 한달은 잡아야지. 이곳 집도 처분을 해야 하고 말이다.”
“그러면 제가 먼저 돌아가야겠습니다. 제가 먼저 돌아가서 아버님께 숙부님의 소식을 알려드려야 아버님도 놀람이 덜하시지 않겠습니까?”
그 말에 이좌랑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말이 맞는 것이다.
한성을 오래 떠나있던 동생이 어느날 돌아왔는데 기생 첩을 데리고 돌아왔다고 하면 분명히 형님이 놀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차라리 추영이 먼저 가서 귀뜸을 해놓는 것이 나은 것이다.
“그래, 넌 마음이 어떻느냐?”
“네?”
무엇을 묻는 것인지 몰라서 추영이 이좌랑을 빤히 쳐다봤다.
“무엇을...”
“내일 그 청연루 새끼 기생의 머리를 올려주기로 하지 않았느냐. 새끼 기생의 머리를 올려주는 기분이 어떠하냐는 뜻이다.”
아직 정실도 들이지 않은 조카였다.
한성부 판윤의 독자에 종 5품 현신교위의 품계를 받았고 나무랄 데 없는 사내다운 외모에 훤칠한 키와 문무를 겸비한 이 청년은 아직까지 혼인을 하지 않고 있었다.
한성의 내노라 하는 가문에서 혼담이 들어왔지만 지금까지 단 한번도 흥미를 보인 적도 없었다.
지금도 물론 이조판서의 독녀와 혼담이 오가고 있다는 소리는 이좌랑도 들어 알고는 있지만 그 혼담이 과연 성사가 될지 안 될지는 모를 일이다.
이미 장가를 가서 자식을 봐도 늦지 않은 나이지만 추영이 왜 지금까지 혼자인지 그 이유는 이좌랑도 알지 못하는 일이었다.
“별다를 것이 있겠습니까? 계집이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니겠습니까. 저는 다만...”
추영이 말을 머뭇거렸다.
그가 굳이 유경의 머리를 올려주려는 것에 다른 이유는 없었다.
첫눈에 반했다던가 하는 그런 유치한 이유는 없었다.
다만 빚을 지기는 싫었을 뿐이다.
혼절한 자신을 도와준 이였다.
물론 도움이 없었어도 곧바로 정신을 차렸겠지만 그래도 도움을 받은 것은 사실.
자신의 속치마까지 찢어서 상처를 싸매둔 이에게 빚을 남기고 싶지 않았다.
청연루의 새끼 기생이라는 말에 한번 찾아가서 옷값이라도 주려고 했는데 우연찮게 그 청연루에서 숙부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정말 우연찮게 건넌방에서 들려오는 추잡한 소리를 듣게 되었다.
목소리와 내뱉는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 윤진사라는 양반이 얼마나 추한 인간인지 알 수 있었다.
적어도 그런 인간에게 처음을 내주게 하기는 싫었다.
밤중에 딱 한번 보았지만 순진해보이기만 하던 그 소녀가 그런 추한 인간에게 짓밟히게 내버려두기는 싫었다.
그래서 빚을 갚는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머리를 올려주기로 한 것 뿐이다.
하지만 이것을 구구절절하게 숙부에게 설명하자니 말이 길어질 것 같아서 추영이 살며시 입을 다물었다.
“뭐,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을 모르는 일이다. 내가 십수년 전에 추월이 머리를 올려줄 때 그 아이를 첩실로 들일 생각이나 했겠느냐. 그런데 세월이 지나고 보니 첫정 만한 것이 없다고 이제 그 아이를 첩실로 들이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란다. 너도 네가 머리를 올려주는 그 아이와 좋은 인연이 되면 좋겠구나.”
보통은 머리를 올려준 사내와 그 기생은 한번 맺은 인연을 계속 이어가기 마련이다.
머리를 올려준 양반이 일생 그 기생의 뒷배가 되어주는 경우도 많았다.
이 경우에는 추영이 아직 정실도 얻지 않은 상태라서 기생의 뒤를 봐주게 되면 말이 나오겠지만 사람의 인연이라는 것은 또 모르는 것이라고 이좌랑이 생각했다.
“머리만 올려주고 다음날 바로 한성으로 떠날 겁니다. 인연은 거기까지가 아니겠습니까?”
이좌랑의 생각을 읽은 듯 추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
기생과의 인연을 끌고 갈 조금의 생각도 그에게는 없는 것이다.
단 하룻밤이면 인연은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그 후는 없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