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 회: 눈바람 -->
“언니, 뭘 그리 생각해요?”
골똘히 생각에 잠겨있던 행수 기생이 옆에서 부르는 목소리에 생각에서 깨어났다.
“그게 유경이 말이야...”
“유경이? 그 애가 왜?”
“유경이 머리를 올려줄 만한 양반이 두 명인데 둘 중에 누가 더 나을까 싶어서.”
“아무나 올리면 어때. 유경이가 큰 기생 될 것도 아니고 그냥 적당한 양반 찾아서 머리 올리면 그만이지. 그러지 말고 우리 계홍이 머리 올려줄 양반 좀 알아봐줘, 언니.”
행수 기생의 옆에서 콧소리를 앙앙 거리는 이 기생은 한때 행수 기생의 밑에 있다가 지금은 독립해 나간 기생이었다.
자기 밑에 아직 머리를 올리지 않은 새끼 기생 두 명을 데리고 가끔 행수 기생이 큰 잔치를 벌일 때면 도와주러 오는 것이다.
“계홍이가 몇 살이지?”
“열 다섯. 딱 좋을 때지. 그 계집애가 애교도 있고 춤사위도 볼만하니까 뒷배 좀 두둑한 양반님네면 좋겠어. 유경이 머리 올려줄 양반 중에 괜찮은 양반이 있으면 우리 계홍이에게 붙여주면 안 돼?”
“그 양반들이 한 명은 돈은 있는데 나이가 예순이 넘어서 오래 뒤를 봐줄 수는 없는 양반이고, 또 한 명은 나이는 이제 쉰인데 돈이 좀 짜서 지금 둘 중에 누구로 할까 고민 중이야.”“나이가 좀 많아도 돈 많은 게 제일이지. 첫서방이 돈이 짜면 내내 돈이 짠 손님만 만난다는 말도 몰라? 그러지 말고 그 돈 짠 양반은 유경이 주고, 그 예순 넘은 양반은 우리 계홍에게 줘. 솔직히 말해서 유경이 그 애는 나이도 많고 얼굴이 빼어난 것도 아니고 어떤 양반이 그런 애에게 기왓집 값을 주고 머리를 올리겠어?”
“나이가 많긴 하지...”
유경이의 나이를 떠올리며 행수 기생이 한숨을 쉬었다.
열 일곱.
새끼 기생이 화초 머리를 올리는 나이로는 다분히 많은 나이다.
그런 나이 많은 새끼 기생을 기왓집을 얻을 만한 돈을 주고 머리를 올려줄 양반은 없을 것이다.
헐값에 머리를 올려야 하는데, 헐값에 머리를 올렸다는 소문이 돌면 앞으로는 유경이를 찾는 손님들은 내내 그녀를 헐값 취급 할 것이다.
“처음부터 기생에 어울리는 애가 아니었어...”
14년 전 겨울에 우연히 이곳에 찾아든 아이가 유경이었다.
엄마는 얼어 죽었다고 그 아이를 거둔 청지기는 연민을 담은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었다.
군입이 느는 것은 누구도 반기지 않았고 그 어린 아이를 엄동설한에 얼어 죽게 만드는 것도 마음에 안쓰러워 결국 그 아이를 받되 기생으로 만들겠다는 말을 미리 해놓았었다.
하지만 기생이 될 아이가 아니었던 것이다.
교방에 보내 기예를 배우게 했으나 배우는 것이 또래보다 너무 늦었다.
춤도, 노래도, 하다못해 권주가도 제대로 외우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사내들을 단번에 홀려낼 만큼 미모가 빼어난 것도 아니다.
어디의 기생은 기예는 형편없으나 미모 하나 만큼은 하늘에서 내려온 선녀 같아서 사내들이 줄을 선다고 들었지만 유경의 경우에는 못난 얼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빼어난 미녀도 아니다.
미모도, 기예도 부족해도 간혹 아랫도리가 타고난 명기라고 사내를 후리를 경우도 있지만 유경이 그런 경우라고 생각하기에는 너무 무리수가 많았다.
어차피 머리를 올려도 제대로 된 기생이 되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적당한 양반을 만나 첩실로 들어가는 것이 유경의 입장에서는 최선이라고 생각하며 행수 기생이 곰방대를 한 대 피워 문다.
“계홍이 머리 올려줄 양반은 다음에 구하고 예순 넘었지만 돈 많은 그 양반을 유경이 머리 올려줄 사내로 해야겠다.”
마침내 결정을 내린 행수 기생의 입에 물린 곰방대에서 연기가 피어 올랐다.
◈
“오늘 잔치에는 연홍이랑 세련이도 참석한데.”
부러움을 담아 말하는 유경을 산호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연홍과 세련은 유경의 동년배 교방 친구로 이미 재작년에 머리를 올리고 기적에 정식으로 이름을 올린 이들이다.
“부럽니?”
산호는 그녀가 머리 올리는 날이 가까워져 오는 것이 두려웠다.
그 날이 가까우면 가까울수록 밤마다 악몽을 꾸는 산호였다.
다 늙은 양반의 품에 안겨서 숨을 헐떡이고 있는 유경의 모습이 꿈에 나올 때마다 산호는 식은땀을 흘리며 깨어나곤 했었다.
그러나 이런 산호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경이 천연덕스럽게 웃는다.
“나도 이제 밥값은 해야지. 언제까지 얻어먹고 살 수는 없잖아. 그동안 돌봐준 행수님께 면목도 없고...”
머리를 올리지 않으면 연회 자리에 나갈 수 없다.
물론 머리를 올리지 않고도 가무를 위해 연회 자리에 불려나가는 새끼 기생들이 있지만 그건 빼어난 재주를 가졌을 경우에 한해서다.
유경처럼 재주가 없는 새끼 기생은 그런 자리에 나갈 수도 없다.
그런 자리에 나가서 양반들의 눈에 띄면 머리 올리는 값도 더 올라가겠지만 유경의 처지에 그런 것을 바랄 수는 없는 것이다.
“너, 머리 올릴 거야?”
“그러면. 안 올려?”
유경이 별 소리를 다 듣겠다는 듯 산호를 쳐다봤다.
머리를 올리면 첫 사내가 되어준 그 양반이 그녀의 머리 값으로 보통 집 한 채는 사주기 마련이다.
그 돈으로 집도 한 채와 세간 살림을 사서 독립을 하고, 그리고 나머지 돈으로 그동안 뒤를 봐준 행수 기생에게 인사를 한 다음, 그 뒤로는 당분간 그 양반의 도움으로 생활을 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 머리 올려준 양반의 도움으로 살 수는 없는 법.
여기저기 잔치 자리에 불려나가며 얼굴도 알리고 자기 손님을 만들어야 이 바닥에서도 살아남는 것이다.
“너는...”
‘너는 내가 아닌 다른 남자 품에 안기는 게 아무렇지도 않아?’
그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산호가 애써 그 말을 삼켰다.
“무섭지 않아?”
“무섭기는. 기생이 다 그렇지, 뭐.”
산호의 말에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는 유경이지만 그녀라고 무섭지 않을 리가 없다.
사내에게 몸을 열어주는 것이다.
사내와는 한번도 손도 잡지 않아본 그녀였다.
물론 산호는 제외하고.
그런데 이제 며칠 후면 얼굴도 모르는 사내에게 옷고름을 풀고 몸을 열어줘야 하는 것이다.
사내를 받는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는 그녀도 아직 정확히 알지 못했다.
먼저 머리를 올린 동무들은 처음엔 아프다고 그녀에게 얘기해주었다.
아프고 무섭고 창피하다고.
하지만 계속 하다보면 아프지도 않고 무섭지도 않고 창피하지도 않으니 할 만하다는 말을 덧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이제 와서 도망칠 수는 없다.
물론 발에 족쇄를 채워놓지 않았으니 도망치려면 얼마든지 도망칠 수 있지만 도망치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키워준 아저씨, 아주머니의 은혜를 저버리고 도망치기도 싫었고 엄하지만 때로는 자상하게 돌봐준 행수 기생의 은혜를 모른 척 하고 도망칠 수는 없었다.
엄마도 없이 겨울에 얼어죽을 뻔한 자신을 지금까지 키워주고 보호해준 사람들이었다.
이제 와서 자기 한 몸 사리느라 도망치면 은혜도 모르는 인간이 된다는 생각에 유경이 마음을 굳게 먹었다.
“저기, 유경아...”
“왜?”
“오늘 밤에 잔치가 벌어지면 그때 잠깐 거기로 나와, 너한테 줄 게 있어.”
“줄 거? 뭔데?”
궁금하다는 유경의 표정에 산호가 품 안에 넣어준 댕기를 떠올리며 가만히 웃기만 한다.
“비밀.”
오늘 밤 잔치가 한참일 때 유경과 늘 둘이서 별을 보던 그곳에서 댕기를 건네주며 고백을 하자고 산호가 생각했다.
마음을 고백하고 그녀의 손을 잡고 말하는 것이다.
같이 도망치자고.
어디로든 도망쳐서 둘이서 작은 초가를 얻어서 그렇게 행복하게 살자고.
그곳이 산골이건 어촌이건 어디라도 상관없으니 둘이서 그렇게 행복하게 살자고 고백하는 것이다.
오늘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