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화
(7/8)
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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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괴물 넘실거리는 파도를 바라보는 연리의 눈이 시렸다. 섬은 어느새 시야에서 사라졌다. 저 섬에 갈 때는 조그만 배에 몸을 싣고 초라하게 갔었는데 이제 섬에서 나오는 길은 큰 배에 화려한 옷을 입고 있다. 그러나 그때의 마음도, 지금의 마음도 편한 것은 아니다. “짜증 나는 바다 냄새.” 태자의 중얼거림이 뱃전에 앉아 있는 연리의 귀에도 들어왔다. 태자는 바다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저토록 아름다운 바다가 어떻게 아름답게 보이지 않는 것일까. 파도도, 파도에 이는 흰 거품도, 파도에 반짝이는 햇살도 전부 다 아름다운데,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바람조차 이렇게 좋은데 그걸 태자는 모른다. 이제 돌아갈 황궁에서 다시 이 풍경을 보게 되는 날이 올까. ‘만약, 아주 만약에 도망치고 싶어지면, 있는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지면, 내게로 돌아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지면 그때는 이것을 묶어 두면 당신이 어디에 있더라도 내가 그걸 보고 가겠소. 데리러 가겠소.’ 말이 안 되는 소리다.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딘 줄 알고 데리러 오겠다는 걸까. 황궁의 기둥에 이걸 묶어 두면 그걸 어찌 보고 데리러 오겠다는 걸까. 연리가 사내가 준 흰 천을 꺼내 물끄러미 쳐다봤다. 제가 만들어 준 옷에서 허릿단 부분을 잘라 낸 천이다. 증표로 겨우 이런 것밖에는 주지 못하는 사내다. 정말, 아무것도 없는 사내다. 맨몸뚱이 하나, 그것이 전부인 사내. 그리고 이제 저를 데려가는 사내는 모든 것을 가진 황제다. 연리의 입술이 달싹거렸다. 만약 예전의 자신이었다면 이런 생각을 하는 스스로를 어리석다 여겼을 것이다. 자신에게는 야심이 있었다. 황후가 되어 가장 존귀한 여인의 자리에 오르겠다는 야심. 끝내는 태자의 어미가 되어 훗날의 황제의 모후가 되겠다는 야심. 모두에게 우러러지고, 모두가 부러워하고 동경하는 위치까지 오르겠다는 야심이 제게 있었다. 그 야심 때문에 태자의 후궁들도 다 받아들일 수 있었고, 태자의 자식까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지금 제 마음 어디에도 그런 야심은 없다. 고작해야 섬, 고작해야 맨몸뚱이밖에 없는 그런 사내에게 흔들릴 정도로 자신에게는 야심이 없다. 이 섬에 왔을 때 어쩌면 야심 가득했던 재상의 딸은 죽었던 건지도 모른다. 첫날, 그 바다에 빠져 황후가 되고 싶었던 자신은 죽고 이제 아무것도 없는 사내를 마음에 담은 자신만 남은 건지도 모를 일이다. ‘나, 다시 웃을 수 있을까…….’ 화려한 옷을 입고 황궁에서 호사를 누리고 살면 행복하게 웃을 수 있을까. 황궁의 기름진 산해진미는 제 배를 달게 채워 줄까. 마음에 걸리는 건 부친이다. ‘아버지…….’ 연리가 눈을 질끈 감고 흰 천을 꼭 쥐었다. 배는 점점 섬에서 멀어지고, 뭍을 향해 가고 있었다. “폐하.” 연리가 권을 불렀다. “왜 그러시오?” “왜 아버님은 직접 오시지 않으셨나요?” 연리는 유배가 풀리면 태자가 아니라 부친이 직접 올 것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데리러 온 것은 태자다. 물론 직접 자신을 데리러 왔으니 감격해야 한다. 충분히 감동받을 일이다. “윤 재상은 지금 조정을 숙청하고 있는 중이오.” “숙청이라 하시면…….” “나를 배신한 자들, 내게 참형을 내리라고 한 자들, 내가 죄인이 되어 태자의 자리에서 끌려 내려왔을 때 나를 비웃은 자들, 나를 끌어내리고 내 자리에 앉은 아우, 그것을 묵인한 자들까지 전부 다 목을 자르고 조정을 새로운 내 사람들로 채울 거요. 그 일을 지금 윤 재상이 하고 있소. 그래서 조정을 비울 수가 없어 내가 왔소. 그대는 내 사람이니 내가 직접 데려가야 하는 것이 옳은 일이고. 그래야 사람들이 새 황제가 얼마나 인자하고, 자애가 많으며 인연을 소중히 하는지 알게 되지 않겠소. 무엇보다 윤 재상과 나의 인연이 얼마나 깊은지 모두가 알게 될 거요.” “폐하, 이번 일에 아버님도…… 도움을 주셨나요……?” 황제를 죽이는 일에 부친도 가담했을까. “모르겠소? 윤 재상과 나는 처음부터 한배를 탄 몸이오. 그대는 우리 사이의 약속의 증표지. 그대가 내 황후인 이상 나는 윤 재상을 배신하지 않고, 그대가 내 아내인 이상 윤 재상도 나를 배신할 수 없고. 우리는 그렇게 그대를 통해 묶여진 가족이오. 피보다 더 진한 가족.” 권의 말을 듣는 연리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알고 있던 사실이다. 재상의 딸과 태자. 그리고 일방적인 간택. 거기에 정치적인 것이 연관되지 않았을 리가 없다. 애당초 어린 나이에 제가 태자비로 일찌감치 간택되었을 때부터 사람들은 아버지의 입김이 들어갔을 거라고 수군거렸었다. 다 알고 있었고,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제 욕심으로 받아들인 일이고, 저도 바랐던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더 이상 바라지 않는 일이기도 하다. 더는, 욕심에 휘둘리고 싶지 않다. “걱정 마시오. 그대는 반드시 황후가 될 것이고, 그대가 낳은 아들이 태자가 될 거요. 그대가 아들을 낳지 못하면 다른 계집이 낳은 아들을 빼앗아서라도 그대의 아들을 삼아 그대를 태자의 어미로 만들어 주겠소.” 이런 것도 애정이라 부를 수 있을까. “저를 사랑하시나요, 폐하?” 연리가 문득 그것이 묻고 싶었다. 대답하는 것은 간단하다. 사랑한다,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하다. “유치하게 왜 그러는 거요.” 그러나 태자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그녀의 남아 있는 기대마저 무너뜨렸다. “윤 재상의 딸이, 온갖 더러운 수를 다 보고 자란 그대가, 그 더러운 수 때문에 저 빌어먹을 섬에 유배까지 간 그대가 이제 와서 사랑 타령이라니. 어울리지 않게.” “그렇네요. 어울리지 않네요.” 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맞는 말이다. 사랑만큼 어울리지 않는 말이 없다. 황궁과 사랑.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무수한 후궁을 둔 황제와 그의 황후. 그 사이에 존재하는 사랑이 과연 가능할까. 밤마다 다른 여인을 품에 안고 자식을 보려는 사내의 곁에서 자신은 과연 행복할 수 있을까. ‘이 밤이 내 마지막 밤이 될 거요. 내 생에 다시 없을 유일한 밤이 될 거요.’ 벌써 그 사내가 보고 싶어졌다. 벌써, 그 사내가 있는 그곳이 그리워진다. 돌아가고 싶고, 보고 싶고, 안기고 싶다. 그러나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연리는 누구보다 잘 안다. 자신이 그에게로 돌아가려고 하면 태자는 아예 그 섬을 짓밟아 버릴지도 모른다. 자신이 그리워하는 이가 그 섬에 있다는 이유만으로도 그 섬을 송두리째 불태워 버릴 수도 있다. 그러니까 그리움은 제 안에서 삭여야 한다. 가슴에 멍이 들고, 마음에 지독한 응어리가 앉아도 그리움을 삭여 내야만 한다. 그 짧았던,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밤을 마음속에 꽁꽁 묻어 두고 그리움이 사무쳐 도저히 견디지 못하게 되면 그때 조금씩 꺼내어 봐야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는 자신을 잡았지만 자신이 그의 손을 놓았다. ‘괜찮아. 다 괜찮아질 거야.’ 연리가 눈을 감았다. 이제는 돌아봐도 그 섬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감은 눈 안에는 섬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를 쓰면 쓸수록 점점 더 선명해지는 섬의 모습에, 섬에 두고 온 사내의 모습에 연리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눈가에 눈물이 맺히고 있었다. * * * 도성으로 돌아온 연리는 예전 집으로 갈 수 없었다. 태자는 연리를 곧장 황궁으로 데려갔다. 유배지에서 돌아온 직후 들어선 황궁은 무척이나 낯설었다. 적어도 연리에게는 그렇게 느껴졌다. 건물은 그대로지만 황궁을 누르고 있는 공기가 달라진 기분이 드는 걸 감출 수가 없다. “먼 여정에 피곤했을 것이니 푹 쉬시오. 내일은 윤 재상을 만날 수 있을 거요.” “네, 폐하.” 연리는 더 이상 권을 태자마마라고 부르지 않는다. 이제 그는 태자가 아니라 황제다. 이 황궁의 주인이다. 그리고 자신은 이제 황궁의 안주인이 되어 그의 곁에 앉게 된다. “하아…….” 권이 돌아가자 연리가 침상에 풀썩 쓰러졌다. “아가씨, 씻을 물을…….” 시중을 들어주는 궁녀들이 씻을 물을 가지고 안으로 들어섰지만 연리가 손을 저었다. 지금은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다. “지금은 그냥 쉬고 싶어요.” 침상의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로 연리가 손을 젓자 궁녀들이 모두 침전 밖으로 물러났다. 지금은 혼자 있고 싶다. ‘아버님을 만나면 이 마음이 조금은 진정이 될까.’ 사람의 마음이 이렇게 간사할 수 있을까. 섬에 유배를 갈 때만 하더라도 하루라도 빨리 도성으로 돌아오고 싶었다. 하루빨리 권을 다시 만나기를 소원했었다. 그리고 지금 그 바람이 이루어졌다. 그토록 간절히 바라던 것이 이루어졌는데 왜 조금도 행복하지 않은 걸까. 왜 자꾸만 그 섬이, 그 사내가 생각나는 걸까. 아무것도 없는 초라한 사내가, 그저 알몸뚱이 짐승과 다를 바 없는 그 사내가 왜 자꾸만 저를 놓아주지 않는 걸까. ‘나, 이렇게 계속 살아갈 수 있을까…….’ 연리가 제 품 안에서 삭이 준 허릿단을 꺼냈다. ‘벌써 보고 싶어…… 어쩌지…….’ 허릿단을 꼭 쥐고 그것을 얼굴에 가져다 댄 연리가 있는 힘껏 체취를 맡았다. 천에서 그 사내의 체취가 나는 것만 같았다. 착각일 수도 있지만. 삭의 체취를 맡자 조금은 불안한 기분이 가라앉은 덕분에 연리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도성에 도착하자마자 황궁으로 들어왔고, 주위를 살필 경황이 없었지만 지금 자세히 보니 자신이 사용하고 있는 이 처소는 예전에 황후가 사용하던 처소다. ‘황후 마마는 어찌 되셨을까.’ 황제와 황후, 연리의 기억 속의 그들은 무척이나 상냥한 이들이었다. 황제는 늘 제게 자애로웠고 황후는 연리를 불러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좋아했었다. ‘설마 모후를 어쩌진 않으셨겠지.’ 태자가 황제가 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선황을 쳐야 한 것은 이해를 할 수 있다. 아니, 이해하려고 애쓰고 있다. 예전에는 권이 누명을 썼다고 생각했었지만 지금에 와서 드는 생각은 그건 누명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정말 태자는 역모를 일으키려고 했었고 그 일에 자신의 아버지도 가담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비록 그것이 실패로 돌아가 자신까지 유배를 떠나긴 했지만, 선황의 입장에서는 아비의 자리를 빼앗으려는 아들을 그냥 둘 수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부자의 정 때문에 극약을 내리지 않고 유배형을 내린 것인데 권은 다시 역모를 시도했고, 그가 원하는 대로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선황이 어찌 되었는지는 알고 있다. 권이 선황을 죽였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병사들끼리 주고 받는 말 속에 그런 내용이 있었고, 섬을 떠나는 배 안에서도 자기들끼리 수군거리는 말 속에서 선황을 죽인 것이 권이라는 사실을 어렵지 않게 알게 되었다. 황제의 자리는 하나,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낳아 준 아비를 죽인 사내. ‘왜 그랬을까…….’ 그냥 가만히 있어도 언젠가는 황제의 자리에 올랐을 것인데, 왜 권은 그런 짓을 해야만 했을까. ‘황후 마마는 무사하셨으면 좋겠다…….’ 황제의 자리 때문에 선황은 죽였다 하더라도 생모인 황후까지 죽이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그런 짓은 하지 않으셨겠지.’ 그런데 만약 권이 생모까지, 황후까지 죽였다고 하면 그때는 어찌해야 하는 것일까. 생부와 생모를 죽인 사내를 지아비로 두고 살아갈 수 있을까. 그런 사내에게 정을 붙일 수 있을까. 눈으로 보지는 않았지만 머릿속으로 이 황궁에 불어 닥쳤을 피바람이 그려졌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것 같은 착각이 일어나 연리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황후…….’ 무릎을 끌어안고 앉아 연리가 착잡한 감정을 삼켰다. ‘나를 그런 식으로 생각하고 계실 줄은 몰랐어.’ 지금까지 연리는 권이 자신을 사랑한다 생각해 왔었다. 그러나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다. 권에게 있는 것은 정치적인 계산뿐이다. 자신에게 다정한 것도 전부 계산에 의해 얻을 것이 있기 때문이다. 만약 자신이 가치를 잃는다면, 더 이상 자신을 통해 얻는 것이 아무것도 없게 되면 자신은 가차없이 버려질 것이 분명하다. 물론 자신도 할 말은 없다. 권을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답은 이미 정해져 있다. 사랑하지 않는다. 다른 사내를 사랑한다. 그러면서도 권의 곁에 있다. 어쩌면 권과 자신은 비슷한 부류의 인간일 것이다. 그러니까 자신에게는 권을 비난할 자격은 없다. ‘그래도 그나마 다행일까…….’ 여기까지 오는 내내 권은 제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 권이 사내로서의 욕정이 없어서가 아니라는 걸 연리도 알고 있다. 권은 태자 시절부터 이미 여섯 명이나 되는 후궁을 뒀었다. 사내로서의 정욕이 강한 사내다. 그런데 그런 사내가 제 몸에 손을 대지 않았다는 사실에는 의심을 품을 수밖에 없다. ‘아버님 때문일까.’ 지금 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아마 자신의 부친인 윤문일 것이다. 좋은 의미에서든 나쁜 의미에서든 자신의 아버지를 배제하지 않고서는 지금 조정을 장악할 수가 없으니 권은 부친의 눈치를 봐서 자신을 정중하게 대우해 주는 것일 수도 있다. 아직 정식 국혼 전이고 황후 책봉 전이다. 그러니까 지금 제 몸에 손을 대는 것은 그리 좋은 모양새는 아니다. 무엇보다 그의 욕구를 풀어 주기 위한 여인들은 넘치고 넘칠 테니 말이다. ‘평생 정이 들 일은 없겠지.’ 혼자 이런 고민을 해 봤자 아무 소용이 없다는 걸 연리도 안다. 어차피 정이 아니라, 사랑이 아니라 서로의 목적을 위한 부부 관계라는 걸 왜 모르겠는가. 하지만 이젠 연리에게 그 목적이라는 것이 희미하다. 유배를 가기 전에는 황궁의 안주인, 미래의 황제의 모후, 그리고 태후, 권력의 정점이라는 목적이 연리에게도 있었지만 이제 그건 섬의 파도와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가장 바라는 것. 목적. ‘내가 가장 바라는 것…….’ 떠오르는 것은 단 하나뿐이다. ‘지금쯤 어찌하고 있을까…….’ 그 사내는 그 섬에서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비어 있는 제가 살던 집에 한 번 정도는 들러 줬을까. 어쩌면 텅 빈 그 집 마당에서 한참 동안 배회하다가 돌아가는 일을 매일 반복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럴 것만 같다. 무뚝뚝하지만 누구보다 정이 깊은 사내이니 말이다. 그 사내에게는 정이 있다. 한번 정을 주면 도무지 그 정을 거두지 못하는 그런 사내가 그 섬에 있다. 돌아갈 수 없는 그 섬에, 이제 만나지 못하는 그 사내가 있다. 자신들은 짐승 같은 짓을 저질렀다. 황후가 될 몸으로 외간 사내와 통정을 했다. 권이 알면 분명 저를 용서치 않을 거라는 걸 연리도 안다. 만약 다른 상황에서 자신이 그런 일을 전해 들었다면 분명 짐승 같은 이들이라고 손가락질했을 것이다. 그러나 짐승이 되어도 좋으니 그 사내를 만나고 싶다. ‘도망칠 것을…… 그냥 함께 도망치자 그럴 것을…….’ 때늦은 후회다. 아니, 어차피 도망칠 곳도 없었다. 이 땅 어디로 도망을 친단 말인가. 권은 절대로 자신을 포기하지 않을 터인데, 도망을 어디로 치겠는가. 도망칠 곳도, 갈 곳도 없다는 걸 알기에 그러지 못했다.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내를 위해서. 그러니까 이제는 이 모든 것을 그저 자신이 감당해야만 한다. 무릎을 끌어안고 무릎에 얼굴을 파묻은 연리의 어깨가 조금씩 흔들리고 있었다. * * * 황궁의 분위기는 날선 칼날 위를 걷는 것처럼 아슬아슬했다. 선황을 따르던 이들이 전부 끌려가 목숨을 잃은지라 다들 입조심을 하는 것이 역력했다. 게다가 아직 숙청이라는 것은 끝나지 않았다. 연리가 직접 본 것은 아니지만 도성의 저자거리에 곡소리가 끊이지 않는다고 전해 들었다. 그걸 전해준 것은 유모였다. 다행히 유모는 무사했었다. 부친이 힘을 써 주어서 유모도 황궁으로 들어와 연리의 곁에서 시중을 들게 되었다. “매일 같이 사람이 죽어 나간다네요. 에휴…….” 유모가 안쓰러움 가득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폐하와 재상 어르신을 원망하는 소리가 하늘을 찌른다고 들었어요, 아가씨. 재상 어르신은 왜 그러시는 건지…….” 연리는 자신이 왜 예전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곧장 황궁으로 오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얼마 전에 알게 되었다. 부친을 향한 원성이 높아 혹시 무슨 일을 당할까 싶어 황궁으로 곧장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만큼 지금 도성 안에서 부친에 대한 소문은 좋지 못하다. 그건 부친이 숙청을 지휘하고 있기 때문이다. “죄송해요, 아가씨. 하지만 어린 아이들까지 죽인다는 소리를 들으니 마음이 편치 않네요.” 유모가 소매 끝으로 눈가를 훔쳤다. “알아. 나도 그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 연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밖이 소란스러웠다. “이게 무슨 소리지?” “제가 나가 볼게요, 아가씨.” 황후의 처소에서 살고 있지만 연리는 아직 정식 책봉을 받지 않았기에 그녀를 부르는 호칭은 아가씨다. 윤문의 딸 윤연리이기 때문이다. 소란을 떨며 연리를 찾아 황후전까지 온 사람은 다름아닌 양 재인이었다. “제발 살려 주십시오, 아가씨!” 양 재인이 눈물 콧물로 범벅이 되어 연리의 발에 매달렸다. “울지만 말고 무슨 일인지 말해 보세요.” 갑작스런 상황에 연리가 무척 당황했다. 양 재인은 권의 후궁들 중에서 자식을 낳은 유일한 사람이었다. 첩지를 받은 두 명의 후궁 중의 한 명이기도 했다. “폐하께서 제 딸을 죽이려 하십니다. 아가씨, 제발 제 딸을 살려 주시어요.” 양 재인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있었다. “폐하께서 왜 그런 일을 하신단 말인가요?” 권이 양 재인의 딸을 죽이려 한다고? 그 아이는 권의 딸이다. 그런데 왜 딸을 죽이겠는가. “첫째가 딸이면 불길하다 하여 첫째는 아들을 얻어야 하신다며 제 딸을, 그 아이를 기어이 죽이려고 하십니다.” “그런 말도 안 되는…….” 첫째가 딸이라 불길해서 그 딸을 죽이고 아들이 얻으려 한다고? 권이 정말 그런 미친 생각을 한 것일까. “내가 폐하를 만나 보겠으니, 일단 진정하세요.” “폐하께서 벌써 제 딸을 데려갔습니다, 아가씨. 아가씨라면 제 딸을 살려 주실 수 있으시니까 제발…….” 저를 붙잡고 애원하는 양 재인을 안타까운 눈으로 쳐다보던 연리가 유모에게 그녀를 부탁하고 황후전을 나섰다. 사실 연리도 불안했다. 권이 제 말을 들어준다는 보장이 없다. 그러나 지금은 무엇이라도 해야만 한다. 무고한 아이가 딸이라는 이유로 죽게 내버려 둘 수는 없다. 권이 그 아이를 데려갔다는 말에 권이 사용하고 있는 대궁으로 걸음을 서둘러 도착했을 때였다. 마침 권이 중문을 나서고 있었다. “폐하!” 마음이 급한 나머지 연리가 권을 소리쳐 불렀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오?” 연리가 대궁까지 온 것이 의아했는지 권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저건…….’ 가까이 다가오는 권을 바라보던 연리가 그의 뺨에 튄 핏자국을 발견했다. 뺨만이 아니었다. 그의 손에도, 의복에도 피가 튀어 있었다. ‘설마…….’ 연리의 손이 덜덜 떨렸다. 아니라고 믿고 싶지만 최악의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이미 알아버렸다. “폐, 폐하. 그 피는…….” “아, 이것 말이오?” 손에 묻은 피를 별것 아닌 것처럼 힐끗거린 권이 피 묻은 손을 바지에 쓱쓱 문질러 닦았다. 그리고 섬뜩하게 웃었다. “홍 재인이 회임을 했소. 다음 달이면 해산을 하는데 태어날 아이가 아들이냐는 물음에 딸이 장녀로 있으니 그 음기가 너무 강해 아들이 태어나기 힘들다고 무당이 말하지 않겠소. 그래서 아들이 태어날 수 있게 걸리적거리는 방해물을 없애 버린 것뿐이요.” 권은 아무렇지 않게 웃었다. “걱정 마시오. 홍 재인이 아들을 낳으면 그 아들을 빼앗아다 그대의 품에 안겨 주겠소. 장자는 그대의 자식이 될 것이니 아무 염려 마시오.” 입에서 나오는 말은 사람의 말이 아니다. 사람이라면 저런 말을 할 수가 없다. 태어날 아이를 위해 지금 있는 아이를 죽이고, 그리고 갓 태어난 아이를 생모에게서 빼앗아 제게 주겠다고?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할 수 있는 걸까. “장자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오. 그리고 장자는 반드시 황후의 자식이어야 하니, 어쩌겠소. 그대가 아들을 낳아 준다는 보장도 없으니 내가 홍 재인이 낳는 아들을 그대에게 안겨 주는 수밖에.” 권이 성큼 다가와 연리에게로 몸을 숙였다. “지금 그대 뱃속에 어떤 놈의 씨가 들어있는지 알 수 없으니 말이오.” 권이 제 귀에 속삭이는 말에 연리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천한 놈과 놀아나니 좋았소? 그동안 그 섬에서 그 천한 놈과 놀아나느라 얼마나 좋았소? 하지만 그대는 내 황후가 되어야 하니 나는 다 눈 감아 주기로 했소. 너그럽게 말이오.” 다 알고 있었다. 권은 삭과 자신의 일을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연리의 눈동자가 두려움에 크게 흔들렸다. “황후가 되어 내 자식을 잘 키우면 나는 옛일은 다 묻어 둘 생각이니, 그리 아시오.” 권이 연리의 어깨를 두 손으로 꽉 눌렀다. “하지만 그놈은 그냥 둘 수 없지.” “폐하……!” 놀란 연리가 다급한 눈으로 권을 쳐다봤다. “그래서 우리가 떠난 다음에 그 섬을 전부 불태워 버리라고 했지. 섬을 모두 태워 버리고 섬에 살던 것들을 전부 죽이라고 말이다. 그놈은 말할 것도 없지. 그놈은 특별히 죽여서 사지를 찢어 소금에 절여 황궁으로 가져오라고 했으니 사나흘 뒤에는 그놈이 여기에 올 거다. 물론 그대가 알고 있는 모습은 아니겠지만. 내 특별히 그놈의 좆을 잘라서 소금 항아리에 넣어 황후의 궁으로 가져다 놓으라 했으니 사나흘 뒤에 항아리 하나가 황후전으로 갈 것이다.” 연리가 그만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이빨과 턱이 덜덜 떨리고 얼굴은 흙빛으로 질렸다. 아니다. 이건 사실이 아니다. 그 섬이 불탔을 리가 없다. 삭이, 그 사내가 죽었을 리가 없다. “아, 안 돼…….” 하지만 이미 벌어진 일이라면. 이미 모든 것이 다 끝났다면. ‘안 돼…….’ 연리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이건 전부 자신의 죄다. 자신이 그 사내에게 마음을 줘서, 자신이 그 사내에게 흔들려서, 그 사내에게 안겨 버려서 이렇게 된 것이다. 전부 제 죄다. “안 돼…….” 이 죄를 어찌 갚아야 하나. 이것을 어찌해야 하나. 멀리서 권의 웃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짓밟고 망가뜨리는 괴물의 웃음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