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회: 눈바람 -->
털썩.
등에 지고 있던 등짐을 내려놓은 청년이 주위를 한번 휘익 둘러본다.
“다녀 왔니?”
부엌에서 나온 중년 여자가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청년이 지고 온 등짐을 이리저리 뒤적여 본다.
“빠트린 것은 없겠지? 오늘 큰 잔치가 있는데 주안상이 소홀하면 경을 칠 거야.”
“말씀하신 건 전부 사왔어요. 그런데 유경이는요?”
경을 치건 말건 그런 건 안중에도 없다는 듯 청년 산호가 주위를 연신 둘러본다.
“유경이는 왜?”
“유경이 주려고 뭐 좀 사왔어요.”
“유경이는 심부름 갔다. 괜히 유경이 찾느라고 돌아다니지 말고 뒤에 가서 아버지 일이나 도우거라.”
아들을 쳐다보는 여자의 얼굴에 수심이 드리워져 있었다.
아들의 마음을 알기에 되지 않을 일에 괜히 마음을 쓰다가 나중에 아들이 받을 상처가 염려가 되는 것이다.
유경이.
14년 전 겨울 이곳에 온 여자 아이.
그해 유난히도 눈이 많이 내리던 날 이곳에 버려진 그 작은 여자 아이가 어느새 열일곱의 소녀로 자라난 것이다.
청지기와 찬모인 그의 아내가 딸처럼 14년을 키워왔지만 그녀와 같이 자라난 세 살 더 나이 많은 산호의 눈에는 그 어린 아이가 절대로 누이 동생처럼은 보이지 않은 것이리라.
차라리 누이동생으로 여기고 있다면 좋으련만 이 청년 산호의 눈에 그 아이가 누이가 아니라 여자로 보이고 있다는 건 이 여인도, 그리고 아버지인 청지기 유씨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더 근심이 늘어가는 것이다.
이곳에서 자라난 유경은 이제 얼마 후면 머리를 올리게 된다.
그 말은 정식으로 기생이 된다는 뜻이다.
14년 전 유경을 이곳에서 키우는 것을 허락하는 대신 행수 기생은 그 아이가 자라면 교방에 넣어서 교육을 받고 기생으로 만들겠다고 말했었다.
엄동설한에 제 엄마처럼 얼어 죽는 것보다는 차라리 기생으로 사는 것이 더 낫겠다는 생각에 청지기도, 그의 아내도 그 말에 동의했다.
그렇게 여덟살이 될 무렵부터 교방에 드나들며 기생 수업을 받아온 유경이었다.
다른 동기들은 열다섯살에 모두 머리를 얹었지만 유경만 유난히 머리 얹는 것이 늦어진 것은 그녀의 재주가 기생이 되기에 한참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춤이면 춤, 노래면 노래, 어느 것 하나 동기들에 비해 뒤처지는 유경을 그대로 기적에 올리면 그야말로 송도 기생의 망신이라는 주위의 만류에 유경의 초야가 열일곱살이 된 지금까지 미뤄져 온 것이다.
하지만 더는 늦출 수 없어졌다.
기생 나이 스무살이면 퇴기 취급을 받는데 열일곱에도 머리를 올리지 못하면 그야말로 머리를 올려줄 양반도 나서지 않을 것이 뻔했기 때문이다.
머리를 올려줄 때 치르는 화대로 한 밑천을 잡아야 하는데 그마저도 나서는 양반이 없다면 더 이상 이 청연루에서 유경을 먹여주고 재워줄 이유가 없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행수 기생이 유경의 머리를 올려줄 양반을 물색하고 있다는 것은 찬모 강씨도 잘 알고 있었다.
어디의 돈 많고 유력한 양반이 아마도 유경의 첫남자가 될 것이다.
그런데 지금 이 철없는 아들은 되지도 않을 연심을 포기하지 못하고 있으니 부모된 마음으로 어찌 근심이 되지 않을 수 있을까.
“잠시만 유경이 좀 찾아보고 올게요.”
강씨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 산호가 뒷문으로 걸음을 옮겨 놓는다.
“쟤가...”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는 아들의 뒷모습을 쳐다보던 강씨가 한숨을 내쉬었다.
“빨리 장가를 보내든지 해야지...”
나이 스무살이 되도록 상투도 틀지 않은 아들이 이리도 눈에 밟힐 수가 없는 것이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아야지.”
아무리 고와도 기생은 기생.
이 놈 저 놈 다 꺾을 수 있는 그 꽃은 절대 한 남자의 여자가 될 수 없다는 건 청연루에서 수많은 기생들을 봐온 강씨가 더 잘 알고 있었다.
“전이나 부쳐야지.”
체념을 한 강씨가 산호가 짊어지고 왔던 등짐을 부엌으로 끌고 들어간다.
오늘밤 큰 잔치를 치르려면 부지런히 준비를 해야 하는 것이다.
오늘밤에는 한양의 유력한 양반이 방문한다 하여 행수 기생이 며칠 전부터 벼르고 있었다.
그 양반을 어떻게 꼬셔서 이번 기회에 한양으로 자리를 옮겨 보고 싶다고 행수 기생이 전부터 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것은 강씨도 잘 알고 있었다.
이젠 퇴기가 된 행수 기생이 한양 세도가 양반의 첩실로 들어가 편안하게 여생을 살고 싶어한다는 것을.
기생의 말로는 그런 것이다.
세도가의 첩이 되거나 아니면 아무도 찾아주지 않는 퇴물 기생이 되어서 뒷방에서 살던가, 그것도 아니면 색주가에서 몸이나 팔다가 여생을 마치는 것.
열흘 붉은 꽃이 없고 화려한 꽃이 더 빨리 진다는 옛말이 틀린 것이 없다고 생각하며 강씨가 부엌으로 들어갔다.
고운 명주 치마 한번 입지 못해도 한 서방과 일생 해로하는 자신이 고운 명주치마 입고 머리에 동백 기름 바른 기생들보다 몇 배나 더 행복하다고 생각하며 말이다.
◈
품 안이 따뜻했다.
아마도 품 안에 품고 있는 댕기 때문에 가슴이 더 따뜻하게 느껴지는 것이리라.
유경을 찾아서 밖으로 나온 산호가 괜히 가슴 주변을 한번 만져봤다.
장에 간 김에 유경에게 주려고 댕기를 하나 사온 것이다.
붉은 댕기에 금박이 박힌 댕기가 유경의 머리에 곱게 장식되어 있는 것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뜻해지고 있었다.
유경.
14년을 누이 동생처럼 아껴주던 소녀.
하지만 누이 동생이라고 생각한 적은 한번도 없었다.
그 작은 손을 잡고 강가의 돌다리를 건널 때도 그 아이가 누이 동생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교방에 기예를 배우러 다니는 유경이 밤중에 돌아오는 날, 그녀를 마중하러 오솔길이 시작되는 그 언덕에서 그녀를 기다리며 서성거릴 때에도 한번도 그녀는 누이 동생인 적이 없었다.
유경.
웃는 모습이 아름다운 소녀.
생글 생글 웃을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저려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
청연루의 분화장 짙게 한 기생들보다 몇 배나 더 아름다운 소녀.
어머니가 무엇을 걱정하는 것인지는 산호도 잘 알고 있었다.
교방에서 기예를 배우기 시작한 그때부터 유경의 길이 정해졌다는 것도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이 마음은 포기할 수 없었다.
지금으로서는 무엇을 할 수 있을지 산호 스스로도 모른다.
만약 유경이 머리를 올리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할 지도 모른다.
유경을 데리고 달아나는 상상도 해보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산호 자신의 마음이었다.
유경의 마음이 어떠한지는 모르는 것이다.
한번도 유경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한 적이 없었다.
무서웠기 때문이다.
자신을 오라버니로 여기는 유경에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을 때 돌아오는 그녀의 반응이 무서운 것이다.
지금까지의 관계를 깨뜨릴 수도 있다는 두려움이 산호로 하여금 주저하게 만들었다.
아직 시간은 있었다.
유경이 머리를 올리기 전날이라도 마음만 먹으면 달아날 수 있는 것이다.
‘괜찮아. 시간은 얼마든지 있어.’
그렇게 생각하며 산호가 걸음을 재촉했다.
저 멀리서 댕기 머리를 흔들며 걸어가는 뒷모습이 보였다.
“유경아!”
산호가 부르는 소리에 앞서가던 댕기 머리의 소녀가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본다.
“오라버니!”
반갑게 손을 흔드는 소녀의 맑은 눈망울이 햇살에 반짝이고 있었다.
유경, 17세의 어느 봄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