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 회: 눈바람 -->
“오라버니!”
팔월 가뭄 끝 단비도 이 목소리보다 더 달지는 않을 것이다.
귀에 더없이 달콤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비쩍 말라 비틀어진 땅에 소나기가 쏟아지듯 표정이 밝게 변한 산호가 휙 돌아보자, 아니나 다를까 목소리보다 더 반가운 유경의 얼굴이 들어온다.
“유경이 왔구나.”
아무리 기다려도 유경이 오지 않아서 잔치 자리에 허드레 일로 붙들리기라도 한 건가 조바심을 내고 있던 산호였다.
“가자.”
목적하는 장소는 이곳보다 조금 더 위로 올라가야 하는 곳이다.
하지만 유경이 혼자서는 그곳까지 올라가는 것이 힘들기 때문에 산호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잡아.”
산호가 유경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파른 산길이라 유경이 같은 여자 아이는 누가 손을 잡아줘야 하는 것이다.
“응, 오라버니.”
유경이 산호가 내민 손을 잡자, 산호가 유경을 힘 있게 끌어 올렸다.
유경의 손을 잡고 위로 올라가는 산호의 신경에 내내 자신의 손에 잡혀 있는 유경의 작은 손에 가 있다.
‘작고 여린 손. 한 손 안에 잡히는 작은 손. 이 손으로 어떻게 술을 따른다고...’
가파른 길을 다 올라와서 이제는 손을 놓을 법도 하지만 산호가 한번 잡은 유경의 손을 놓지 않았다.
굳이 유경이도 손을 빼려고 하지 않자 산호가 모른 척 그대로 손을 잡고 걸었다.
조금 더 걸어 잔뜩 군락을 이루고 있는 산죽을 헤치고 그 안으로 들어가자 자그마한 빈터에 바위를 타고 맑은 물이 소리없이 흐르는 샘이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가면 무릎이나 잠길까한 얕은 샘이 얼마나 맑은지 수정같이 아름다워 두 손과 발을 담그기에 딱이었다.
이곳이 유경과 산호의 비밀 장소였다.
어릴 때부터 어른들에게 혼이 나거나 하면 도망 와서 숨는 장소였다.
지금처럼 밤의 어둠이 내리고 하늘에 별이 무수히 반짝이는 날에는, 수정처럼 맑은 샘에 밤하늘의 별이 쏟아지고, 이 작은 샘이 하늘을 담는 작은 찻잔이 되는 것이다.
간혹 바람이라도 불어주면 산죽의 어울림이 노래 소리처럼 들려오는 아름다운 풍경.
별이 담긴 찻잔의 아름다운 풍경.
별이 가장 아름다운 언덕.
별이 내리는 언덕.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유경의 옆모습을 산호가 쳐다봤다.
‘유경아, 내 눈에만 네가 이렇게 예쁘게 보였으면 좋겠다. 다른 사내의 눈에는 네가 조금도 예뻐 보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유경아.”
“응?”
산호가 부르는 소리에 유경이 밤하늘을 올려다보던 눈을 산호에게로 돌렸다.
“선물.”
그 말과 함께 산호가 내민 댕기를 유경이 두 손으로 받아들었다.
“예쁘다...”
예쁘다는 유경의 목소리 안에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예뻐서, 하고 다니지는 못할 것 같아.”
예뻐서 하고 다니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할 기회가 없어지는 것이라는 걸 산호도 알고 있었다.
며칠 후에 머리를 올리면 더 이상 댕기를 매고 다닐 일이 없는 것이다.
그것을 뻔히 알면서도 굳이 댕기를 산 것은, 그녀가 머리를 올리는 것이 싫다는 무언의 저항이었을까.
사실 댕기 옆에 있던 비녀에도 살짝 눈이 갔었지만 자신이 사준 비녀를 꽂고 다른 사내에게 안기는 유경을 보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그래서 댕기를 샀다.
언제까지라도 자신의 유경으로 남아있어 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댕기를 산 것이다.
“유경아.”
“응?”
‘유경아, 나하고 도망칠래?’
그 말이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유경아, 나하고 가시버시 맺자.’
당장이라도 댕기를 들고 있는 저 손을 끌어당겨 품에 안고 가슴 속에 가득 찬 말을 고백하고 싶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수없이 마음으로 되뇌어왔던 말이지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오라버니가 내 오라버니라서 너무 좋아.”
산호가 주저하고 있을 때 유경이 작은 소리로 말했다.
“오라버니가 있어서 얼마나 든든한 지 몰라. 내가 머리를 올려도 오라버니는 항상 내 옆에 있어줄 거지? 오라버니는 유경이의 단 하나 밖에 없는 오라버니니까. 그럴 거지?”
그렇게 말하며 한 점 흔들림도 없이 자신을 바라보는 유경의 눈동자에 산호가 잠시 망설였다.
수천, 수만가지 생각이 머릿속을 뒤흔들고 있었다.
이대로 끌어안고 자신의 여자로 만들어버릴까?
이곳에서 유경을 안고 자신이 유경의 첫남자가 되어버리면 머리를 올리지 못하지 않을까?
하지만 만에 하나 유경이 싫어하면 어떻게 하지?
혹시나 유경이 그런 자신을 벌레 보듯 하면 어떻게 하지?
그랬다가 오라버니라는 자리마저 잃어버리는 건 아닐까?
수많은 생각들이 머릿속에 뒤죽박죽이 되어갈 때 유경의 목소리가 그 복잡한 산호의 머릿속에 던져진다.
“오라버니는 언제까지나 내 오라버니일거지?”
그 말 한마디에 산호가 입술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수만가지 복잡한 생각이 그 한마디에 모두 가라앉아 버렸다.
용기.
그래, 용기가 없는 자신이 미웠다.
행여나 오라버니 자리까지 잃어버릴까봐 주저하는, 용기 없는 자신이 미웠다.
지금이 마지막 기회인데 이 마지막 기회를 주저하고 있는, 끝끝내 유경에게 자신의 마음을 털어놓지 못하는 용기 없는 자신이 미웠다.
하지만 용기를 내기에는 너무나 오랫동안 자신은 유경의 오라버니였다.
오라버니였기에 이제 남자로 다가서기가 두려운 것이다.
유경이 자신을 남자로 봐줄 것인지 확신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더 두려웠다.
입안까지 가득 찬 고백을 내뱉지 못하는 것은 그 불확신이 가져다주는 두려움 때문인 것이다.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그 분명한 ‘오라버니’라는 말이 산호에게 무엇보다 큰 두려움인 것이다.
“그럼. 난 언제까지나 유경이 오라버니지.”
결국 그 대답만 해버린 산호가 밤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별을 본다는 핑계라도 대지 않으면 울 것 같은 눈을 감출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 사람은 울 것 같은 눈을 감추며 밤 하늘의 별을, 한 사람은 두 손 안에 곱게 댕기를 얹고 샘에 담겨진 고운 별을 그렇게 바라보고 있었다.
◈
“나이가 열 일곱 살이나 먹은 새끼 기생 머리를 올려주다니, 진사께서는 마음도 좋으시오. 널린 것이 더 어린 새끼 기생인데 말입니다.”
“싼 값에 처녀 구경이나 하는 것이지, 뭘.”
잔치 자리의 상석에 앉은 수염이 허연 사내가 술잔을 연거푸 들이키며 대답했다.
얼추 봐도 나이는 예순 중반, 입고 있는 도포가 터질 듯이 살찐 사내는 이곳의 지주 중의 한명으로 돈으로 진사 자리를 얻은 사내였다.
하룻밤 술값과 화대로 기왓집 한 채를 너끈히 낸 적도 있다고 소문난 이 윤진사가 행수 기생이 유경의 머리를 올려줄 사내로 정한 그 사내였다.
그리고 유경의 머리값으로 집 한 채 조금 넘는 돈을 받기로 한 것이다.
유경에게는 그 정도도 감지덕지라고 생각하며 행수 기생이 윤진사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자고로 계집이란 처녀가 일품인데, 처녀 구멍은 뚫는 맛이 아주 기가 막혀서 한번 그 맛을 보면 처녀만 찾아다니고 싶어지지.”
음탕한 말을 아무렇지 않게 내뱉는 윤진사의 좌우에 앉아있던 양반들이 그 말에 저마다 웃음을 터트렸다.
쓰고 있던 갓은 애당초 벗어 던지고 옆에 끼고 있는 어린 기생들의 치맛자락을 들추는 양반들의 손길이 탐욕스럽다.
“어디 보자, 이 년은 처녀인가 아닌가.”
술이 들큰하게 취한 양반 하나가 옆에 있는 어린 기생의 치마를 걷고 속적삼을 끌어 내린다.
“어마. 이러면 안 되어요...”
간드러지게 말하는 기생의 말에는 거부의 의사가 없다.
술자리에 불려온 이상 거부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어이구, 이 년 구멍이 아주 뜨끈뜨끈하네.”
속적삼 안으로 손을 집어넣고 기생의 음부를 주물럭거리던 양반이 음탕한 숨소리를 내며 그 어린 기생을 끌어안는다.
술자리 여기 저기서 이미 그런 음탕한 광경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저마다 끼고 있던 기생들의 저고리를 풀어헤치고 젖가슴을 주무르고 치마 안으로 손을 넣어 은밀한 속살을 지분거리느라 여념이 없는 양반들을 내버려두고 행수 기생이 그 자리를 피해 나온다.
오늘 잔치의 주인공은 이 탐욕스러운 자들이 아닌 것이다.
진짜 잔치의 주인공, 행수 기생이 욕심내는 양반을 모신 자리는 이곳이 아니었다.
이곳은 단지 유경의 머리를 올려줄 양반을 접대하는 자리일 뿐, 행수 기생 자신을 위한 자리는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나으리.”
문을 열고 들어서자 방 안에서 벌써 술잔을 기울이고 있던 양반이 반가운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추월이구나. 그래, 오랜만에 보는 구나.”
반갑게 맞이하는 양반의 옆에 앉은 행수 기생의 얼굴이 홍조가 떠올랐다.
오랫동안 기생 노릇을 하며 이 사내, 저 사내를 품어왔지만 역시 첫정을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이 양반이 십 오년 전, 행수 기생의 머리를 올려준 사내인 것이다.
처음 머리를 올려준 이후 일년에 한번 정도로 이곳을 찾아주는 이 사내를 내심 마음에 품고 있던 행수 기생이 이제 기생 생활을 끝내고 이 사내의 첩실로 들어앉기를 소망하는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오늘은 동행이 있으시네요?”
행수 기생의 눈이 양반의 맞은편에 앉은 젊은 사내에게 가서 머무른다.
늘 혼자 이곳을 찾던 양반이 오늘은 동행과 동석한 것이다.
동행한 사내는 이십대 초반에 눈매가 사나운 사내였다.
숱한 사내를 대해온 행수 기생이 보기에도 그 성품이 짐작이 갔다.
사나운 눈매, 꽉 다물린 다부진 입술, 그리고 들어서는 행수 기생에게 눈길도 주지 않는 냉랭한 태도.
어디의 귀한 양반 자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만함이 하늘을 찌르겠다는 생각을 하며 행수 기생이 술잔에 술을 따랐다.
“이쪽은 현신교위 이추영이라고 하네. 내 생질이지.”
그 사내가 이 양반의 생질이라는 말보다는 현신교위라는 말에 행수 기생의 눈꼬리가 살며시 올라간다.
현신교위라 하면 무반 종 5품인 것이다.
젊은 나이에 그 정도 품계라면 집안 배경이 좋던가 아니면 본인의 실력이 출중하다는 뜻이었다.
“그러면 교위 나으리께도 예쁜 아이 하나를 붙여주어야겠어요.”
행수 기생이 문을 열고 다른 기생을 부르려고 하자 그때까지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추영이 처음으로 목소리를 냈다.
“난 됐소.”
생긴 것처럼 차가운 목소리였다.
이런 사내의 술시중을 드는 것이 가장 힘들다고 내심 생각하며 행수 기생이 열었던 문을 다시 닫는다.
잠깐 열린 문 너머로 건너편 방의 양반들이 술에 취해 떠드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술에 취해 떠들어대는 음담패설에 추영의 입술이 살며시 비틀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