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밤, 바다
“좀 괜찮소?”
열이 펄펄 끓는 연리의 이마에 물수건을 얹어 주며 사내 삭이 걱정스레 물었다.
“그, 그냥…… 추워요…….”
춥다고 말하는 그녀의 몸은 불덩이다.
이럴 때는 이불을 덮어 주는 것이 아니라는 걸 삭도 안다.
춥다고 해서 이불을 덮어 주었다가는 열이 더 펄펄 끓는다.
어렸을 적에 자신도 이렇게 크게 몸살이 났을 때가 있다.
그때 춥다고 어머니에게 울고불고했었는데 어머니는 오히려 춥다고 우는 자신의 옷을 전부 벗기고 물수건으로 몸을 계속 닦아 주기만 했었다.
그 정성 때문인지 다음 날 아침 바로 열이 내렸던 기억을 사내가 떠올렸다.
“이 섬에는 약도 없는데…….”
이 섬에는 없는 것이 많다.
섬이니 오죽하겠는가.
없는 것은 없는 것대로 살아왔다.
약이 없으니 몸살이 나면 그냥 미음을 훌훌 끓여 먹고 몸을 닦아 주고 그렇게 버티는 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었다.
크게 다쳐도 배를 타고 뭍으로 나갈 시간에 죽을 수 있으니 그냥 상처를 꼭 싸매고 살고 죽는 건 하늘님께 맡기는 것이 일상이 된 섬이다.
그래서 지금 이 여자가 아파도 삭은 해 줄 것이 없다.
아니, 해 줄 것이라고는 딱 하나 있다.
삭이 열이 펄펄 끓는 연리의 옷을 벗기기 시작했다.
음흉한 마음을 먹어 이러는 것이 아니다.
“왜…… 왜…….”
연리가 제 옷을 벗기는 사내를 보며 눈살을 찡그렸다.
“이래야 열이 빨리 내리지. 열이 내려야 뭘 먹을 수도 있으니까 그냥 내가 하는 대로 가만히 있기만 하시오.”
사내는 망설이지 않고 연리의 옷을 전부 벗겼다.
그리고 이불도 덮어 주지 않고 물을 꼭 짠 수건으로 연리의 몸을 쓰윽쓰윽 닦았다.
“추, 추워요…… 추운데…… 너무 추운데…….”
“이래야 열이 달아나니까 추워도 참으시오.”
수건이 미지근해지면 다시 물에 적셔서 꼭 짜고 그것으로 연리의 팔다리와 겨드랑이, 그리고 아랫배와 허리를 닦았다.
“마, 마마…… 마마…….”
열 때문에 정신이 없는지 연리가 헛소리처럼 누군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마마…… 마마…….”
그녀가 부르는 것이 그 ‘태자’라는 것을 삭도 안다.
이 여자는 태자비라는 높은 사람이 될 뻔한 여자다.
운이 억세게 없어서 이런 섬에 유배를 왔다. 하루아침에 가장 높은 곳에서 이런 처지가 되어 버렸으니 마음고생은 또 얼마나 심했을까.
마음고생에 오늘 백중사리 때문에 불어난 물에 빠졌던 것이 쌓이고 쌓여 결국 이렇게 몸살이 나 버린 것이 틀림없다.
“그 마마라는 이도 당신 생각하고 있을 거요. 그러니까 얼른 나아야지. 그래야 그 마마라는 이가 당신을 보러 오면 활짝 웃으면서 만날 수 있지.”
제 말을 그녀가 들을 수 있는지 없는지 그건 삭도 모른다.
하지만 그 태자마마라는 자를 생각해서라도 그녀가 빨리 나아 줬으면 한다.
사람은 붙잡을 것이 있어야 버티는 법이다.
이렇게 열이 펄펄 끓고 정신이 없는 와중에 그 마마를 찾는 것을 보니 이 여자에게는 그 태자가 붙잡을 수 있는 동아줄인 것이 분명하다.
“당신이 그리 찾는 태자마마도 당신 걱정을 하고 있을 테니, 얼른 몸을 추슬러야지.”
연리의 몸을 닦아 주며 삭이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사실 저녁 무렵에 병사들이 다녀갔었다.
‘그 처녀하고 정분이 났지?’
‘눈감아 줄 테니까 이참에 그냥 물 한 그릇 떠 놓고 잘해 봐.’
‘그래. 누가 알겠어. 데리고 살면 그만이지. 그러다 자식 낳고 살다가 상전들에게는 여자가 물에 빠져 죽었다고 보고하면 다들 뭐 시체라도 내놓으라 하겠어?’
병사들의 말을 들으며 삭은 마음이 조금 흔들린 것이 사실이다.
이 여자와 한 달 동안 거의 같이 살다시피 했다.
하루도 빼먹지 않고 밥을 얻어먹으러 오는 여자를 막지 않은 건 삭도 싫지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와 함께 밥을 먹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었고 어차피 이 여자가 이 섬에서 죽을 때까지 나가지 못한다면 자신과 그렇게 평생 함께 밥 먹고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그렇게 생각이 들었다.
10년만 지나면 이 섬에 몇 명이나 살겠는가.
20년이 지나면 이 섬에 사는 사람은 자신과 이 여자, 그리고 병사들이 전부일 것이다.
그때가 되면 병사들도 더는 이 섬을 지키지 않고 떠날 수도 있다.
그러면 이 여자와 자신만 이 섬에 남는다.
그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서로를 의지하게 될 터인데, 차라리 지금부터 그리 사는 것도 나쁘지는 않다는 생각을 한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그 마음을 접었다.
이 여자를 살게 하는 힘은, 이 섬에서 버티게 하는 것은 그 태자라는 사내다.
마음에 이미 누군가를 담고 있는 여자를 자신이 어찌하는 것은 싫다.
이미 마음에 단단히 자리를 잡은 사내가 있는데 자신이 그 자리를 강제로 빼앗는 것은 싫다.
자신은 그저 이렇게, 열을 내리게 하고, 몸을 닦아 주고, 자신의 자리는 딱 이 자리다.
그게 더 낫다.
“빨리 낫기나 하지. 그래야 나도 집에 가서 잠을 자니까.”
삭이 괜히 퉁명스럽게 쏘아붙여 보다가 쓴웃음을 지었다.
어차피 뭐라고 말해도 듣지 못하는 여자에게 자신이 이런 말을 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도 참……사서 고생이지. 사서 고생이야.”
그러면서도 손은 계속 수건의 물을 짜서 여자의 몸을 닦고 있었다.
* * *
연리는 밤새 앓고 새벽 즈음에 열이 내렸다.
그리고 다음 날 정오가 지나서야 열이 완전히 떨어져 일어나 앉을 수 있게 되었다.
“후, 후.”
뜨거운 죽을 후후 분 다음 입 안에 넣은 연리가 죽을 우물우물 씹었다.
이 죽은 저 사내가 끓여 준 죽이다.
죽에 소라와 전복을 잔뜩 넣었고 낙지도 넣었다고 했다.
게다가 보리나 수수가 아닌 쌀로 끓인 죽이다.
이 섬에는 쌀이 귀하다.
당장 병사들이 가져다주는 곡식도 쌀이 아닌 보리와 잡곡을 섞은 것이다.
그런데 저 사내는 어디서 구해 왔는지 귀한 쌀로 죽을 끓였다.
연리가 죽을 먹으며 지금 제집 마당에서 빨래를 너는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봤다.
저 사내는 밤새 자신을 간호해 주고 지금은 저렇게 어제 젖은 옷을 다 빨아서 널고 있다.
참 부지런한 사내다.
그런데 우스운 것은 정작 자신은 저 사내의 이름을 모르고 저 사내도 자신의 이름을 모른다는 것이다.
서로 이름을 물어보지도 않고 말해 주지도 않았으니 모르는 것이 당연하다.
한 달이나 지났는데 이름도 모르다니. 이렇게 우스운 일이 또 있을까.
‘내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해 줬는데…….’
저 사내는 자신을 두 번이나 바다에서 구해 줬고 자신을 한 달이 넘게 먹여 살리고 있다.
정말 은혜도 이런 은혜가 없다.
‘나중에 이 빚을 다 갚아야지…….’
그러나 정말 금은보화로 이 빚을 다 갚을 수 있을까.
“다 먹었소?”
빨래를 다 널고 난 사내가 연리에게로 걸어왔다.
활짝 열어 놓은 방문 너머로 얼굴을 슬쩍 내민 사내가 연리의 무릎에 올려놓은 죽 그릇이 거의 다 비어 있는 것을 보고 흡족하게 웃었다.
이 사내는 예전의 기준으로 보면 참 짐승 같은 사내다.
짐승처럼 사납다는 것이 아니라 하고 다니는 모습이 다듬어지지 않은 야생의 짐승을 떠올리게 한다.
어디를 다니든 간에 신도 신지 않은 맨발로 다니고, 툭하면 웃통을 벗고 바지 하나만 걸치고 다니는 것이 누가 봐도 풀어놓은 짐승이다.
게다가 아무렇게나 자른 수염에 대충 질끈 묶어서 틀어 올린 머리카락이며, 정돈된 것이 단 하나도 없다.
손도 거칠고 살갗도 햇볕과 바닷바람에 그을려서 거무스름하다.
누가 봐도 산짐승을 생각나게 하는 사내다.
“착하게 잘 먹었네.”
사내가 그릇을 뺏더니 옆으로 휙 밀어 버렸다.
“어제처럼 보름달이 뜨는 날에는 바다에 나가지 마오. 그런 날에는 순식간에 밀물이 들어와 버리니까.”
“이름이 뭐예요?”
연리가 대뜸 물었다.
한 달 전에 물었어야 할 것을 지금에서야 겨우 물어봤다.
“내 이름? 안 가르쳐 줬나? 삭이요, 삭.”
“삭? 이름이 어째서 그래요?”
“그믐달에 떠내려와서 삭이 되었소.”
“떠내려왔어요? 이 섬으로요?”
“누가 날 버렸는지, 아니면 태풍에 파선하는 배에서 나라도 살리려고 물이 띄워 보냈는지 모르겠지만 이 섬에 떠내려와서 여기서 쭉 살았소.”
“나는 연리입니다, 윤연리.”
“이름을 알아서 뭣 하라고.”
사내가 대뜸 그리 말하고 울타리 쪽으로 걸어갔다.
그리고는 휙 돌아보더니 ‘오늘 하루는 꼼짝도 말고 그러고 있어야 하니, 어디 갈 생각은 마오.’라고 말하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가 그리 말하지 않아도 연리는 걸을 기운도 없다.
“나는 아직 할 말이 남았는데…….”
이름부터 물어봤지만 아직 더 물어볼 것이 남았다.
그런데 미처 다 묻기도 전에 저 사내가 가 버렸다.
‘이 섬에서 나가고 싶지 않나요?’ 그렇게 물어보려고 했었다.
하지만 묻지 못했다.
‘나가고 싶어 할 거야. 더 넓은 세상으로 말이야.’
그런데 마음 한편으로는 이 섬이, 이 섬의 바다가 저 사내에게는 더 잘 어울린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 * *
사내가 다시 찾아온 것은 그날 밤이었다.
사내가 끓여 놓고 간 죽을 먹고 이불을 덮고 누웠던 연리는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나야만 했다.
“나요.”
방문을 열자마자 사내가 대뜸 말했다.
이 밤에 저를 찾아올 사람이 이 사내밖에 없다. ‘나요.’라고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는 한밤중에 누가 방문을 두드려도 무섭지 않다.
이 사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 달 전에는 상상도 못 했던 일이다.
이 섬에서 이렇게 믿을 수 있는 사람이 생길 것이라고 누가 알았겠는가.
“잠깐 어디 좀 갑시다.”
“어딜요?”
“그냥, 갈 데가 있소.”
이 사내는 항상 이렇다.
친절하게 설명하는 법이 없다.
그러나 제게 해가 되는 일을 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사내가 연리를 데려간 곳은 다름 아닌 배를 댄 부두였다.
부두라고 해도 거창한 곳이 아니라 배 몇 척을 묶어 둔 것이 전부였다.
배를 묶은 밧줄을 푼 사내가 연리를 배에 태우고 노를 저어 나갔다.
“어디로 가는 건가요?”
이 사내가 설마 저를 이 섬에서 도망치게 해 주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기다려 보시오.”
사내는 계속 노를 저어 갔다.
“설마 날 버리려고 가는 건 아니지요?”
연리가 나름대로 농담을 던졌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다.
정말 무뚝뚝한 사내가 아닐 수 없다.
그렇게 얼마를 배를 저어 나갔을까.
이제는 섬은 까마득하게 멀어져 보이지도 않았다.
달빛은 어제처럼 밝았다.
“저기.”
사내가 노 젓기를 멈추더니 손으로 바다를 가리켰다.
그의 손을 따라 시선을 옮기던 연리가 그만 놀라고 말았다.
“저건…….”
밤의 바다가 눈이 부실 정도로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처음에는 그 반짝이는 것이 뭔지 몰랐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날개가 달린 물고기였다.
“물고기에 날개가…….”
어떻게, 새도 아닌데 물고기가 날개를 달고 바다 위를 나는 걸까.
셀 수도 없이 많은 날개 달린 물고기들이 달빛을 받으며 바다 위를 날아다니고 있었다.
물고기의 날개에 달빛이 부딪쳐서 바다가 온통 은빛으로 빛났다.
달빛이 무수하게 반짝이는 바다를 넋을 잃고 바라보는 연리를 사내가 물끄러미 쳐다봤다.
사실 저 광경은 이 사내가 좋아하는 광경이다.
물때가 맞으면 저렇게 날치들이 바다 위를 날아다니는 것을 볼 수 있다.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날치들의 유영은 몇 배나 더 아름다워진다.
이 섬에도 저렇게 고운 것이 있다는 걸 그냥 연리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열이 펄펄 끓을 때 연리가 태자를 찾는 것을 보며 사실 삭의 마음은 그리 좋지 않았었다.
이 섬에 마음을 둘 것이 없으니까 두고 온 것에 마음을 계속 두고 있는 것이 괜히 안쓰러웠다.
유배가 풀리지 않는 이상 그 태자라는 이를 다시 만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깝다.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이를 애타게 그리워하는 것은 옆에서 보기에도 안타까웠다.
그래서 이 섬에서 마음 붙일 수 있는 것을 만들어 주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이 섬의 좋은 것들, 이 섬의 아름다운 곳들, 보기 좋은 풍경들, 그런 것들을 자꾸 보여 주면 조금씩 이 섬에 마음을 붙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괜히 혼자 해 봤다.
이곳을 벗어날 수 없다면, 가고 싶은 곳으로 갈 수 없다면 이곳을 좋아할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삭의 혼자 생각이다.
지금은 다만 연리가 감탄하며 좋아하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이미 여기까지 온 목적은 달성했다.
뱃전에 와서 부딪치는 파도의 찰랑거리는 소리와, 날치 떼가 바다 위를 유영하는 소리가 삭의 귀를 울렸다.
그리고 그 소리에 섞여 연리가 웃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처음으로 듣는 연리의 웃음소리였다.
그건, 달빛보다 더 아름다운 소리이기도 했다.
적어도 삭에게는 그랬다.
연리는 달빛 바다 위를 날고 있는 날치 떼에 눈을 빼앗겼고, 삭은 그런 그녀에게 눈을 빼앗겼다.
그런 밤이었다.
* * *
“왜 맨발로 다녀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연리가 제 곁에서 걷는 사내의 발을 보며 항상 궁금하던 것을 물어봤다.
“이게 편하니까.”
“맨발로 다니면 발이 아프지 않나요?”
“늘 이렇게 다녀서 괜찮소.”
“여기, 옷이 찢어졌어요.”
연리가 사내의 소매를 가리켰다.
사내가 입고 있는 옷은 많이 낡았다.
찢어지면 깁고, 또 찢어지면 기워서 한눈에 봐도 너덜거렸다.
그건 이 사내가 항상 험한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 사내는 바지를 입은 채로 바다에 들어가고, 또 젖은 바지를 입고 배를 젓고, 옷을 갈아입지 않고 잡아 온 생선들을 말린다.
하루 일과가 다 끝나고 나면 우물의 물을 길어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가운 물로 전신을 헹군 다음에 집으로 돌아가 잠을 자는 것이 이 사내의 일상이라는 것을 연리도 이제 안다.
어떤 날에는 저녁에 나가 새벽에 돌아오고, 어떤 날에는 낮에 나가 저녁에 돌아온다.
아침에 나가 정오가 지나 돌아올 때도 있다.
그런 날이면 저를 위해 밥상을 미리 차려 놓고 가는 사내다.
주인이 없는 빈집에 차려진 밥상의 밥을 먹으며 연리는 사내의 집을 찬찬히 살펴보곤 했었다.
혼자 사는 집이지만 항상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 있고, 마당에는 온갖 채소들이 잘 자라고 있다.
이 사내에게 뭔가 해 주고 싶어도 자신이 해 줄 것이 없다.
뭐든지 혼자 잘하는 그런 사내이기 때문이다.
“내가 옷을 기워 드릴게요.”
연리에게도 잘하는 것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바느질이다.
옷을 짓는 것, 수를 놓는 것, 그건 연리가 가장 잘하는 일이다.
이곳에 온 후로는 바늘을 손에 쥐어 본 적이 없지만 아직 바느질하는 솜씨가 줄어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천만 있으면 이 사내의 옷도 지어 줄 수 있다.
‘옷을 지어 줄까?’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자신의 유배가 풀렸을 때 금은보화로 보답을 하는 건 그때의 문제고, 지금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건 이 사내의 찢어진 옷을 기워 주고 이 사내를 위해서 새 옷을 지어 주는 것이다.
‘하지만 천이 없는걸…….’
“이 섬은 겨울에 많이 춥나요?”
“당연하지. 섬은 원래 겨울에는 더 추운 법이요.”
“겨울에도 지금처럼 바다에 나가나요?”
“그럼, 겨울에는 밥을 안 먹고 사나?”
“겨울에는 신을 신지요?”
“왜?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거요?”
사내가 습관처럼 미간을 찡그렸지만 이제 그런 것으로 연리는 주눅들지 않는다.
“혹시 천을 구할 수 있을까요? 천과 솜을 구할 수 있으면 내가 겨울 옷을 지어 드릴 수 있는데…….”
“그런 거 필요 없소.”
사내가 딱 잘라 대답했다.
“입을 옷은 많으니까 쓸데없는 짓 하지 마시오.”
“하지만 옷이 이렇게 낡았는데…….”
사내가 입는 옷은 늘 낡았다.
아마 이 사내를 챙겨 주는 여인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새 옷을 입어도 금방 헌 옷으로 만들어 버리니까 새 옷 따위는 쓸모가 없지. 금방 찢어지고 더러워질 걸 뭐 하러 만든다고.”
“더러워지고 찢어지고 낡아질 걸 알면서도 새 옷은 항상 기분 좋게 입잖아요.”
연리가 지지 않고 대답했다.
“다시 배고파질 것을 알면서도 때가 되면 밥을 먹고, 내일 다시 잠이 올 걸 알면서도 오늘 잠을 자잖아요. 그러니까 옷이 금방 더러워지고 찢어진다고 해도 새 옷은 필요하지 않겠어요?”
“입에 기름칠만 했나. 말이 술술 잘도 나오네.”
삭이 기가 막혀 헛웃음만 쳤다.
“내 말이 틀린 건 아니잖아요.”
“애써 만든 것이 찢어지면 미안해서 그러지.”
“미안한 것 없어요. 신세는 내가 많이 진 걸요. 그걸 어떻게 다 갚을까 모르겠어요. 너무 많이 신세를 져서…….”
“신세는 살면서 갚으면 그만이고…….”
사내가 뒷말을 흐렸다.
그런 사내를 보며 연리가 태자가 제게 보낸 편지를 떠올렸다.
이 사내는 제가 이 섬에서 영영 살 것이라 생각하는 걸까. 아마 그럴 것이다.
하지만 태자가 그런 편지를 보내올 때는 그럴만한 계획과 자신감이 있어서가 분명하다.
태자는 그런 성격이다.
실행할 생각이 없으면, 결단이 내려지지 않았으면 그런 편지를 애당초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그 편지는 이제 곧 데리러 올 것이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으라는 뜻이다.
태자는 곧 온다.
머잖아, 가까운 시일 안에 태자는 분명히 온다.
“살면서 신세를 못 갚으면요?”
이 사내에게는 미리 알려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동안 그렇게 신세를 졌는데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이 떠나 버리면 이 사내는 무슨 생각을 할까.
“왜 못 갚을 거라 생각하오? 시간이 없지 않은데.”
“곧 떠나게 되면요?”
그때 사내의 발이 멈췄다.
집을 바로 목전에 두고 사내가 걸음을 멈췄다.
연리는 그런 사내의 얼굴을 쳐다볼 수가 없다.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볼지 짐작을 하기 때문이다.
“어디로 떠난다는 거요?”
사내의 목소리에는 의문이 가득했다.
“곧 떠나게 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어디로…….”
이 사내는 병사들에게 고자질 같은 건 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사내가 아니다.
“태자마마께서 곧 나를 데리러 오실 거예요.”
사내는 말이 없었다.
“편지가 왔어요. 곧 데리러 오신다고, 그렇게 적혀 있었어요. 그러니까 난 곧 떠나요.”
“잘됐네.”
“네?”
당황한 연리가 고개를 들어 사내를 쳐다봤다.
사내의 표정은 좀처럼 읽을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희미하게 웃고 있는데 그 웃는 것이 왜 웃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건지 이상했다.
“잘됐다고 했소. 여길 떠나면 좋지. 여기 어울리지도 않았는데.”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혼자서 아무것도 못 하면서 여기서 어떻게 살까 싶었는데, 가 버리면 나야 편해지지. 이제 귀찮게 챙겨 주지 않아도 되고.”
“정말 내가 떠나면 좋을 것 같아요?”
“그럼. 여기서 계속 살면 그건 뭐가 좋다고. 갈 사람은 가야지. 안 그렇소? 언제 가오? 빨리 가면 좋겠구만.”
“금방이요.”
이상할 것이 없는 대답이다.
이 사내의 말이 맞다.
자신이 떠난다고 해서 이 사내가 아쉬울 것이 뭐가 있겠는가.
오히려 그동안 자신 때문에 무척이나 귀찮았을 것이다.
군식구가 하나 늘어난 것처럼 매일 물을 길어다 주랴, 밥을 챙겨 먹이랴, 아프면 돌봐 주랴, 집이 부서지면 와서 고쳐 주랴, 자신 때문에 정말 많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사내 입장에서는 제가 떠나면 그것보다 더 홀가분하고 좋은 일은 아마 없을 것이다.
잘된 일이다.
이 사내에게도, 제게도 이건 정말 잘 된 일이다.
잘된 일인데 왜 이렇게 마음이 좋지만은 않은 걸까.
“가게 되면 인사는 따로 하지 마시오. 인사 받는 거 좋아하지는 않으니까.”
“그럴게요.”
연리가 애써 웃었지만 사내는 웃어 주지 않았다.
이 사내는 잘 웃는 사내가 아니니까, 그러니까 웃지 않는 거라고 연리가 생각했다.
자신이 가는 것이 싫어서 웃지 않는 게 아니라 이 사내는 원래 웃지 않는 사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