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8)

6. 황후

 삭이 부엌으로 들어와 솥뚜껑을 열어 봤다.

역시 밥이 없다.

물 항아리에는 물도 없다.

“이래서야 이 섬에서 어찌 산다고.”

혀를 쯧쯧 찬 삭이 부엌에서 나와 방문 앞에 슬쩍 앉았다.

‘아직 자고 있으려나?’

어젯밤 늦게 돌아왔으니 연리는 아직까지 자고 있을 수도 있다.

원체 잠이 많은 여자다.

‘깨울까? 그냥 밥만 해 놓고 갈까?’

삭이 한참을 망설였다.

연리를 깨워서 제집으로 데려가 밥을 먹일 것인지 아니면 그냥 자게 내버려 둘 것인지 아직 마음을 정할 수가 없다.

‘슬슬 바다에 나가 봐야 하는데…….’

삭은 이제 곧 바다에 나가 봐야 한다.

바다에 나갔다 돌아오면 해거름이 될 터인데, 그러면 그때까지 연리는 굶을 수도 있다.

혼자서는 정말 아무것도 못 하는 여자다.

한심하고 바보 같다.

‘밥이나 차려 놓을까? 밥을 차려 놓고 가면 혼자서 먹을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던 삭이 결국에는 밥을 지어 놓고 가는 것으로 결론을 내렸다.

사실 밥은 이미 지어 놓았다.

삭이 발 아래에 둔 바구니 안에는 조금 전에 지은 밥과 반찬이 들어 있다.

‘이걸 두고 가면 먹겠지?’

사내가 제 앉은 옆에 바구니를 두고 그 옆에 보따리 하나를 놓았다.

이건 어젯밤에 그녀가 부탁한 것이다.

천과 솜.

천이 새것이 아니고 솜도 새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이건 예전에 어머니가 살아 계실 때 ‘삭이 옷을 지어 줘야지.’ 하며 뭍에 나가 사 온 것이다.

그러나 어머니는 끝내 이 천과 솜으로 새 옷을 짓지 못하고 돌아가셨다.

그리고 오랫동안 이 천과 솜은 보따리 안에 넣어진 채로 구석에서 먼지가 쌓여 왔었다.

그걸 오늘 아침에 먼지를 털고 가져와 봤다.

‘내 치수는 알려나…….’

제 옷을 지어 준다고 했는데 제 몸 치수를 알려나 모르겠다.

‘잘된 일이지.’

삭이 방문을 쳐다봤다.

어젯밤 그녀는 이곳을 떠난다는 말을 했다.

그 태자라는 이가 데리러 온다고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없었다.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할지 알 수가 없어서 난감했었다.

좋은 일이고 잘된 일인데, 마음은 왜 이렇게 무거운지 모르겠다.

어차피 자신과는 인연이 아닌 여자다.

자신과는 모든 것이 다르고 인연이 될 수가 없었다.

병사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괜히 떠들어 대는 것뿐이지, 어차피 제 사람이 될 인연은 아니었던 것이다.

딱 잘라서 자신이 그녀에게 해 준 것도 없고, 그녀와 자신이 인연이 될 만한 일도 없다.

제가 내세울 것은 또 무엇이고, 잘난 것 하나 없는데 그런 어여쁜 여자를 욕심내는 것이 나쁘지 않겠는가.

욕심도 그런 욕심을 부리면 안 된다.

평생 이 섬에서 욕심 부리지 않고 살아왔는데 이제 와서 어울리지도 않는 욕심을 부려 흉한 꼴을 보여 줄 이유가 없다.

잘된 일이다.

그녀는 있어야 할 곳으로, 그녀가 그리워하는 사내에게로 떠나고, 자신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여전히 여기서 살아가면 그만이다.

‘바다나 가야겠다.’

사내가 일어나서 천천히 마당을 나섰다.

돌아봤지만 여전히 방문 안에서는 기척이 없다.

참 곤하게 자는 모양이다.

어젯밤의 그녀는 참 아름다웠다.

달빛이 머리에 내리는 그녀는 마치 달에서 내려온 항아님처럼 눈이 부시게 아름다웠다.

어젯밤의 그녀를 아마 죽을 때까지 머릿속에서 지워 버리지 못할 것이다.

너무 아름다워서, 너무 눈이 부셔서, 바다에 달빛이 부서지는 밤마다 그녀의 얼굴이 떠오를지도 모른다.

바다와 달과 바람을 느낄 때마다 그녀가 그곳에 있다면, 그녀가 태자를 그리워하듯이 자신도 어쩌면 그녀를 그리워하게 될까.

이건 참 이상한 마음이었다.

지금까지 느껴 본 적이 없는, 그런 이상한 마음이었다.

이 마음을 무엇이라 불러야 할지 삭은 알지 못했다.

이 마음이 무엇인지.

이 쓰라리고, 욱신거리는 마음이 도대체 무엇인지.

* * *

삭이 바다에서 돌아와 집 마당으로 들어섰을 때 방에 불이 켜져 있었다.

“누구요?”

방문을 대뜸 열자 눈에 들어온 건 연리였다.

“언제 올지 몰라서 기다리고 있었어요.”

연리를 보는 순간 기분이 나빠졌다.

왜 갑자기 기분이 나쁜 건지 삭은 이유를 알지 못한다.

그냥 얼굴을 보니 화가 나고 기분이 나빠졌다.

“왜 왔소?”

기분이 나쁘니 말이 험하게 나온다.

“이걸 드리려구요.”

연리가 슬그머니 내민 것은 옷이었다.

제 옷이 아닌 새로 지은 옷이다.

반나절 만에 옷을 뚝딱 잘도 만들어 냈다.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여자인 줄 알았는데 반나절 만에 솜옷 한 벌을 지었다.

“왜 왔다 가면서 깨우지 않았어요?”

“뭘 하러 깨우나. 잘 자는 사람을.”

“그릇은 다 씻어 놓았어요.”

“안 하던 짓을 하고 그러오.”

“이건 겨울에 입을 솜옷이고, 그리고 이건 지금도 입을 수 있는 홑옷이에요. 천이 넉넉해서 두 벌을 지었으니 지금도 입고 겨울에도 입고 그러세요.”

“맞을지 안 맞을지 어찌 알고 마음대로 지었소?”

고맙다는 말이 나와야 하는데 이상하게 심술궂은 말만 나온다.

아무래도 오늘 낮에 먹은 것이 상했는지 속이 울렁거린다.

체해서 이런 것이다.

체해서 짜증이 나고, 심술이 나고 그냥 꼴 보기 싫은 것이 틀림없다.

“씻고 쉬어야 하니까 이제 그만 가 주면 좋겠는데.”

“네?”

“남의 집에 멋대로 불쑥불쑥 들어오지 말고 그러시오.”

“그, 그건…….”

“조금 잘해 줬다고 우리가 가족은 아니잖소. 남남이니까.”

마음에 없는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아, 안 그래도 그러려고 했어요.”

허둥거리며 일어선 연리가 밖으로 나오자 삭이 옆으로 비켜섰다.

그녀가 밖으로 나오자 삭이 방으로 들어가서는 대뜸 문을 닫았다.

‘내가 뭘 하는 짓인지…….’

지금 제가 하고 있는 행동이 얼마나 우스운 것인지 삭도 안다.

삭은 바보가 아니다.

자신이 체한 것이 아니라는 것도, 이 짜증 나는 기분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왜 가슴이 쓰라리고 욱신거리는지 그 이유를 정말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알고 있지만 모르는 척할 뿐이다.

알아 봤자 좋은 것이 없어서, 아는 척해 봤자 아무 쓸모가 없어서 제 마음을 외면하고 있을 뿐, 지금 자신이 왜 이렇게 화가 나는지 잘 안다.

“…….”

삭이 연리가 두고 간 옷을 들어 올렸다.

잘 알지는 못하지만 바느질이 참 잘 된 것만은 알 수 있다.

잘 지어진 옷이다.

이걸 입을 수 있을까.

‘밥은 먹었을까.’

삭이 얼른 다시 방문을 열었다.

그러나 마당에 연리는 보이지 않았다.

부엌에 들어가 본 삭이 당황한 이유는 아궁이에 불이 지펴져 있고 솥이 뜨거웠기 때문이다.

솥뚜껑을 열어 보니 밥이 지어져 있다.

그리고 옆의 작은 솥에는 그럴듯한 탕도 함께 끓고 있었다.

연리가 지은 밥이다.

아마 저와 함께 먹으려고 지은 것이 아닐까.

그런데 자신은 그녀를 쫓아 보냈다.

어떤 심정으로 그녀는 돌아갔을까.

‘불러와야겠다.’

결국 삭이 서둘러 마당을 나섰다.

얼른 그녀를 따라가서 자신이 오늘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바보 같은 변명을 좀 하고 그녀를 데려올 마음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오늘따라 발바닥에 자꾸 박히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더 걸음을 서둘러야 하는데 자꾸만 발이 느려지는 것이 화가 났다.

가장 화가 난 것은 그녀에게 살갑게 말하지 못한 것이다.

그녀는 잘못한 것이 없는데, 나쁜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여자인데 자신은 괜히 화를 냈다.

‘미안하다고 말하고, 내가 오늘 정말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고 변명을 하고 밥을 같이 먹자고 한 다음에 옷도 고맙다는 말을 꼭 해야…….’

차마 그녀가 좋아서, 그녀를 좋아해서, 그래서 그녀가 떠나는 것이 싫어서 화가 났다는 말은 할 수 없다.

이런 자신이 감히 그녀를 좋아해서 그랬다는 말은 절대로 못 한다.

‘벌써 돌아갔구나.’

연리의 집으로 가는 내내 그녀를 볼 수는 없었다.

그녀는 생각보다 빨리 집으로 돌아간 것이다.

‘뭐라고 말을 꺼낼까. 미안하다는 말을 먼저 할까 아니면 고맙다는 말을 먼저 할까.’

낮은 언덕을 돌아 그녀의 집이 보일 때였다.

삭이 발을 멈췄다.

항상 어두웠던 그녀의 집 마당이 지금은 훤했다.

열 개가 넘는 횃불 때문에 그녀의 집 마당은 대낮처럼 환했고 마당 밖에는 스무 명이 넘는 낯선 자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그 맨 뒤에는 삭도 아는 두 명의 병사들이 죄를 지은 사람마냥 고개를 숙이고 쭈뼛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연리는 마당에 서 있었다.

횃불에 둘러싸여 서 있는 그녀의 앞에는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그녀의 얼굴을 보는 순간, 삭은 그 사내가 바로 태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가 왔다.

그리고 자신은 너무 늦었다.

엎지른 물을 다시 담기에 늦어 버렸고 그녀에게 사과하기에 늦어 버렸다.

조금만 더 빨리 올 것을.

아니, 그렇게 화내지 말 것을.

하지만 이런 후회조차, 이미 늦었다.

* * *

“내일 아침 일찍 배를 타고 이 섬을 나갈 거요.”

“네, 마마.”

연리는 지금도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

삭의 집에서 돌아와 보니 이미 태자가 마당에 와 있었다.

처음에는 자신이 헛것을 본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헛것이 아니라 진짜 태자였다.

마지막으로 태자를 본 것이 석 달 전이다.

역모 사건이 일어나기 전부터 태자를 좀처럼 만나지 못했었다.

석 달 만에 보는 태자의 얼굴은 조금 낯설다.

원래 이런 얼굴이었나 싶을 정도로 태자의 얼굴이, 인상이 낯설다.

석 달은 긴 시간이 아니다.

그런데 왜 그 사이에 이렇게 태자가 낯설게 느껴지는 것일까.

“이런 곳에서 한 달 넘게, 정말 잘 버텼소. 버텨 줘서 고맙소.”

태자 권의 목소리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다정하다.

호랑이라고 불릴 정도로 사나운 모습을 연리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돌아가면 바로 책봉식을 치를 거요. 그러니 피곤하더라도 서둘러 돌아가서 책봉식부터 치릅시다.”

“네…….”

태자가 말하는 책봉식은 태자비의 책봉식이 아니라 황후의 책봉식이다.

황후.

태자는 이제 태자가 아니다.

역모로 폐위되고 유폐되었던 태자는 이제 황제가 되었다.

그게 무슨 의미인지 연리도 모르는 것이 아니다.

태자는 황제를 죽이고 그 자리에 오른 것이다.

친부를 아들인 그의 손으로 죽이고 황위를 강탈하여 기어이 황제의 자리에 오르고 저를 데리러 왔다.

제일 먼저 저를, 그것도 사람을 보낸 것이 아니라 직접 데리러 왔다는 사실에 감격해야 하지만 마냥 감격하고 있을 수 없는 것은, 그의 손에 묻은 피 때문이다.

“윤 재상도 낭자를 빨리 보기를 바라고 있소. 부친이 많이 보고 싶지 않았소?”

“건강하시지요? 아버님은?”

“유배 생활이 쉬웠겠소. 하지만 지금 건강을 되찾고 있으니 너무 염려 마시오.”

“네…….”

“이 섬에서 그나마 묵어 갈 만한 집을 비워 놓으라 하였으니 그곳으로 옮깁시다.”

“저, 저는…….”

“무슨 문제라도 있소?”

“저는 마지막 밤은 이 집에서…….”

“정이라도 들었소?”

“네…….”

연리가 고개를 숙이고 작은 목소리로 기어들어 가듯 대답했다.

태자는 무서운 사람이 아닌데 이상하게 무섭게 느껴지는 것은 그가 황제를 죽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기 때문이리라.

연리가 기억하는 황제는 좋은 사람이었다.

연리는 일찌감치 태자비로 간택 받았었고 간택 후에 주기적으로 문안 인사를 위해 황궁을 출입하며 황제와 황후를 배알했었다.

황제는 항상 너그러웠으며 황후 역시 무척이나 인자한 성품이었다.

자신이 태자비가 되어 입궁하면 황제와 황후가 제 든든한 뒷배가 되어 줄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은 것은 그런 이유도 있었다.

그랬었는데 태자가 역모를 일으켰다는 것에 첫 번째로 놀랐고, 황제가 대노하여 태자를 폐위하고 유배를 보낸 것에 두 번째로 놀랐고, 지금 다시 놀란 것은 태자가 다시 역모를 일으켜 이번에는 직접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황제의 자리에 오르며 이전 황제를 죽였다는 사실에 적잖게 충격을 받고 있다.

아무리 막다른 처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혈육을, 낳아 준 부모를 죽일 수 있을까.

아비의 피를 손에 묻힌 사람을 어찌 봐야 하는지 연리는 아직 혼란스럽다.

사람들이 아무리 태자를 가리켜 호랑이 같다고 하고, 무섭고 사납다고 해도 연리는 태자를 그렇게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었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상할 정도로 태자가 낯설고, 무섭고, 숨이 막힌다.

태자의 눈빛이 이런 눈빛이었나 싶다.

이렇게 섬뜩한 눈빛을 가진 사람이었나 싶다.

자신의 기억 속에 있는 태자와 지금 제 앞에 있는 태자가 동일 인물이 맞는 것일까.

얼굴은 같은 사람인데 왜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는 것일까.

왜 자꾸 도망치고 싶어지는 것일까.

‘내가 괜한 생각을 하는 거야. 다 이유가 있어서 그렇게 한 것이겠지. 아버님도 동의를 하셨으니까 지금 나를 기다린다고 하시는 거겠지.’

연리가 애써 마음을 붙잡았다.

이제 내일이면 이 섬을 떠나 돌아가서 아버지를 만날 수 있다.

유모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이 이제 제자리로 돌아가는데, 긴 악몽을 꾼 것처럼 이 섬을 떠나 이제 원래의 자리로, 아니 황후가 되는 자리로 돌아갈 수 있는데 이런 생각을 하며 태자를 의심하는 것은 바보 같은 짓이다.

“이 집에서 마지막 밤을 보내고 싶소?”

“네…… 마마…… 아니, 폐하…….”

이제 태자를 마마라고 불러서는 안 된다.

태자가 아니라 황제라는 것을 자꾸만 잊어버린다.

황제. 참 낯선 호칭이다.

“그렇다면 그대를 위해 내가 배려를 해 주겠소. 오늘 밤은 이 집에서 마지막으로 보내시오. 대신 내일 아침 일찍 배가 뜨니, 새벽에 데리러 오겠소. 의복을 두고 갈 것이니 미리 갈아입고 기다려 주시오.”

“네…….”

태자는 이 작고 초라한 집에서 단 하룻밤도 머물 생각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

당연히 그럴 것이다.

지금까지 태자도 유배 생활을 했을 것이다.

자신의 유배 생활도 힘들었지만 태자의 유배 생활은 또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러니 유배 생활을 떠올리게 하는 이런 작고 초라한 집에서 단 하룻밤도 머물기 싫어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내일 봅시다.”

그 말을 남기고 태자가 그를 따르는 자들과 함께 섬의 북쪽으로 떠나자 다시 작은 집에 홀로 남은 연리가 방 안에 덩그러니 놓인 보따리를 쳐다봤다.

보따리 안에는 새 옷과 새 신발, 그리고 장신구와 분첩, 연지 같은 것들이 들어 있었다.

이 섬을 떠나기 전에 말끔하게 단장을 하라는 뜻이다.

‘드디어 떠나는구나…….’

이렇게 빨리 떠나게 될 줄은 몰랐다.

머잖아 떠나게 될 것이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 ‘머잖아’가 오늘, 아니 내일이라는 것은 예상하지 못했다.

너무 빨리 그날이 닥쳐 왔다.

기쁘기만 할 줄 알았는데 마음은 왜 이렇게 무거울까.

이 섬에 정이라도 든 걸까.

정들 것이 없는 섬인데, 그런 이 섬에 무슨 정이 들어서 떠나려는 아침을 두고 마음이 이렇게 무겁고 착잡한 것일까.

‘왜 화를 냈을까…….’

연리가 그 사내를 떠올렸다.

삭.

정오 즈음에 늦잠에서 깨어나 보니 그 사내가 다녀갔었다.

저를 위해 마련한 밥과 천, 그리고 솜을 두고 간 것을 보고 서둘러 옷을 짓기 시작했었다.

마치 뭔가에 홀린 사람처럼 옷을 지었었다.

지금 생각하니 이런 일이 있으려고 그렇게 홀린 것처럼 하루 종일 쉬지 않고 옷을 지은 것이 분명하다.

사내의 치수는 대충 어림짐작으로 지었다.

품을 조금 넉넉하게 했으니 충분히 잘 맞을 것이다.

언제 가져다줄까 생각하다가 그 사내의 집으로 갔더니 아직 돌아오지 않았기에 빈집에서 서성거리다가 문득 저녁밥을 지어 놓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까지는 항상 사내가 차려 주는 밥을 얻어먹기만 했었다.

그래서 한 번 정도는 제 손으로 밥을 차려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것 역시 오늘 이런 일이 생기려고 그런 마음이 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동안 어깨너머로 봤던 것들을 하나씩 직접 하며 내내 그 사내를 생각했었다.

서툴게 밥을 짓고 탕을 끓인 후에 그 사내의 방에 앉아 그를 기다리는 동안 그 사내만 생각했었다.

고맙다는 말을 어찌할까 고민도 했었고, 그가 아니었다면 자신은 버티지 못했을 거라는 말을 어떻게 해야 부끄럽지 않을까 고민도 많이 했었다.

그러나 정작 그 사내가 돌아왔을 때는 그런 말은 한마디도 꺼낼 수 없었다.

그가 갑자기 화를 냈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삭의 모습도 이상한 날이었다.

지금 다시 생각해도 그가 왜 제게 화가 났는지 그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자신이 뭘 잘못한 것일까.

허락 없이 집에 들어가서? 마음대로 밥을 지어 놓아서? 그런 것이 아니라면 왜 제게 그렇게 화를 냈을까.

원래 말투가 험하고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짜증을 잘 부리는 사내라는 걸 알고 있지만 오늘은 다른 날과 달랐다.

오늘은 정말 제게 화가 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너무 당황해서 다른 말은 하지도 못하고 왔는데, 그게 마지막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이제 다시 볼 시간은 없겠지.’

아침 일찍 이 섬을 떠나게 되면 그를 만나서 그동안 고마웠다는 말을 할 시간도 없다.

그렇게 화를 내는 그를 본 것이 그와의 마지막이다.

그런 식으로 끝나고 말았다.

“…….”

연리가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가슴이 답답해서 머리까지 지끈거린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고, 숨을 쉬기 힘들 정도로 가슴이 아프다.

‘만나고 올까…….’

마음이 초조해졌다.

‘만나서 내일 아침 떠난다는 말만 하고 올까.’

그 사내의 집은 지척에 있다.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마음만 먹으면 얼른 다녀올 수 있다.

제가 내일 떠나게 되었다고 하면 그 사내도 화를 풀고 제 마지막 인사를 들어 주지 않을까.

‘우리가 가족도 아니고.’

‘남남.’

그 사내가 제게 한 말이 계속 머릿속에 맴돈다.

그 사내의 말은 틀린 것이 없다.

자신들은 가족이 아니다. 그러니까 남남이다.

그가 자신에게 너무 잘해 주어서 모르는 사이에 자신은 그를 가족이라 여겨 버린 것일지도 모른다.

가족이 되어 버린 것처럼, 가족 이상이 되어 버린 것처럼 착각해 버린 것은 자신일 것이다.

그에게 의지하면서 그가 항상 자신이 손 내밀면 그 자리에 있어 주는 사람인 것처럼, 자신이 부르면 항상 달려와 주고, 자신이 위험할 때면 늘 구해 주는 그런 것이 당연하다 생각해 버린 것은 얼마나 어리석은 것이었을까.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는데, 그런 것을 당연하게 기대해서는 안 되는 사이였는데.

아무것도 아닌 관계였는데.

그런데 자신도 모르게 그는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사람인 것처럼 생각해 버린 것이다.

필요할 때면 항상 곁에 있어서, 그것이 당연한 것이라 생각해 버렸다.

당연한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인사는 하고 가자. 그래야 맞는 거야.’

연리가 마음을 굳혔다.

내일 떠나면 이 섬으로는 돌아올 일이 없다.

그러니까, 마지막으로 그의 얼굴을 보고 고마웠다는 인사는 하고 와야 한다.

제게 화난 것이 무엇인지 모르겠지만 저를 용서해 달라고 말을 하고 그에게 자신의 진심을 말해 주고 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내내 그를 떠올리며, 이 섬을 떠올리며 마음이 아플 것이다.

‘다녀오자. 아직 늦지 않았을 테니까.’

그는 늦게 잠든다.

아직 잠들지 않았을 것이다.

연리가 마당으로 나왔다.

조금 전까지 사람들과 횃불로 가득했던 마당은 언제 그랬냐는 듯 어둠에 잠겨 있었다.

아무도 없어서 다행이었다.

만약 태자가 있었다면 자신은 삭을 만나러 가지 못했을 것이다.

‘얼른 다녀오자.’

연리가 마당을 나가려고 할 때였다.

“꺄악!”

마당 한쪽에 서 있는 시커먼 것 때문에 놀란 연리가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사내다.

그 사내가 제집 마당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어둠에 가려 그의 표정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가 보려고 했는데요…….”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 걸까.

“갑자기 이런 말을 하게 될 줄 몰랐지만…….”

사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저, 떠나게 되었어요. 내일 아침 일찍…….”

사내가 뭐라고 말해도 좋으니 대답을 해 주면 좋겠다.

하지만 사내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은혜는 꼭 갚도록 할게요.”

하고 싶은 말은 이게 전부일까.

정말 이게 다일까. 남겨 놓았다가 후회할 말은 없을까.

“다시 보진 못하겠지만…… 당신과 함께 본 밤바다는 잊지 못할 거예요. 달빛이 아름다운 밤마다 당신을 기억할게요.”

“기억하지 마시오.”

그제야 사내가 대답했다.

화가 난 목소리는 아니다.

그렇다고 기뻐해 주는 목소리도 아니다.

사내의 목소리는 담담한 것 같지만 무거웠다.

“이 섬에서 나가면 그냥 다 잊어버리고, 없었던 일처럼.”

“그게 되나요. 어떻게 없었던 일이 되나요.”

“잊으면 그만이지.”

“못 잊어요. 당신도, 이 섬도, 이 섬에서 있었던 일도. 당신이 내게 해 준 일들도.”

“다 두고 가시오. 그런 기억들은 여기에 다 두고 가고, 섬을 나갈 때는 하나도 가져가지 마시오.”

“왜요? 왜 그래야 하는데요?”

연리는 사내를 쳐다만 볼 뿐 그에게 다가가지 않았다.

사내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둠 속에서 그녀를 보고만 있을 뿐 다가오지 않고 있다.

서로가 보이는 거리에 서 있는데, 마치 닿지 않는 곳에 서 있는 것처럼 서로 보고만 있다.

“왜 기억을 가지고 가면 안 되는 건데요?”

사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연리의 안에서 점점 마음이 끓어올랐다.

이 마음이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화가 나는 것도 아니고, 초조한 것도 아니고, 착잡하고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는 이 마음의 이름이 무엇일까.

해야 할 말이 있는데, 꼭 해야 하는 말이 있는데 그걸 찾지 못하는 기분이다.

“좋은 기억이 아니니까.”

사내가 찾아낸 대답은 연리의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게는 좋은 기억이에요.”

“나한테는 하나도 좋지 않아.”

“내가 그렇게 싫었어요? 귀찮았어요? 귀찮았지만 잘해 준 건가요?”

“여기서 살 줄 알았지.”

사내의 입에서 뜻밖의 말이 나왔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연리의 손에서 힘이 빠졌다.

“여기서 평생 살 줄 알았지. 떠날 줄 몰랐지. 그러니까 마음을 줬지 떠날 걸 알았으면 마음 같은 건 한 줌도 주지 않았을 거요.”

지금 사내의 말은 무슨 뜻일까.

“떠날 걸 알았으면 정도 주지 않았을 거요. 그러니까 떠날 때에는 내가 준 정은 놓고 가오.”

한 달이 넘도록 자신이 저 사내에게서 받은 것은 ‘정’이다.

저 사내의 마음이다.

그것이 제 안에 오롯이 담겨 이 섬을 떠나려는 지금 마음이, 발길이 떨어지지 않는 것이다.

마음이 무거운 이유를 연리가 이제야 알았다.

저 사내의 정이, 마음이 제 안에 담겨서 이렇게 마음이 무거운 것이다.

저 사내가 제게 준 마음이 쌓이고 또 쌓여서,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쌓여서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을 정도로 마음이 무거워져 버렸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을 무겁게 정으로 채워 놓고 다 두고 가 버리라고 말하는 사내가 원망스럽다.

마음을 달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마음을 줘 놓고, 이제는 그 마음을 두고 가 버리라고 말하는 사내가 너무 얄밉고 원망스럽다.

이 마음을 가지고 가지도 못하게 다 두고 가라는 말이 어찌 이리 원망스러울까.

“못 두고 가겠어요. 다 가지고 갈 거예요.”

연리도 부아가 났다. 오기가 치밀었다.

“두고 가라니까.”

“줄 때는 당신 정이었을지 몰라도 내 마음에 들어온 이상 내 것이니까 가지고 갈 거예요. 하나도 남김없이 전부 다.”

“그걸 가지고 가서 무엇에 쓰려고 그러오? 이제 높은 분이 될 사람이 그런 것을 가지고 가서…….”

사내의 목소리가 조금씩 격해지고 있는 것을 연리도 느꼈다.

그리고 제 목소리도 점점 격해지고 있다.

더는 아무렇지 않은 척을 할 수 없는 것은 저도, 사내도 마찬가지이리라.

“그러면, 가지 말까요?”

연리가 기어이 그 말을 해 버렸다.

그 말을 하는 순간 무거웠던 가슴이 조금은 숨통이 틔었다.

“떠나지 말까요? 계속 여기에 있을까요?”

황후가 되지 말까.

태자를 따라가지 말까.

그냥 여기서 이 사내와 살까.

굳이 태자를 따라가야 하는 이유가 뭘까.

그렇게나 태자를 그리워했지만, 그래서 그가 준 허리띠도 소중하게 간직을 했었지만. 그 허리띠를 꺼내 보지 않은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 허리띠가 있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그런데도 태자를 따라가야 하는 것일까.

이제 태자는 제게 너무 낯설고 두려운데, 그런데도 그와 함께 가는 것이 옳은 것일까 연리는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 물음을 이 사내에게 대입하면 답은 명확하다.

여기에 남을까? 질문을 던지면 그러고 싶다는 답이 명확하게 나온다.

태자에게서 나오지 않는 대답이 이 사내에게서는 바로 나온다.

지금 이 순간, 자신의 마음이 향해 있는 곳은 이 사내다.

태자가 아니라, 이 사내 삭이다.

“그냥 당신과 살까요?”

“정말 그러라고 하면 어쩌려고 그러시오.”

사내가 어둠 속에서 벗어나 그녀에게로 다가왔다.

그가 가까워질수록 연리의 숨이 막혔다.

그의 눈빛에, 표정에 숨이 막히고 시야가 흔들렸다.

지금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조차 알 수 없다.

“말해 봐요. 내가 떠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만약 이 사내가 다시 한번 제게 마음을 다 두고 떠나라고 말하면 더는 연리도 고집을 부리지 않을 생각이다.

사내의 말대로 마음은 두고, 이 섬은 잊고 태자와 떠나 황후로 살아갈 것이다.

이 사내가 제게 한 번만 더 가라고 하면,

“아니면 이대로 떠나서 당신의 이름도 잊고, 당신과 함께 본 바다도 잊고, 당신이 해 준 모든 것을 다 잊어버리고 살까요?”

“당신 마음은 어디에 있소.”

한 걸음만큼의 거리까지 다가온 사내가 그리 물었다.

“당신 마음은 먼 곳에 있지 않았소. 태자라는 이에게 있지 않았소. 그러니 당신 마음이 머문 곳으로 가시오.”

“내 마음은…….”

자신의 마음이 머물고 있는 곳.

그곳이 태자일까.

정말 그럴까.

연리가 심호흡을 했다.

이제 자신의 마음의 행방을 정해야 한다.

“여기에 머물고 있는 걸요.”

연리가 손을 들어 삭의 가슴을 눌렀다.

손가락의 끝이 그의 가슴을 누르는 순간 연리는 마음을 정했다.

지금 제 손끝이 닿은 곳에 제 마음이 있다는 걸 이제는 인정해야 한다.

“여기에 제 마음이 있으니까, 여기에 날 들여보내 줄 건가요? 마음이 머무는 곳으로 가라 하였으니…….”

연리가 더는 말을 이어 가지 못했다.

두 팔을 뻗은 사내가 그녀의 몸을 힘껏 껴안았기 때문이다.

강한 힘이 그녀의 몸을 감싸는 순간 연리가 기다렸다는 듯 그의 등에 매달렸다.

사내에게서는 바다 냄새가 났다.

전에는 낯설었지만 이제는 익숙해진 냄새다.

낯설고 무서웠지만 이제는 익숙해지고 친근해진 바다의 냄새. 이 사내의 체취.

그 바다의 냄새에 잠식된다 생각하는 순간 삭의 입술이 깊숙하게 맞물려 왔다.

그가 제 입술을 두드리자 연리는 주저없이 그를 받아들였다.

깊숙하게 파고든 혀가 그녀의 혀를 휘감았다.

“으응……!”

누가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따위는 전혀 없다.

지금 이 순간을 놓칠 수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어쩌면 정말 이것이 마지막일 수 있다면, 그렇다면 이 마지막 순간에 후회를 남기고 싶지 않다.

그건 이 사내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사내의 손이 옷깃을 틀어잡자 연리가 그의 등을 끌어안은 손에 힘을 줬다.

이 사내가 원하는 것, 그리고 제가 원하는 것은 같았다.

* * *

“하윽!”

방문을 성급하게 닫는 것과 거의 함께 연리의 몸이 사내의 두 팔 안에 사로잡혔다.

삭의 손이 그녀의 옷깃을 잡아 벌리자 연리의 젖가슴이 드러났다.

거칠고 딱딱한 손이 제 여린 살결을 꽉 쥐고 비틀자 연리가 뜨거운 신음을 흘렸다.

삭의 두 손은 그녀의 젖가슴을 세게 주물렀다.

힘 조절이 되지 않을 정도로 이 사내 역시 지독하게 흥분한 것이 틀림없다.

지금은 둘 다 제정신이 아니다.

이 섬의 북쪽에 태자가 있다.

그리고 자신은 내일이면 태자와 함께 이 섬을 떠나야 황후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도 지금 이렇게 이 사내와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고 있는 것이다.

들키면 둘 다 죽은 목숨이라는 걸 모르는 것이 아니다.

태자가 자신들에게 자비를 베풀어 주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안다.

하지만 그럴지라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사내를 더없이 간절히 원하고 있다.

이 사내의 여자가 되고 싶다.

“아, 하읏……!”

연리의 벌어진 입술에서 그녀가 상상도 못 했던 교성이 터져 나왔다.

꽉 짓눌린 채로 주물러지는 젖가슴에서 피어오르는 쾌감에 숨을 헐떡이며 연리가 저를 만지고 있는 사내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의 뺨도 뜨거웠다.

“하윽!”

그러나 그의 뺨을 쓰다듬은 것도 잠시, 그녀의 허리가 휘며 등이 젖혀졌다.

사내가 그녀의 허리를 꽉 쥐고 불룩 솟은 젖꼭지를 삼킨 까닭이다.

뜨거운 숨이 젖가슴을 적셨다.

축축한 혀가 젖꼭지 위를 구르고 젖무덤을 적실 때마다 날카로운 쾌감이 연리의 전신을 관통했다.

“하읏! 아! 아아!”

연리가 소리를 지르며 사내에게 제 몸을 맡겼다.

이제 다음 일은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사내에게 자신을 오롯이 맡기고 타오르고 싶다.

“아! 아아! 하으응!”

사내의 숨도 거칠어졌다.

사내가 지금 애써 신음을 억누르고 있다는 것을 연리도 느꼈다.

삭에게 빨리는 양쪽의 젖꼭지가 불에 덴 것처럼 뜨겁다.

자꾸만 휘어지는 허리를 꽉 잡고 있던 그의 손이 아래로 내려가 그녀의 허벅지를 잡아 벌렸다.

제 아래가 어찌 되었는지 연리는 모른다.

하지만 지금 제 하체가 축축하게 젖은 것은 느끼고 있다.

“아……!”

아래로 내려간 사내의 숨결이 제 음부에 닿자 연리가 기겁을 하며 소리를 질렀다.

“하으으응!”

사내의 혀끝이 제 갈라진 틈새를 핥기 시작했다.

자꾸만 튀어 오르려는 허리를 잡아 누르며 사내는 거침없이 그녀의 질구 안으로 혀를 밀어넣었다.

아찔하고 달콤한 전율에 연리의 감은 눈 안이 하얗게 점멸했다.

깊숙이 박힌 혀가 제 아래를 먹어치우고 있다.

“하아…… 하아…….”

입술을 떼어 낸 사내가 거친 숨을 내쉬었다.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상기되어 있었고 그건 아마 저도 마찬가지일 것이라 연리가 생각했다.

사내가 그의 음경을 손에 쥐었다.

전에 우물에서 본 적이 있는 음경이다.

그때는 아래로 쳐져 있던 것이 지금은 꼿꼿하게 서서 성을 내고 있다.

“아……!”

사내가 몸을 숙였다.

그의 뜨거운 것이 그녀의 질척하게 젖은 곳을 문지르자 연리의 머릿속이 엉망으로 흔들렸다.

“아아아아!”

사내의 음경이 제 몸에 구멍이라 낼 듯 꿰뚫고 들어오는 순간 연리가 번개를 맞은 것처럼 몸을 휘었다.

“아아아아!”

각오는 했지만 지금 제 몸 안으로 뚫고 들어오는 커다란 살덩이에 숨이 막혔다.

“조, 조이지 말고…… 윽……!”

사내 역시 미간을 잔뜩 찡그리고 힘겨워했다.

“너, 너무 좁아서…… 히, 힘을 주면…….”

“모, 몰라요…… 난 모르니까…… 모르니까…… 아아아아!”

사내가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안 들린다.

조이지 말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모른다.

그런 것을 어찌 생각한단 말인가. 이렇게 정신이 없는데.

“아아아아!”

뜨겁고 격렬한 것이 몸을 관통해서 제 안을 휘저어 댔다.

철벅, 철벅, 철벅-.

사내가 허리를 밀어붙일 때마다 파도의 소리가 났다.

파도가 바위에 부서지는 소리가 사내와 제가 이어진 곳에서 나고 있었다.

“아아! 하으응!”

마치 사내는 파도, 자신은 바위가 된 기분이다.

거친 파도처럼 점점 격렬하게 제게 부딪쳐 오는 사내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연리가 교성을 질렀다.

이 집이 외딴집이라 다행이었다.

누구도 이 소리를 듣지 못하니 그것 역시 다행이었다.

“아아아아!”

온몸을 뒤흔드는 격렬한 쾌감에 소리를 지르며 연리의 몸이 자지러졌다.

몸 안으로 사내의 거센 물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 * *

새벽이 밝아 올 때까지 사내는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지 않았다.

벌거벗은 채로 그녀를 품 안에 끌어안고 있던 사내가 그녀를 놓아준 것은 이제 더는 시간이 없다고 생각했을 때였다.

“나와 도망칩시다.”

몸을 일으킨 사내가 대뜸 그 말을 꺼냈다.

사내도, 연리도 밤을 꼬박 지샜다.

둘 다 한숨도 잠을 자지 않았다.

이 밤을 어찌 잠으로 보낼 수 있겠는가.

“어디로요?”

“어디든 좋으니 도망칩시다.”

“갈 곳이 없잖아요. 그리고 이 섬이 당신의 집이잖아요. 나 때문에 당신이 모든 걸 잃게 할 수는 없어요.”

이곳에 남고 싶다.

하지만 자신이 이곳에 남고 싶다 하더라도 태자가 그걸 허락할까?

어림도 없다.

만약 이 사내 때문에 여기에 남겠다고 하면 태자는 이 섬을 전부 태우고 섬의 주민들을, 이 사내까지 죽일 그런 사람이다.

그러니까 그럴 수는 없다.

이 사내를 좋아한다.

마음속 깊이 이 사내를 원하고 있고 이 사내도 저를 원하고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원한다고 해서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사내가 칼을 들어 연리가 지어 준 새 옷의 허릿단을 잘라 그것을 손에 쥐어 줬다.

“만약 도망치고 싶어지면, 있는 곳에서 벗어나고 싶어지면, 내게로 돌아오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지면 그때는 이것을 묶어 두면 당신이 어디에 있더라도 내가 그걸 보고 가겠소. 데리러 가겠소.”

사내의 말에 연리의 눈에 눈물이 핑 돌았다.

이런 말을 해 주는 사내가 있어서 다행이다.

저를 이렇게 좋아해 주어서 다행이다.

미움받지 않아서, 제가 좋아하는 사내가 이런 사내라서 다행이다.

“이 밤이 내 마지막 밤이 될 거요. 내 생에 다시 없을 유일한 밤이 될 거요.”

“저는, 그러지 못할 거예요.”

연리가 눈물을 닦으며 대답했다.

이 사내를 저를 기억하고 그리워하며 평생 혼자 살겠지만 자신은 그럴 수 없다.

태자의 여자가 되어 그에게 안기고 그의 자식을 낳고 살아갈 것이다.

“미안해요…… 당신만 품고 있을 수 없어서…….”

마지막까지 눈물을 흘리지 않으려 했지만 결국 연리가 눈물을 떨궜다.

떨어지는 눈물이 사내의 손등을 적시고 그녀의 손을 적셨다.

태자와 병사들이 그녀를 데리러 왔을 때, 그곳에 사내는 없었다.

의복을 갖춰 입고 아름답게 단장한 연리만이 태자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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