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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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경이 이렇게나 달랐다.

고작 담 하나를 사이에 뒀을 뿐인데 풍경이 이렇게나 달랐다.

홍등을 밝혀 놓은 담 안의 풍경은 화려한 불빛과 오색빛깔의 치마저고리에 간드러지는 웃음소리로 가득했지만 담 밖의 풍경은 고요한 달빛 하나가 전부였다.

머리 위로 부서지듯 내려오는 그 아스라한 달빛을 의지해서 유경이 걸음을 옮겨 놓는다.

어차피 유경은 초대받지 못한 잔치 자리였다.

나중에 유경이 머리를 올리더라도 저런 자리에 초대받을 수 있을지 없을 지는 유경 자신도 모를 일이었다.

간간히 흩어지는 희끗한 앵화 잎이 꼭 눈이 날리는 것 같다고 유경이 생각했다.

벌써 봄내음이 물씬 풍기는 이런 밤이지만 어둠 속에 흩날리는 희끗한 꽃잎은 꼭 한겨울 눈바람이 부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고 있었다.

산호와 약속한 장소는 별이 유난히도 아름답게 보이는 언덕이었다.

그 언덕에 서면 유난히도 별이 아름답게 보여서 산호와 유경 둘이서 별이 내리는 언덕이라는 별명까지 지어 붙인 곳이다.

오늘 그곳에서 산호와 만나기로 한 것이다.

산호.

세 살 나이 많은, 그러나 피가 섞이지 않은 오라버니.

기억도 나지 않는 어렸을 때부터 손을 잡아주고, 잠자리를 잡아주고, 함께 개울에서 놀아주었던 자상한 오라버니.

산호가 무엇을 걱정하는지 유경도 알 것 같았다.

누이 동생처럼 아껴온 자신이 낯도 모르는 남자의 품에 안겨서 머리를 올리게 되는 것이 산호가 보기에는 걱정스러울 것이다.

어느 것 하나 대견스럽게 해내지 못하는 자신이 이제 진짜 기생이 되는 것이 산호의 보기에는 불안한 것이리라.

그래서, 자신이 걱정이 되어서 그렇게 아직 장가도 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리라.

벌써 상투를 틀었어도 한참 전에 틀었어야 하는 산호가 아직까지 상투를 틀지 않은 것은 여자가 없어서가 아니라는 건 유경도 알고 있었다.

이미 여러 곳에서 중매가 오갔지만 유경이가 머리 올리기 전에는 장가갈 마음이 없다고 산호가 지금까지 계속 거절해온 것이다.

이젠 산호도 장가를 가서 가정을 꾸려야 할 때라고 유경이 생각했다.

자기가 머리를 올리면 더 이상 산호도 자기에게 신경쓰느라 해야 할 일을 못하게 되는 일은 없을 것이다.

“머리...”

밤길을 걷고 있자니 새삼 불안해지는 것은 과연 누가 자신의 머리를 올려줄 것인가 하는 두려움이 밀려왔기 때문이다.

‘어떤 사내일까...나이가 많을까? 역시 그렇겠지?’

젊고 돈 많은 양반이 새끼 기생의 머리를 올려주는 경우는 그 새끼 기생이 아주 빼어난 경우를 제외하고는 그리 많지 않다는 건 유경도 알고 있었다.

새끼 기생의 머리를 올려주는 양반은 대부분 나이가 많은 양반들이다.

수염이 허연 양반이 자신의 옷고름을 풀고 자신의 속살을 만지는 상상을 해본 유경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응?”

약속 장소로 걸어가던 유경이 발을 멈춘 것은 어디에선가 들려오는 낮은 신음소리 때문이었다.

“무슨 소리지?”

분명 신음소리였다.

끊어질 듯 가느다란 신음소리.

짐승의 소리가 아니라 사람, 그것도 남자의 신음소리가 미약하게 들려오고 있었다.

만약 여자의 신음소리였다면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쳤을 것이다.

하지만 남자 귀신은 들어본 적이 없는 유경이 주변을 천천히 살폈다.

운이 나쁜 누군가가 화적이라도 만나서 죽어가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긴 마을이 이렇게나 가까운 이곳에 화적이 나올리는 없지만 말이다.

“거기 누가 있소?”

유경이 우물 뒤쪽을 넌지시 건너다보며 말을 던져본다.

우물 뒤쪽에서 신음소리가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여보시오, 거기 누가 있소?”

다시 한번 용기를 내서 유경이 말을 걸어봤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조금 더 확실한 신음소리 뿐이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용기를 내서 우물 쪽으로 걸어간 유경이 우물 뒤를 발꿈치를 들어 쳐다봤다.

“어머나!”

발꿈치를 든 유경의 눈에 우물 뒤쪽에 쓰러져 있는 남자의 모습이 들어왔다.

달빛이 환해서 그 남자의 얼굴에 난 생채기며, 그 남자의 찢어진 옷 사이로 흐르는 피가 고스란히 보이고 있었다.

“이를 어째?!”

우물 뒤로 후다닥 다가간 유경이 쓰러진 남자의 몸 이곳저곳을 살펴봤다.

다행히 피가 많이 흐르고 있지는 않았다.

어디에서 구르기라도 한 것인지 옷은 찢어지고 흙 투성이였다.

“정신 좀 차려 봐요. 대체 어떻게 된 거랍니까?”

낯선 사내였지만 이대로 버려둘 수는 없었다.

유경이 속치마를 찢어서 남자의 피가 흐르는 가슴에 칭칭 동여매 준다.

그리고 작게 찢은 속치마로 남자의 얼굴에 묻은 피를 닦아줬다.

“그래, 물이라도 좀 마시게 하면...”

유경이 얼른 옆에 있던 두레박을 우물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낑낑거리며 물이 가득 찬 두레박을 끌어 올렸다.

하지만 지금부터가 문제였다.

두레박에는 물이 가득 차 있지만 이걸 남자에게 마시게 하는 것이 문제였다.

“어디 보자...”

유경이 손바닥을 모아 물을 담고는 남자의 입에 가져다댔다.

그러나 물은 남자의 입가만 적시고 흘러내릴 뿐이었다.

“이를 어쩌나...”

유경이 잠시 고민했다.

방법은 하나 뿐이지만 낯 모르는 남자에게 덜컥 그런 방법을 쓸 수는 없었다.

“나도 모르겠다. 사람을 살리는 게 우선이지...”

마침내 유경이 결심을 했다.

어차피 며칠 뒷면 머리를 올리고 사내를 받을 몸이다.

나중에 사내와 입을 맞추나 지금 맞추나 그게 무슨 상관이냐는 생각에 유경이 두레박의 물을 입안에 머금었다.

그리고 쓰러진 남자의 입술을 손으로 벌리고 그 남자의 입술에 자기 입술을 가져다 댄다.

따뜻한 입술이라고 생각하며 유경이 자신이 머금고 있던 물을 남자의 입안으로 흘려보냈다.

두 번 그것을 반복하자, 효과가 있었던 것일까.

남자가 힘겹게 눈을 뜨고 그녀를 쳐다보는 것이다.

“정신이 드십니까? 어쩌다 이런 일을 당하신 겁니까? 댁이 어디세요?”

여기서 그녀가 더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사람을 불러다가 이 남자를 여기서 옮겨가는 것 뿐이었다.

“누...누구...?”

남자가 힘겹게 입술을 열어 말을 했다.

“너는...누구냐...”

“네? 저요? 저는 유경이라고 청연루 새끼 기생입니다. 댁이 어디신지 알려주시면 제가 가서 사람을 데려오겠습니다.”

“유경...”

남자의 손이 유경의 저고리 고름에 닿았다.

노란 저고리 고름에 남자의 손에 묻어있던 피가 묻어났다.

“난 괜찮으니 좀 일으켜다오...”

정신이 돌아온 남자가 하는 말에 유경이 그의 등을 부축해준다.

유경의 부축을 받고 비틀거리며 일어나 앉은 남자가 가쁜 숨을 내쉬었다.

“이런 꼴을 당하다니...”

“무슨 일이 있으셨습니까?”

“말에서 떨어졌다. 내 이런 실수를 하다니...”

“말...”

남자의 손이 위를 가리켰다.

우물 위쪽으로 이어지는 산길이었다.

“급히 온다고 산길로 내려오다가 말에서 떨어졌지 뭐냐. 말은 도망가고 나는 이 꼴이 되었고...창피한 노릇이지...”

“창피하다니요. 이만하면 천만다행이지요. 어디 부러지거나 한 것도 없으신 것 같고, 이만하면 정말 다행입니다요.”

유경이 호들갑을 섞어 하는 말에 남자가 쓴 웃음을 지었다.

“제가 가서 사람을 불러올까요?”

“아니다, 됐다. 이런 꼴을 누구에게 보이라고 그러는 것이냐. 혼자 갈 수 있으니 일어나게 부축이나 좀 해주거라.”

남자의 유경의 어깨에 손을 올려 놓았다.

생각보다 무거운 남자의 팔을 어깨에 올려놓은 채로 유경이 엉거주춤 일어섰다.

일어서는 유경을 따라 남자도 몸을 일으켰다.

일어선 남자가 자신의 가슴을 동여맨 유경의 찢어진 속치마를 내려다봤다.

“네가 이런 것이냐?”

“댁으로 돌아가시면 깨끗한 천으로 바꾸세요.”

천한 계집의 속치마로 상처를 싸맨 것이 혹시나 기분을 상하게 했나 싶어서 유경이 남자의 눈치를 살폈다.

딱 봐도 양반이었다.

말을 타고 산길을 내려오다가 굴러 떨어졌다고 했다.

말을 탈 정도로 대단한 양반인 것이다.

말은 아무나 타는 것이 아니라는 건 유경도 잘 알고 있었다.

이런 양반 체면에 계집, 그것도 천한 새끼 기생의 도움을 받았다는 사실이 창피할 지도 모른다.

더군다나 그런 천한 계집의 속치마로 상처를 감싼 것은 어쩌면 더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래저래 눈치만 살피고 있는 유경의 어깨에서 손을 내리며 남자가 어딘가를 쳐다봤다.

“내 말이 저기 오는 군. 그래도 주인을 버리고 달아나진 않았구나.”

남자가 쳐다보는 쪽으로 유경이 눈을 돌렸다.

정말 그 남자의 말처럼 어둠 속에서 말 한필이 다가오고 있었다.

“난 이제 괜찮으니 너도 가던 길을 가보거라. 이 밤중에 어딜 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남자의 말에 그제야 유경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을 산호를 떠올렸다.

“어머나! 내 정신 좀 봐!”

하지만 이내 걱정스런 표정이 된 것은 속치마도 찢어먹고 옷고름에 피를 묻은 자신의 꼴을 보면 산호가 무슨 생각을 할지 그게 또 걱정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럼 쇤네는 그만 가보겠습니다. 나으리도 바로 댁으로 돌아가셔서 치료 받으셔요.”

공손히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유경의 뒷모습을 그 남자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청연루 새끼 기생이라...”

이미 어둠 속으로 사라진 유경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말의 고삐를 쥔 채로 그 남자가 한동안 그곳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가 사라진 어둠 속에 하얀 꽃잎이 마치 눈바람처럼 흩날리고 있었다.

이런 따뜻한 봄이지만 마치 설국의 풍경처럼 눈바람이 흩날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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