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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 봄의 숲 (7/7)

에필로그 : 봄의 숲

따사로운 오후였다.

힐데스하임 성의 정원에도 완연한 봄이 찾아왔다.

겨울 내내 얼어붙었던 호수는 녹았고 그 수면 위로 백조들이 날아들었다.

정원사가 겨울 내내 애써서 살려낸 꽃나무들이 아름다운 꽃잎을 앞 다투어 피워냈고 이름 모를 새들이 그 꽃나무에 깃들어 하루 종일 노래를 불러댔다.

꽃나무가 흐드러지게 핀 정원에 마차의 말굽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론 도련님! 레온 도련님!”

마차에서 내리는 두 소년을 향해 성의 하인들이 반갑게 달려갔다.

반년 만에 돌아온 이 성의 후계자들을 맞이하는 하인들의 얼굴에는 기쁨이 가득 했다.

이 두 소년은 이들에게 무척이나 사랑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이들이 이 쌍둥이 소년을 사랑했다.

밝고 구김살 없는 미소의 이 소년들을 사랑하지 않을 사람은 세상에 없다고 다들 당연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이제 학업이 전부 끝나신 겁니까?”

성의 집사가 두 소년이 들고 있는 가방을 받아 들며 상냥하게 물었다.

이 쌍둥이 소년들은 3년 전 학업을 위해 도시로 나갔다.

그리고 일 년에 한 번, 방학을 이용해서 돌아오던 소년들이 이제 학업을 끝내고 아주 돌아온 것이다.

조용하던 힐데스하임 성이 드디어 북적거릴 시간이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도련님들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가자, 레온!”

쌍둥이 중 형인 아론이 동생 레온의 소매를 잡아 당겼다.

“나는 숙부님부터 만나 뵙고 싶어, 형.”

“그래? 그러면 숙부님부터 찾아뵙자.”

레온의 말에 아론이 성으로 들어가려던 발을 다른 쪽으로 돌렸다.

그들의 숙부인 벤야민은 성이 아니라 성 바로 옆에 지어진 통나무집에 살고 있다.

벤야민은 건강이 좋지 않기 때문에 차가운 돌로 만들어진 습하고 싸늘한 성보다는 햇볕이 잘 드는 통나무로 지은 오두막집에 머물고 있었다.

이 쌍둥이들은 어려서부터 숙부 벤야민의 통나무집에서 책을 읽고 뒹굴거리며 놀고는 했다.

“숙부님은 또 책을 읽고 계시겠지?”

“당연하지.”

“아.”

통나무집으로 걸어가던 아론이 뭔가를 떠올리고 다시 하인들에게로 달려왔다.

그리고 하인 한 명이 들고 있는 가방을 열더니 뭔가를 꺼내 다시 레온에게로 되돌아왔다.

“뭘 가지고 온 거야?”

“숙부님 선물.”

“치사한 놈. 혼자만 선물을 준비한다 그거지?”

“그러게 형도 준비하지 그랬어?”

“뭔데? 뭘 샀어?”

“숙부님이 전부터 읽고 싶다고 말씀하시던 책. 어렵게 구한 거야.”

“진짜 나쁜 녀석. 그런 건 같이 준비해야지.”

“그러면 형. 그거 있잖아.”

“그거?”

“응. 어머니가 형에게 준 거. 펜던트.”

“그게 왜?”

“그걸 나한테 주면 내가 숙부님께 우리 둘이서 함께 이 선물을 준비했다고 말해줄게.”

항상 머리가 영악하게 돌아가는 레온이었다.

아론과 레온은 쌍둥이에 성격도 비슷하고 외모도 똑같고 취향도 똑같지만, 영악한 것으로 치면 레온이 더 영악하다.

“넌 정말….”

“착한 동생이지?”

짓궂게 웃는 레온을 째려보던 아론이 결국 고개를 젓고 말았다.

도무지 이 영악한 동생을 당해낼 길이 없다.

둘은 취향은 비슷하지만 재능은 다르다.

그리고 그 다른 재능이 둘의 진로를 바꿔놓았다.

형인 아론은 힐데스하임 남작의 작위를 물려받게 될 것이다.

지금 아론은 공부를 더 해서 학자가 되고픈 꿈을 가지고 있다.

그에 비하면 동생 레온은 아버지인 요한 힐데스하임 남작이 하고 있는 사업에 요즘 관심을 보이고 있다.

아버지처럼 사업가가 되고 싶다고 아론은 어려서부터 말하고는 했었다.

많은 사람을 상대하는 것보다 혼자 연구하는 쪽이 더 좋은 레온과 사람들을 상대하며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아론.

이 쌍둥이는 이렇게 각자의 영역이 다르다.

하지만 그래도 사이가 좋은 쌍둥이다.

펜던트를 주면 공동선물로 해주겠다고 계속 치근덕거리는 동생을 떠밀며 레온이 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런 레온의 뒤를 아론이 신나는 발걸음으로 뒤쫓아갔다.

달려가는 두 소년의 눈에 봄의 햇살이 쏟아지는 호숫가 옆의 통나무집이 들어오고 있었다.

* * *

열어놓은 창문으로 봄의 향긋한 바람이 살랑거리며 들어왔다.

호수의 싱그러움을 머금은 바람이 창문을 넘어 들어와 책상 위에 놓인 책의 페이지를 사락사락 흔들었다.

그리고 그 바람결에 소년들의 즐거운 웃음소리가 실려 왔다.

책을 읽고 있다가 잠시 잠이 들었던 남자가 그 웃음소리에 눈을 떴다.

남자의 얼굴은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괴물이다!]고 소리칠 정도로 흉측했다.

아주 오래 전에 화상을 입어 얼굴이 다 녹아내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녹아내린 피부 사이로 남자의 눈동자는 더없이 다정했다.

귀에 들리는 소년들의 웃음소리에 남자가 살며시 미소를 지었다.

보고 싶었던 쌍둥이들이 돌아온 것이다.

겨울 내내 저 쌍둥이들이 보고 싶었다.

하지만 학업을 방해할 수 없어서 빨리 돌아오라는 편지는 쓰지 않았다.

이제 겨울이 가고 봄이 왔다.

그리고 사랑스런 소년들이 돌아왔다.

이 성은 더없이 행복한 봄의 기운에 취할 것이 분명하다.

남자의 눈이 다시 감겼다.

창밖에는 봄날의 따사로운 햇살이 춤을 추고 봄 향기를 머금은 바람이 햇살을 싣고 남자가 앉아 있는 책상까지 불어왔다.

남자의 앞에 놓인 책의 페이지가 춤을 추듯 넘어갔다.

책의 페이지를 넘긴 바람은 곧 남자의 입술에 머물렀다가 남자의 머리카락을 살랑거리고는 흩어졌다.

“숙부님?”

통나무집의 문을 연 쌍둥이들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어?”

“주무시고 계신 것 같아.”

통나무집 안은 조용했다.

바람이 책을 넘기는 소리만이 사락사락 들리고 남자는 책상 앞의 흔들의자에 앉아 있었다.

흔들의자의 팔걸이에 얹어진 남자의 손은 미동이 없다.

그저 바람에 남자의 머리카락만 살짝살짝 날렸다.

“낮잠을 깨우는 건 좀 그렇지?”

“그러면 부모님을 뵙고 난 후에 다시 오자.”

“그럴까?”

소년들이 결론을 내렸다.

숙부의 나른한 낮잠을 방해하는 것보다는 차라리 반가운 해후를 조금 미루는 것이 낫다.

쌍둥이들이 다시 조용히 문을 닫을 때 창문 너머에서 들어와 잠든 남자의 머리카락을 살랑거리던 바람이 소년들의 뺨에 닿았다 흩어졌다.

봄이 인사하듯 뺨에 닿았다 흩어지는 향긋한 바람에 소년들이 서로를 마주보며 웃었다.

탁.

문이 닫히는 조용한 소리와 함께 그때가지 팔걸이에 올려져 있던 남자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팔걸이 아래로 힘없이 떨어진 손을 바람이 휘감았다.

여전히 창문 너머에서는 봄의 햇살을 실은 바람이 나른하게 불어 왔고 창밖 호숫가의 수면에 비치는 햇살은 눈부셨다.

흔들의자는 움직임을 멈추고 그대로 바람과 햇살 속에 녹아들었고, 그 의자에 몸을 묻은 남자는 조용한 잠에 빠져있었다.

흔들의자에 몸을 기댄 채로 눈을 감은 남자의 입술에는 행복한 미소가 남아 있었다.

만족스런 미소였다.

부족한 것이 없는 행복한 남자의 미소였다.

비록 그 입술에 더는 숨결이 남아있지 않지만, 봄바람이 숨결처럼 그 입술을 스치고 방안을 휘감았다.

이 남자는 아주 오랫동안 겨울에 살았지만 이제는 봄에 잠이 들었다.

따사로운 봄에 잠이 들어 다시 깰 때는 더는 등도 굽지 않고 다리를 절룩거리지도 않는, 기관지가 약해서 기침으로 고생하는 몸도 아닐 것이다.

다시 잠에서 깨어날 때 이 남자는 아주 오래 전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사랑스럽게 달리고 나무 위에 오르는 소년이 되어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쩌면 봄의 바람이 되어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이 성의 주변을 휘감고 머물게 될지도 모른다.

더는 괴물의 숲이 아닌, 이제는 봄의 숲이 된 이 성에서 그가 사랑하는 사람들의 주변에 바람이 되어 머물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바람이 부는 날이면 숲이 노래를 부를 때 이 남자 역시 사랑하는 사람들의 귓가에 속삭여줄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레티샤.]

[사랑하는 요한.]

[사랑하는 나의 쌍둥이들.]

이렇게 바람소리와 함께 속삭일지도 모른다.

바람이 부는 날이면, 남자는 언제까지나 그곳에서 웃고 있을 것이다.

봄의 숲에서, 봄의 힐데스하임 성에서.

잠든 이 남자의 이름은 벤야민 힐데스하임이다.

<괴물이 사는 숲> 끝.

(공금)ⓒsk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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