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백중사리
“뭘 하는 거예요?”
연리가 사내가 하고 있는 것이 신기해서 빤히 들여다보며 물었다.
사내는 대나무를 베어 와서 그걸 또 쭉쭉 쪼개더니 그걸 촘촘하게 붙이고 끈으로 이었다.
“그게 뭔가요?”
이 사내는 여간해서는 대답을 잘 해 주는 성격이 아니다.
이제는 연리도 그걸 안다.
이 사내는 다정하게 말하는 법도 모르고 입을 열면 그저 타박에, 퉁명스런 말투에 열 번에 한 번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른다.
저를 볼 때마다 한심한 인간 보듯이 하기도 하지만 그래도 연리는 이 사내의 집에 매일 이렇게 찾아온다.
매일 이 사내의 집으로 찾아온 지 벌써 한 달이 지났다.
“그게 뭐냐고 물…….”
“우산이요.”
그제야 사내가 대답했다. 그것도 짜증을 잔뜩 실어서 말이다.
“이걸로 비를 가린다구요?”
연리가 아는 우산은 기름을 몇 번이나 먹인 종이를 덧댄 것들이다.
장식도 아름답고 무늬는 더 아름다운 우산을 연리는 몇 개나 가지고 있었지만 그건 다 옛말이다.
이제는 다 낡은 옷을 입고 사는 처지가 되었으니 말이다.
“이걸 만들어서 뭐에 쓰려구요?”
사내는 대나무를 잔뜩 쌓아 놓았다.
우산을 서른 개도 만들 수 있는 분량의 대나무였다.
“이걸 다 쓸 건 아니잖아요.”
사내의 옆에 쪼그리고 앉아 연리가 계속 작은 새처럼 종알거리며 물어 댔다.
“다 쓸 거요!”
기어이 사내가 버럭 소리를 질렀다.
사내가 소리를 지르는 바람에 뒤로 조금 물러난 연리가 사내가 쓰다가 버린 대나무 쪼갠 것을 집어 들었다.
할 일이 없으니 이거라도 만지작거리고 있어야 한다.
“그만 돌아가시지?”
사내가 연리를 째려보며 성을 냈다.
“집에 가도 할 일이 없어요.”
“죄인이면 죄인답게 집에 처박혀 지낼 것이지 여긴 왜 와서…….”
“하지만 감시하는 사람도 없고 신경 쓰는 사람도 없고…… 다들 날 없는 취급하니까…….”
처음 이 섬에 왔을 때는 죄인인 스스로의 처지를 생각해서 집 안에서만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섬에 사는 사람들과 어울릴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자신을 동정하는 시선을 받는 것도 싫었고 자신과 신분이 다른, 달랐던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도 싫었다.
그러나 며칠 만에 그 생각이 싹 사라졌다.
연리의 생각을 바꾼 것이 바로 이 사내다.
연리는 이 섬에 온 지 며칠 만에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서 이 사내의 도움이 절실하다는 것을 바로 깨달은 것이다.
이 섬에서 자신 혼자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병사들이 가져다주는 양식을 먹으며 그냥 세월을 보내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은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이었던가.
그 양식으로는 한 달 만에 굶어 죽기 딱 좋았고 무엇보다 불을 피우는 건 아무리 배워도 힘들고 어려웠다.
우물에서 물을 길어 오는 것도 벅찼다.
혼자 그렇게 계속 있었으면 자신은 지금쯤 송장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만 보면 인상을 쓰고 버럭거리긴 하지만 집이 가장 가깝고 또 제 부탁을 거절하지 않는 이 사내의 집에 매일 찾아오게 되었다.
연리는 아직 이 섬에 사는 다른 사람들을 만나 본 적이 없다.
집이 워낙 외떨어져 있어서 만날 기회도 없었다.
병사들도 그 후에는 와 본 적이 없다.
이 사내가 한 달 동안 연리가 만난 유일한 사람이다.
이 섬의 밤은 무척이나 무섭다.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한밤중이 되면 허술한 방문을 금방이라도 부술 듯 쾅쾅 흔들어 대는데 그것이 무서워서 그렇게 무섭게 바람이 부는 날이면 연리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밤을 꼬박 샜다.
배고프고, 외롭고, 그리고 지루하기 짝이 없는 유배 생활에서 그나마 말이라도 할 수 있고 사람을 볼 수 있는 것이 이 사내를 만나러 왔을 때다.
그리고 무엇보다 이 사내는 연리가 오면 밥을 지어 먹인다.
연리가 밥때가 되면 이 사내를 찾아오는 이유 중의 하나가 그것이다.
그렇다고 밥때가 되어 찾아왔다고 해서 이 사내가 항상 있는 건 아니다.
이 사내가 바다에서 돌아오지 않으면 빈집에서 무작정 사내를 기다린다.
늦은 오후에 돌아온 사내가 저를 보며 미간을 찡그리며 퍽 인상을 써도 그것이 자신이 싫어서 그런 것이 아니라는 걸 연리도 안다.
연리는 그렇게 눈치가 없는 것이 아니다.
이 사내는 그냥 인상을 쓰는 것이 버릇이고, 버럭거리는 것이 버릇이다.
이제는 유배처인 제집에서 지내는 시간보다 이 사내의 집에서 지내는 시간이 더 많다.
그렇다고 이 사내와 무엇을 하는 건 아니다.
이 사내가 차려 주는 밥을 얻어먹고 이 사내가 하는 것을 가만히 구경만 할 뿐이다.
이 사내가 대나무를 베러 산으로 가면 그 뒤를 따라가고, 이 사내가 그물을 말리러 바닷가에 가면 그곳까지 따라가고, 그것이 하는 일의 전부다.
하지만 이 섬에서는 그것마저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일이 없다.
그저 눈만 껌뻑거리며 하루를 보내야 한다.
“다 만들고 나면 나도 하나 줄 수 있어요?”
연리가 사내에게 살며시 말을 걸었다.
“가져가든지 말든지.”
사내는 무뚝뚝하게 대답했지만 그건 가져가라는 허락이다.
“빨리 비가 내리면 좋겠어요. 우산을 한번 써 보게.”
“팔자 좋은 소리 하고 있네. 섬에서는 무슨 비가 곱게 내리는 줄 아나.”
사내가 또 면박을 줬다.
“제대로 태풍을 맞아 봐야 그런 소리를 하지 않지.”
“그냥 우산을 빨리 써 보고 싶다는 거예요. 비가 내리는 것이 좋다는 게 아니라…….”
“죄를 지어서 유배를 온 주제에 아주 팔자가 좋다고 말하는 거요. 매일 이렇게 노닥거리기만 하고 남의 집에 밥이나 얻어먹으러 오고.”
“나는…….”
‘나는 죄를 지은 적 없어요.’라는 말을 하려다 연리가 입을 꾹 다물었다.
이런 말을 들을 때마다 너무 억울하다.
자신은 죄를 짓지 않았다.
자신의 부친도 죄를 짓지 않았다.
죄를 지은 것은 태자 권이고, 자신은 그저 태자의 정혼자였다는 이유만으로 죄인이 되어 버렸을 뿐이다.
혼례나 올리고 죄인이 되었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혼례도 올리지 않았고 정식으로 책봉도 되지 않았고 그저 간택만 받았을 뿐인데 죄인이 된 것이 너무 기가 막히고 억울한데 이런 소리까지 들어야 하는 걸까.
“갈게요.”
결국 연리가 벌떡 일어났다.
이 사내가 악의를 가지고 이런 말을 한 것이 아니라는 건 알지만 기분이 상했다.
‘내가 다시는 밥을 얻어먹으러 가나 봐라…….’
괜히 화가 나서 집으로 돌아온 연리가 제집 마당에 서 있는 두 사내를 보고는 흠칫 놀라 발을 멈췄다.
한 달 내내 개미 새끼 한 마리 얼씬거리지 않던 집에 누가 찾아온 것일까.
“어디 갔다 오셨소?”
“마실이라도 다녀오셨소?”
자세히 보니 병사들이었다.
“무,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병사들을 보고 와락 겁을 먹은 연리가 쭈뼛거리며 손만 쥐었다 폈다.
연리는 이상하게 병사들이 무섭고 어렵다.
그건 그녀 나름대로 충격이 컸기 때문이다.
어느 날 갑자기 병사들에게 끌려나갔던 기억과 유배지로 끌려오며 겪었던 병사들은 강압적이고 무서웠었다.
그들은 잠시 동안의 휴식도 주지 않았고 도중에 쓰러진 자들은 죽게 내버려 뒀었다.
도망치려는 기미가 조금이라도 보이거나 그들을 기분 나쁘게 하면 매질을 하고 밥을 주지 않았다.
어떤 이는 하루 반나절 동안 물 한 모금 얻어 마시지 못하다가 결국에는 노상에서 죽고 말았다.
자신도 괜히 눈 밖에 나서 그 꼴이 될까 무서워 연리는 항상 고개를 숙이고 시키는 대로 걷고 주는 것을 얌전히 받아먹었었다.
그때의 기억 때문일까.
연리는 병사들만 봐도 겁부터 났다.
“무슨 일이긴. 한 달 지났잖소. 그래서 양식을 가져왔지.”
병사 한 명이 곡식 자루를 마당에 내려놓았다.
그제야 연리는 한 달에 한 번 병사들이 한 달 먹을 양식을 가져다준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별일은 없겠고…….”
“그래도 잘 살고 있으니 다행이오. 사람은 어떻게 해서든 살기 마련이니까 살다 보면 좋은 날도 오지 않겠소.”
그런데 처음에는 경황이 없어 몰랐지만 이 두 명의 병사들은 자신을 배 타는 곳까지 끌고 온 병사들과는 달리 그리 사람들이 나빠 보이지 않는다.
“섬사람들은 만나 봤소?”
“네? 아, 아니요.”
연리가 얼른 고개를 저었다.
죄인은 사람들과 만나서는 안 된다.
괜히 그 사내와 만나고 있다는 것을 들키기라도 하면 자신은 물론 그 사내도 경을 치게 될까 봐 연리가 일부러 거짓말을 했다.
“한 달 동안 아무도 못 만났소?”
“이 집이 외떨어져 있어서…….”
“하긴 그렇지. 집들이 죄다 북쪽에 모여 있으니…….”
“그런데 이 집 뒤로 집 한 채가 더 있는데, 우물 가기 전에 말이요. 그 집에도 안 가 봤소?”
그 사내의 집을 가리키는 말이다.
“모, 모르겠어요. 저는 우물밖에는 다녀오지 않아서…….”
“그렇구만.”
“하긴 죄인이 여기저기 다니면서 사람 만나고 그러면 안 되지.”
“네, 네…….”
행여나 들킬까 봐 연리의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잘 해 주면 우리도 신경 쓸 일이 없고 좋지 않겠소.”
“우리도 가끔 들러서 챙겨 줄 것이 있으면 챙겨 줄 테니까, 얌전히만 지내시오.”
병사 한 명이 곡식 자루 위에 뭔가를 툭 얹어 놓았다.
“그럼 가 보겠소.”
“한 달 뒤에나 봅시다.”
병사들이 마당에서 나가도 연리는 고개를 숙이고 움직이지 않았다. 병사들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진 후에야 연리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했다.
‘들켰으면 큰일 났겠지.’
병사들이 갑자기 오는 일은 없고 지금처럼 양식을 가져다줄 때만 오니 들킬 염려는 적지만 그래도 사람의 일은 모르는 법이다.
‘앞으로는 조심해야지.’
괜히 자신을 만났다는 이유로 그 사내가 곤경에 처하게 할 수는 없다.
‘그런데 이게 뭐지?’
연리가 곡식 자루 위에 얹어 놓고 간 것을 집어 들었다.
그건 작은 손거울이었다.
‘이걸 왜 주고 간 거지?’
병사들이 제게 이런 걸 주고 갈 이유가 없다.
‘이상하다…….’
손거울을 만지작거리던 연리가 손거울의 손잡이에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아차린 것은 그때였다.
‘뭐가 들었는데…….’
손잡이의 구멍을 막아 둔 것을 뽑자 그 안에 돌돌 말린 종이가 들어 있는 것이 아닌가.
‘이건…….’
종이를 꺼내 펼쳐 본 연리가 깜짝 놀랐다.
그건 제게 보내는 편지였다.
* * *
“그런데 뭘 두고 왔어?”
“지난번에 장사꾼이 왔을 때 부탁을 하나 하더라고. 그 손거울을 유배 온 죄인에게 좀 갖다 주라고 말이야.”
“손거울? 장사꾼이 그걸 왜 부탁을 해? 수상하게.”
“아는 사람이 돈을 주고 전해 달라 했다나 어쨌다나. 귀한 댁 아가씨였으니 다른 건 몰라도 손거울 하나는 있어야 매무새도 단장하고 그러지 않겠냐고 누가 제발 부탁한다고 하기에 나한테 슬쩍 주더라니까.”
“뭘 받은 거야?”
“술을 몇 병 받았지.”
“그걸 혼자 꿀꺽 하려고 했다고?”
“누가 혼자 먹는다고 그랬나? 술이 여섯 병이니까 세 병씩 나누면 되지.”
“그래야지, 암.”
공짜 술이 생겼다는 생각에 나이 든 병사가 괜히 히죽 웃었다.
이 섬에서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지루할 정도로 할 일이 없는 섬이라 술을 마시는 것이 그나마 낙인데 좋은 술은 구하기도 힘들어서 장사꾼이 올 때마다 한두 병씩 구하는 것이 전부인데 이번에 여섯 병이나, 그것도 좋은 술로 얻었으니 이보다 더 좋은 건 없다.
죄인에게 손거울 정도 가져다준다고 해서 그게 뭐 큰일이 나겠는가 싶다.
손거울로 탈출을 할 것도 아니고 말이다.
“그런데 그거 봤어?”
“뭐 말인가?”
“마당에 널어놓은 말린 생선 말이야.”
“봤지. 그런데 그게 뭐가 어때서?”
“생선이 어디서 나서 그걸 말리겠어.”
키가 큰 병사가 껄껄거리며 웃었다.
“삭이 놈이 가져다줬다고? 그걸?”
“그럼. 그물을 치고 잡았을까?”
“그럼 삭이 놈이 뒤에서 호박씨를 까고 있는 것이로구만.”
“우리 모르게 벌써 한 이불 덮고 자는 건지도 모르지.”
“그렇담 삭이 놈을 보면 한턱 단단히 내라고 해야겠군.”
“술도 내라고 하고 고기도 내라고 하고. 안 그래도 오늘이 백중날이니까 내일 정도에 푸짐하게 가져오라고 할까?”
“그거 좋지.”
이 병사들의 생각에는 벌써 저 처녀 총각이 눈이 맞은 것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걸 나무랄 생각도 없고 상전에게 일러바칠 생각도 없다.
이 섬에서 나가지 못할 죄인 처녀와 이 섬에서 평생 살 총각이 눈이 맞고 배가 맞는 것이 뭐가 그리 나쁜 짓이란 말인가.
어차피 높은 분들은 이 섬에 들어와 볼 일이 죽었다 깨어나도 없으니 자신들이 입을 다물어 주면 아무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그 입 다물어 주는 대가로 술과 고기를 거하게 받아먹으면 그것보다 더 좋은 건 없다.
마침 오늘이 백중일이니, 백중일에는 물이 차서 다른 때보다 물고기도, 해산물도 더 실하고 큰 것들이 잡히니 내일은 두둑하게 얻어먹을 수 있다.
* * *
[권이요.]
편지는 그렇게 시작하고 있었다.
방문을 꼭 걸어 잠그고 방구석에 웅크리고 앉은 연리가 혹시나 밖에 누가 올까 싶어 귀를 쫑긋 세우고 다시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제게 편지를 보낸 이는 다름 아닌 태자 권이었다.
연리는 권의 필체를 알고 있다.
그가 쓴 편지를 어려서부터 받아 왔었고 그가 직접 쓴 시문을 본 적도 많았기 때문에 그의 필체를 알아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태자님께서 내게…….’
두렵기도 하고 설레기도 해서 연리의 가슴이 진정이 되지 않고 있다.
금방이라도 밖에 누가 와서 편지를 빼앗아 갈 것만 같았다.
바람에 방문이 덜컹거리기만 해도 연리가 깜짝 놀라며 편지를 엉덩이 아래에 감췄다.
[나로 인해 고생이 많소. 하지만 그 고생이 길지는 않을 것이요. 내 사람들이 지금 나를 위해 움직이고 있으니 힘들어도 조금만 참으시오. 긴 이야기를 쓸 수는 없지만 내가 곧 그대를 데리러 가겠다는 것만 약속할 수 있소. 그러니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마시오.]
편지는 짧았다.
하지만 그 짧은 내용을 연리는 읽고 또 읽었다.
“마마…….”
편지를 품에 꼭 안고 연리가 눈을 감았다.
태자의 얼굴을 보지 못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마치 10년은 지난 기분이 드는 것은 왜일까.
태자는 성품이 사납고 행동에 거침이 없어서 많은 이들이 그를 두려워했지만 그가 제게 그 사납고 거친 모습을 보였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제 앞에서 그는 항상 다정했었고 언제나 저를 배려해 줬었다.
그에게 비록 후궁들이 있고 그의 자식까지 낳은 후궁이 있었다 하지만 황제가 될 태자에게 그런 것은 흠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했었다.
‘무슨 일을 꾸미시는 걸까…….’
태자는 허언을 하는 성격이 아니다.
이런 편지를 보냈을 때에는 지금 뭔가 계획하고 실행하는 것이 틀림없다.
‘제발 무사하셨으면 좋겠는데…….’
연리는 이 섬에서 나가는 것보다 태자가 안전하기를 원한다.
물론 섬에서 나갈 수 있고 태자도 무사하다면 그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
‘아버님도 무사하시겠지…… 아버님은 이 사실을 알고 계실까…….’
태자가 은밀한 일을 꾸미고 있다는 것을 부친도 알고 있을까?
섣부르게 일을 만들어서 태자나 부친이나 지금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빠지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연리의 바람이다.
‘여기서 나갈 수 있다면…….’
이 섬에서 살아서 나간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평생 이곳에 갇혀 살 거라 생각했었지만, 만약 정말 태자가 자신을 데리러 온다면, 여기에서 나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 잘되었으면 좋겠어…….’
이 섬에서 지낸 것은 한 달이다.
어떻게 버텼는지 모르게 한 달이 지났다.
‘나 혼자였다면 보름도 버티기 힘들었겠지…….’
자신이 한 달이나 버틸 수 있었던 건 전부 그 사내 덕분이다.
오늘 그 사내 때문에 화가 나긴 했지만 그래도 그 사내의 도움을 받은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만약 정말로 이 섬에서 나가게 된다면, 태자마마께서 다시 그 자리를 되찾으시고 나도 다시 태자비가 될 수 있다면 그때는 빚은 톡톡히 갚아야지.’
그 사내에게 진 빚을 모른 척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그 정도로 양심이 없는 건 아니다.
‘금은보화를 잔뜩 안겨 줄 수도 있고 이 섬이 아닌 다른 곳에서 넓은 땅을 하사하고 화려한 집도 지어 주고…….’
그 사내가 제게 준 것은 생선과 밥과 물이지만 자신은 그에게 안락하고 화려한 부귀영화를 줄 수 있다.
그 정도면 보답이 되지 않을까.
‘빨리 마마를 뵈었으면 좋겠다…….’
사실 이 섬에 유배를 오기까지, 그리고 이 섬에서 살면서 태자를 원망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태자가 아니었다면 제가 이런 꼴을 당할 리가 없었다며 태자를 하루에도 몇 번이나 원망하고 또 원망했었다.
태자비로 간택된 것을 원망하고 저를 태자비로 만들려고 했던 부친까지도 원망했었다.
그러나 지금 받은 이 편지로 원망은 눈 녹듯이 사라지고 이제는 두근거리는 기대가 생겼다.
간사한 마음이라고 해도 어쩔 수가 없다.
여기서 벗어나고 싶다.
다시 예전의 안락했던 삶으로 돌아가고 싶다. 너무나도 간절히 그걸 바라고 있다.
* * *
자려고 누웠지만 결국 잠이 들지 못한 연리가 밖으로 나왔다.
그런 편지를 받아서일까. 좀처럼 가슴이 설레 잠이 오지 않는다.
‘오늘따라 달이 유난히 밝네…….’
자신의 마음을 아는 것인지 머리 위의 달도 유난히 크고 밝다.
게다가 오늘은 바람도 거의 없고 한낮의 더위도 꺾여 시원하기까지 했다.
‘이런 날도 드문데…….’
한 달 정도 이 섬에 살며 바람이 없는 날은 거의 보지 못했다.
바람은 특히 밤에 심해진다.
아주 바람이 심한 날이면 방문이 문틀째로 뜯겨나갈 것처럼 흔들린다.
지난번에 이틀 정도 태풍이 지나간 적이 있었다.
그때는 정말 집이 통째로 부서지는 줄 알았지만 다행히 집은 무사했다.
그 정도로 이 섬은 바람이 세다.
마치 바다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이 섬을 작정하고 찾아들듯이 말이다.
그런데 오늘은 바람도 거의 없고 달도 밝아서 산책하기 딱 좋은 밤이다.
‘여기 와서 밤에 산책은 한 번도 안 해 봤네…….’
섬의 밤은 무서워서 산책은커녕 마당에 나오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나 오늘 같은 밤이라면 얼마든지 산책이 가능하다.
‘달빛이 참 예쁘구나…….’
편지 때문인지 지금 모든 것이 다 곱게 보인다.
머리 위에서 뿌려지는 달빛도 곱고 찰싹찰싹 들려오는 파도의 소리도 오늘따라 유난히 듣기 좋다.
‘저건…….’
해변을 따라 걷던 연리가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것을 발견했다.
‘조개구나…….’
그 사내는 처음 한 번만 조개를 가져다주고 그 다음부터는 가져다주지 않았다.
가져다줘 봤자 해 먹지 못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사내는 조개로 국을 끓여 냈다.
‘예쁘구나…….’
달빛을 받아 반짝이는 조개가 무척이나 고와서 연리가 허리를 굽혀 조개를 주웠다.
‘많이 있네?’
달빛을 따라 조개들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는 것이 보였다.
마치 달밤에 모래에 박힌 보석을 발견한 기분으로 연리가 조개들을 하나씩 주워 치마에 담기 시작했다.
이 치마 역시 그 사내가 준 것이다.
제가 원래 입고 있던, 그리고 집에 있던 옷들은 너무 낡아서 구멍이 숭숭 뚫려 있었는데 그 사내가 여벌의 옷들을 주어서 그나마 구멍 난 옷을 입는 사태는 면했다.
‘이걸 주워서 내일이라도 눈 앞에 내밀면 놀라겠지?’
그 사내가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할 일 없이 빈둥거린다.’, ‘할 줄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야 어디 빌어먹고나 살겠나.’ 그런 말들이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자존심이 상했었다.
하지만 조개를 잔뜩 주워 가서 그에게 내밀면 그도 더는 할 줄 아는 것이 없다는 말은 하지 못할 것이다.
‘이렇게나 많다니…….’
밤의 해변에 나오면 이렇게 많은 조개가 널려 있을 거라는 건 상상도 못했다.
모래에 박혀 있는 조개를 줍느라 정신이 팔린 연리가 퍼뜩 고개를 들었을 때 그녀의 치마는 이미 조개로 묵직했다.
‘그런데 내가 언제 이렇게 멀리까지 왔지?’
허리를 편 연리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리 많이 온 것 같지 않은데 지금 제 발목에는 물이 찰랑거렸다.
돌아보자 걸어온 길은 이미 물이 차올라 있었다.
걸어 들어올 때만 하더라도 모래를 걸어왔는데 지금 그 걸어온 길에는 물이 철썩이며 점점 차오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 어떻게 된 거지?’
게다가 조금 전에 발목에서 찰랑거리던 물이 지금은 종아리까지 올라왔다.
물이 점점 높이 차오르고 있는 것이다.
이게 밀물이라는 것을 연리가 알 까닭이 없다.
‘도, 돌아가야 해…….’
그제야 위기감을 느낀 연리가 허둥지둥 돌아가려고 했다.
‘왜 이렇게 멀지?’
그런데 돌아가야 할 곳이 너무 멀리 보인다.
“아악!”
허둥거리던 연리가 그만 발을 헛디뎌 넘어지고 말았다.
치마에 담아 뒀던 조개들이 와르르 쏟아졌지만 주울 정신도 없었다.
“어떡해……!”
첨벙거리며 일어났지만 벌써 물은 정강이를 넘어서 허벅지까지 차올랐다.
물이 차오르는 속도가 너무 빨라 이대로라면 물에서 나가기도 전에 목까지 차오를 것만 같았다.
“아, 안 돼……!”
그때 머리 위에서 그나마 사방을 훤히 비추던 달빛이 사라졌다.
구름이 지나가며 달을 가린 것이다.
‘안 보여……! 전혀 안 보여……!’
달이 있었을 때에는 사방이 대낮처럼 밝았지만 구름에 달이 가리는 순간 사방이 칠흑같은 어둠에 뒤덮였다.
‘어디지? 이쪽인가? 아니면 이쪽?’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연리가 허둥거렸다.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이쪽도 맞는 것 같고 저쪽도 맞는 것 같다.
“아……!”
어느새 물은 가슴까지 차올랐다.
계속해서 물은 빠르게 차오르고 있고 게다가 물결까지 사나웠다.
이대로 있다가는 물에 빠질 것이 분명하지만 어디로 가야 할지 방향을 잡을 수가 없다.
그때 달이 구름 뒤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어떡해……!’
달이 다시 나오며 시야는 밝아졌지만 더 절망스러워졌다.
물에서 벗어나겠다며 허둥거리며 움직였지만 해변과는 반대 방향으로 와 버린 것이다.
더 멀어진 해변을 보며 연리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주, 죽기 싫어……!’
물이 목까지 차오르자 짠물이 입 안으로 밀려 들어왔다.
몸이 저절로 붕 뜨며 발을 디딜 수가 없는 지경까지 이르자 연리가 이제 끝장이라고 생각했다.
태자의 편지를 받은 이 시점에서 다 끝나 버렸다.
그때였다.
“거기서 뭘 하시오?”
난데없이 들려오는 사내의 목소리에 놀란 연리가 고개를 휙 돌렸다.
그 사내였다.
그 사내가 작은 배에 탄 채로 이쪽을 쳐다보는 것이 아닌가.
“사, 살려 주세요! 살려 주세요!”
“이 밤에 거기서 뭘 하는 거요?”
지금 사람이 죽게 생겼는데 저 사내는 그냥 태평스럽다.
보면 모르나? 지금 빠져 죽게 생겼는데!
“보고만 있지 말고 살려 달라구요!”
“허 참. 성질하고는.”
사내가 천천히 노를 저어 오더니 연리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어푸! 어푸!”
물은 벌써 연리의 턱 아래까지 차올랐다.
연리가 저를 향해 내민 사내의 손을 있는 힘껏 붙잡았다.
“영차!”
사내가 기합과 함께 연리를 끌어당기자 연리의 몸이 순식간에 배 위로 올라왔다.
“콜록! 콜록!”
겨우 배에 탄 연리가 배 속에 가득 찬 짠물을 뱉어 냈다.
“백중사리에 뭘 하겠다고 이 밤에 나와서 이런 꼴이요?”
사내가 혀를 차며 연리를 쳐다봤다.
“배, 뭐요?”
“백중사리. 오늘이 백중날 보름달인데 그것도 몰랐소? 이런 날에는 밀물이 평소보다 많이 들어차는 법인데 그런 것도 모르고 뭘 했소? 하긴 아는 것이 있어야지.”
다른 때였다면 저를 무시하는 이 사내의 말에 부아가 끓었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이 사내가 아니었다면 분명 꼼짝없이 물에 빠져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뭘 하시는 겁니까?”
이 사내는 이 밤에 여기서 뭘 하는 걸까.
“백중사리에 물이 많이 들어오니 이런 밤에는 큰 고기들이 다른 때보다 많이 잡히는 법이요. 이런 날을 놓치면 천하의 바보지.”
배 한쪽에는 펄떡이는 생선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지금 당장 돌아갈 것이 아니니까 그쪽에 얌전히 앉아 있으시오.”
사내가 허리를 굽혀 물 위에 둥둥 떠 있는 것을 붙잡았다.
그것을 끌어올리자 그물이 딸려 올라오며 작은 배 안에 커다란 물고기들이 퍼덕거리는 것을 연리도 볼 수 있었다.
사내는 그것을 장소를 바꿔 가며 몇 번이나 반복했다.
홀딱 젖은 채로 웅크리고 앉은 연리가 할 수 있는 건 그물을 끌어 올리는 사내를 구경하는 것뿐이었다.
사내는 웃통을 드러낸 채로 다 젖은 바지 하나만 입고 쉬지 않고 그물을 끌어 올렸다.
그때마다 연리는 속으로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사내가 체격이 좋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물을 끌어 올릴 때의 팔뚝이 불끈거리는 것이 여간 힘이 좋은 것이 아니다.
배는 순식간에 한쪽이 생선으로 가득 찼다.
“이제 그만 돌아갈 건가요?”
배에 생선이 가득 찼으니 사내가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통발 쳐 둔 곳도 확인해야 하오.”
“네?”
“물 빠지기 전에 통발을 확인해야 한다고.”
사내는 배를 저어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곳으로 배를 저어 가는 사내를 보며 연리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저 사내가 저를 데려다주지 않으면 혼자 힘으로 돌아갈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파도가 부딪치는 바위 주변에 이르렀을 때 사내가 벌떡 일어섰다.
“금방 들어갔다 올 거요.”
그 말과 함께 사내가 갑자기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저기……!”
연리가 그를 불렀을 때는 이미 그는 사라진 후였다.
‘어쩌지? 금방 올라오겠지?’
그러나 꽤 오래 기다려도 사내는 물 위로 올라오지 않았다.
‘왜 안 올라오지? 왜? 이렇게 오랫동안 물속에서 숨을 참을 수 있나?’
연리가 점점 겁이 났다.
물속에 들어간 사내가 숨이 막힐 시간이 이미 지났다.
적어도 연리의 생각에 사람이 이렇게까지 오래 물속에서 숨을 참을 수는 없다.
게다가 바람이 슬슬 불기 시작해 배가 점점 떠내려가고 있었다.
‘어쩌지?’
안절부절못하던 연리가 결국에는 노를 잡았다.
노를 한 번도 저어 본 적이 없지만 이대로 뒀다가는 배가 떠내려갈 것이 분명했다.
“으윽! 으으윽!”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었지만 배는 점점 뒤로 떠내려갔다.
사내는 여전히 물 위로 올라오지 않고 있고 사내가 물속으로 뛰어든 곳에서 배는 한참이나 떠내려와 있다.
‘어떡해…….’
이대로 망망대해로 떠내려갈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사내가 물속에서 무슨 일을 당해 죽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연리가 잔뜩 겁을 먹고 눈가가 새빨갛게 물들었다.
‘안 돼. 뭐라도 해야 해…….’
울음이 나올 것 같은 것을 꾹 참고 연리가 있는 힘을 다해 노를 저었다.
“제발……! 제발……!”
도무지 앞으로 나가지 않는 노를 저으며 연리가 악을 쓰고 있을 때였다.
첨벙-!
세찬 물소리에 연리가 고개를 들었다.
사내가 물 밖으로 나온 것이다.
“여기! 여기요! 여기 있어요!”
연리가 목이 터져라 소리를 질렀다.
자신을 본 사내가 자신이 탄 배 쪽으로 헤엄쳐 오는 것을 연리도 봤다.
사내는 엄청나게 빠르게 헤엄쳐 오더니 배 위로 올라왔다.
“지금 뭘 하고 있소?”
사내가 노를 쥔 연리를 보고 눈을 껌뻑거렸다.
“그, 그게 배가 자꾸 떠내려가서…….”
“노를 저을 수는 있소?”
“뭐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에…… 다, 당신은 올라오지도 않고, 죽었을 것 같고 그래서 이대로 망망대해로 떠내려가면 어쩌나 하고…….”
입에서는 정리되지 않은 말이 계속 흘러나왔다.
너무 놀라고 당황하고 또 안심이 되니 아무렇게나 말이 나오는 것을 연리도 막을 수가 없다.
“이대로 떠내려가면 나는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거기까지 말하자 갑자기 자신이 너무 바보처럼 느껴졌다.
노도 젓지 못하고, 이 사내는 이렇게 멀쩡하게 돌아왔는데 쓸데없이 걱정이나 하고, 또 배가 떠내려간다고 우왕좌왕하기만 하고, 이럴 때일수록 더 침착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자신이 너무 바보 같아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흑……! 흑흑……!”
기어이 터진 눈물은 멎지 않았다.
“흑흑!”
어깨를 떨며 흐느끼고 있을 때 연리의 어깨에 사내의 커다란 손이 얹어졌다.
사내는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저 그 큰 손으로 어깨를 툭툭 쳐 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