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불길 (6/7)

5. 불길

콰당-!

“윽!”

거칠게 열리는 문에 떠밀려 벤야민이 비틀거리며 넘어졌다.

“벤야민!”

주저앉는 벤야민을 본 요한이 다급하게 소리를 질렀다.

요한의 머리와 어깨는 온통 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벤야민!”

쓰러진 벤야민을 일으키던 요한의 시선이 벽난로 옆에 앉아 자신을 바라보는 레티샤와 마주쳤다.

“너…!”

벤야민을 놓은 요한이 분노 가득한 얼굴을 한 채 레티샤에게 달려갔다.

“이 더러운 년!”

레티샤의 멱살을 잡은 요한이 그녀의 얼굴을 내려치기 위해 손을 들었다.

“으악!”

그때 레티샤가 제 멱살을 잡고 있는 요한의 팔을 물어뜯었다.

“이 미친년!”

요한이 제 손을 물어뜯고 있는 레티샤를 떠밀었다.

“악!”

구석으로 처박힌 레티샤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녀의 눈에도 독기가 가득했다.

더는 요한에게 당하고 싶지 않았다.

벤야민의 말이 맞다.

자신들 모두가 피해자라는 벤야민의 말이 맞다는 건 인정한다.

요한도, 자신도 이렇게 괴물처럼 변해버린 것이 자신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렇게 떠밀렸다는 말이 옳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다고 해서 지금 이 상황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요한은 자신을 증오하고, 요한은 지금이라도 당장 자신을 죽이려 들 것이다.

지금 요한의 눈에 깃든 살기를 레티샤도 알아봤다.

자신을 죽이려는 남자에게 순순히 죽어주고 싶지 않다.

자신도 피해자라면 왜 죽어줘야 한다 말인가.

죽기 싫다.

벤야민이 말한 그 기회라는 것, 새로운 삶을 위한 발버둥이라는 것을 지금 한 번 쳐보고 싶다.

여기서 죽을 생각도 없고, 다시 성으로 끌려가 능욕당할 생각도 없고 요한이 원하는 대로 매음굴에 처박혀 평생 남자들의 노리개로 살아갈 생각도 없다.

“이 미친 새끼! 죽어-!”

레티샤가 벽난로 안으로 손을 넣어 활활 타고 있던 장작을 쥐고 그것을 휘둘렀다.

“으윽!”

레티샤가 휘두른 불붙은 장작이 그녀의 목을 누르려던 요한의 머리를 스쳤다.

뜨거운 장작이 머리를 스치자 요한이 레티샤의 목을 누르려던 손으로 제 머리를 감싸며 옆으로 쓰러졌다.

손바닥이 뜨거운 것도 모르는 채 레티샤가 벌떡 일어나 열린 문 밖으로 뛰었다.

힘의 차이라는 것을 레티샤도 안다.

칼이라도 있었더라면 지금 당장 요한을 찔렀겠지만 지금의 그녀는 빈손이다.

지금은 달아나는 방법 밖에는 없었다.

레티샤가 눈보라가 몰아치는 밖으로 미친 듯이 달아났다.

그녀가 달아난 직후 요한이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레-티-샤-!”

분노에 가득 찬 소리를 지르며 요한이 레티샤가 달아난 문으로 뛰어나갔다.

두 사람이 나간 오두막의 문이 거센 눈바람에 흔들렸다.

덜컹거리는 문 뒤로 오두막의 바닥에 쓰러진 벤야민의 몸이 움찔거렸다.

가뜩이나 약한 몸이 노새를 끌고 여기까지 오느라 체력이 바닥났고, 추위에 떠느라 거의 한계까지 가버린 탓에 조금 전의 충격으로 쓰러진 벤야민이 일어나지 못했다.

정신을 잃고 쓰러진 벤야민에게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부터 불길이 화르륵 일어난 것은 그때였다.

레티샤가 벽난로 안에서 꺼내 휘두르던 장작이 구석으로 굴러가 창문의 낡은 커튼에 불이 옮겨 붙은 것이다.

커튼의 끝이 타들어가며 불길이 서서히 오두막 안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그 타오르는 불길 아래에 정신을 잃은 벤야민이 쓰러져 있었다.

* * *

눈보라 속으로 달아난 레티샤를 뒤쫓아 따라가던 요한이 허리춤에서 권총을 꺼냈다.

항상 품에 지니고 다니던 권총을 손에 든 요한이 눈보라로 흐릿한 앞을 노려보며 방아쇠를 당겼다.

타앙-!“

거친 총성이 눈보라 속을 울렸다.

총을 쏜 요한이 다시 발이 푹푹 빠지는 눈을 밟아 달려갔다.

핏자국은 보이지 않았다.

맞지 않은 것이다.

“도망칠 수 있을 줄 알고.”

눈보라 속에서 흐릿하게 잡히는 인영을 향해 요한이 다시 방아쇠를 당겼다.

탕-!

이번에는 인영이 비틀거리며 쓰러졌다.

“맞췄어!”

레티샤가 총에 맞았다는 확신을 가지며 요한이 눈보라 속을 뛰어갔다.

그의 발이 멈춘 곳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레티샤가 주저앉아 있었다.

총알은 그녀의 어깨를 관통했다.

그녀의 어깨가 피로 물든 채로 붉은 피가 눈 속에 뚝뚝 떨어졌다.

“빌어먹을, 레티샤….”

요한이 그녀의 머리를 향해 총구를 겨눴다.

그의 입술에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끝장을 내줄까? 널 지금 당장 쏴서 여기에 묻는다고 해서 누구 하나 관심을 가져줄 것 같아? 네가 사라졌다고 해서 널 찾을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있어.”

레티샤가 눈을 부릅뜨고 요한을 노려봤다.

이전의 그녀였다면 없다고 절망했을 것이다.

자신이 여기에서 죽어도 누구 하나 울어줄 사람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겠지만 지금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

단 한 명이 있다.

자신을 위해 울어주고, 자신을 기억해주는 사람이 한 명 있다.

벤야민 힐데스하임이다.

자신을 다시 만나서 기쁘다고 말해준 그 남자는 자신을 위해 울어줄 것이다.

겨우 찾아낸, 유일한 한 명이다.

그를 만난 것만으로도 이제 충분히 위로가 된다.

그를 만나기 위해서 여기로 돌아온 것일지도 모른다.

그 한 마디를 듣기 위해서.

[다시 만나서 기뻐.]

자신에게 그렇게 말해주는, 자신을 그렇게 여겨주는 한 사람을 만나기 위해서 여기로 돌아왔다.

“벤야민이 나를 위해 울어줄 거야.”

“미친….”

요한이 그녀를 노려보며 뭐라고 말하려고 할 때였다.

레티샤의 시선이 자신의 등 뒤를 향하고 있다는 것을 요한이 알아차렸다.

레티샤의 동공이 커지고 있었다.

“무슨….”

그제야 섬뜩함을 느낀 요한이 뒤를 돌아봤다.

뒤돌아본 요한의 눈동자가 붉게 물들었다.

오두막이 불타고 있었다.

“벤….”

요한이 손에 들고 있던 권총을 떨어뜨렸다.

저 오두막 안에 벤야민이 있다.

“벤야민-!”

요한이 조금 전 달려왔던 길을 향해 달려갔다.

오두막은 거센 불길에 휩싸여 무서운 소리를 내며 타올랐다.

“벤야민-! 형-!”

오두막까지 달려온 요한이 불길 앞에서 멈췄다.

그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흔들리는 것은 눈동자만이 아니었다.

손끝도, 다리도 흔들렸다.

지금 눈앞에서 타오르고 있는 불길은 13년 전의 그 불길과 똑같았다.

적어도 요한의 눈에는 똑같이 비쳤다.

그때 눈앞에서 타오르던 불길.

그 불길이었다.

“아….”

요한의 얼굴이 창백하게 변하며 그가 눈 위에 주저앉았다.

저 타오르는 불길 속에 벤야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런데 그를 구하기 위해 뛰어들지는 못했다.

불이, 무서웠다.

모든 것을 삼키고 있는 저 불이 무서웠다.

13년 전의 불이 아버지를 삼키고 형을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데 지금 또 불길이 타오르며 형을 삼키고 있다.

그 시뻘건 불길 앞에서 요한의 몸이 얼어붙었다.

벤야민이라면 뛰어들었겠지만, 요한의 몸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아… 아….”

요한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저 안에 형이 있는데, 누구보다 소중한 자신의 쌍둥이가 있는데 자신은 저 불길 속으로 뛰어들 수가 없다.

이것 역시 형벌이다.

불길을 두려워하는 형벌.

“누가… 제발….”

그때도 자신은 시트를 뒤집어쓰고 이렇게 말했었다.

누가, 제발, 살려주세요.

형은 자신을 끌어안고 그 불길을 견뎠다.

그러나 자신은 지금 형이 있는 저 불길 속으로 뛰어들지 못한다.

누가, 제발, 살려주세요, 형을.

“으, 아….”

그때였다.

“벤야민-!”

소리를 지르며 레티샤가 불길 속으로 뛰어든 것이다.

요한의 곁을 스친 레티샤가 불길이 거세게 타오르는 오두막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모습이 불길 속으로 사라지는 것을 바라보며 요한이 숨을 삼켰다.

불꽃은 무섭게 타들어갔다.

요한의 머리 위에서 눈은 멈추지 않고 쏟아졌다.

기묘한 광경이었다.

시뻘겋게 타오르는 불길 위로 폭설이 쏟아지는 그런 기묘한 광경이었다.

그리고 그때였다.

불길 속에서 걸어 나오는 두 사람이 요한의 눈에 들어왔다.

걸어 나오는 것은 한 사람이었다.

레티샤가 벤야민을 등에 업고 걸어 나오고 있었다.

그녀의 등에 업힌 벤야민의 팔은 축 늘어진 채였다.

그리고 불길과 연기에 그을린 레티샤의 모습 역시 엉망이었다.

엉망이었지만, 살아있었다.

두 사람을 확인하는 순간 요한이 그 자리에 몸을 숙였다.

눈에 이마를 대고 엎드린 요한의 어깨가 흔들렸다.

짐승처럼 오열하는 요한의 머리와 어깨, 그리고 등 위로 흰 눈이 계속 쌓여갔다.

모든 것을 덮어버리려는 것처럼 그렇게, 눈이 쌓이고 또 쌓였다.

* * *

이제 은퇴를 앞둔 의사 레녹스가 꼭대기 층의 방에서 걸어 나왔다.

나이가 들어 조금만 무리를 하면 금방 피곤해지는 늙은 의사가 지친 기색으로 문 밖에서 기다리던 여자에게 모자를 까닥거리며 인사했다.

“아름다운 아가씨의 이름도 모르는 건 아쉬운 일이지요.”

“레티샤예요.”

“레티샤 양. 안으로 들어가 봐요. 벤야민 씨는 이제 안정이 되었으니까요.”

그 말을 한 레녹스가 층계를 내려갔다.

[눈이 이렇게 그치지 않아서야 오늘 안으로 집에 돌아가긴 글렀구만.]이라고 중얼거리며 내려가는 레녹스의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던 레티샤가 망설임 끝에 방 안으로 들어갔다.

벤야민은 침대에 누워 있었고 그 곁을 요한이 지키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오는 레티샤를 보며 요한이 일어나 옆으로 비켜줬다.

요한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레티샤를 향해 시선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것이 역력했다.

그런 요한에게 그와 마찬가지로 눈길도 주지 않고 레티샤가 벤야민의 곁에 앉았다.

“좀 어때요?”

물어보는 레티샤를 향해 벤야민이 힘없이 웃었다.

“아주 좋아. 이제는 불하고 친해져서, 처음보다는 낫네.”

벤야민의 농담에 레티샤가 작게 웃었다.

그런 레티샤의 뺨을 벤야민이 손을 들어 가만히 어루만졌다.

“웃으니까 예쁘다. 계속 웃어.”

“노력해볼게요.”

“머리카락이 짧아졌어.”

“불길에 그을려서, 짧게 잘랐어요.”

“그래도 예뻐.”

뺨에서 천천히 내려온 벤야민의 손이 레티샤의 목에 걸려있는 펜던트에 닿았다.

“오빠들은 너를 사랑해, 레티샤. 이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거야.”

[오빠들]이라는 말에 요한도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레티샤도 알고 있다.

벤야민은 틀렸다.

요한은 자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걸 알고 있지만 레티샤가 입 밖으로 꺼내지는 않았다.

순전히 벤야민을 위해서였다.

“레티샤. 내가 부탁을 하면 들어줄 거니?”

“무슨 부탁이요?”

펜던트를 만지작거리는 남자의 손을 잡으며 레티샤가 부드럽게 미소를 지었다.

지금 레티샤의 눈에 비치는 벤야민은 13년 전의 다정한 소년이었다.

흉측하게 녹아내린 피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소가 13년 전과 똑같은 소년일 뿐이다, 적어도 레티샤에게는.

“내가 죽을 때까지 내 곁에 있어주면 안 될까?”

“오빠가 왜 죽어요?”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에 레티샤의 입에서 [오빠]라는 말이 나왔다.

예전에 부르던 호칭이었다.

“빨리 죽을 수도 있고, 예상보다 길어질 수도 있지만, 내가 살아있는 동안에 네가 내 곁에 있어주었으면 좋겠어.”

“하지만….”

레티샤가 곁에 서 있는 요한을 힐끗 쳐다봤다.

“불편한 사람이 있어서요.”

그러자 요한이 그녀를 노려봤다.

“나는 너희 둘이 서로를 용서했으면 좋겠는데… 힘들겠지?”

벤야민이 레티샤와 요한을 번갈아 쳐다봤다.

요한은 어색하게 서서 창밖으로 시선을 던졌고 레티샤는 노골적으로 싫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이렇게 하자. 레티샤, 공부가 하고 싶지는 않니?”

“그건….”

공부.

그건 레티샤의 꿈이었다.

자신의 꿈을 이야기하는 벤야민을 레티샤가 살며시 쳐다봤다.

“넌 아직 어리니까 도시에 가서 공부를 해. 대신 겨울이 되어 방학이 되면 여기로 돌아오는 거야. 내가 여기서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

“네게 지난 13년 동안 해주지 못했던 것들을 해주고 싶어.”

망설임 끝에 레티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벤야민이 활짝 웃었다.

그의 웃음에 레티샤가 생각했다.

이 미소만 떠올리자고.

재수없는 요한 따위는 생각하지 말자고.

재수없는 요한 힐데스하임은 그저 유령이나 투명인간 취급하자고 말이다.

* * *

이왕지사 이렇게 된 거, 머리의 상처를 봐주겠다는 레녹스 선생에게 치료를 받은 레티샤가 아래층 부엌에서 스프를 먹고 있을 때였다.

추위에 떨고 별짓을 다 당해서인지 허기가 밀려와 다짜고짜 성의 하녀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한 레티샤였다.

물론 레티샤는 오늘 처음으로 성의 하녀를 만났다.

이 성에 하녀가 있다는 것을 오늘 처음 알았다.

스프와 빵을 두 접시나 비우고 있을 때 그녀가 앉은 식탁의 맞은편 끝자리에 누군가 앉았다.

그것이 요한이라는 것은 레티샤도 알았다.

하지만 아는 척 하지 않았다.

벤야민에게 고마운 것과는 달리 요한과는 아직 풀지 않은 것이 많고, 무엇보다 풀고 싶지 않았다.

요한 힐데스하임.

저 남자가 자신에게 한 짓을 레티샤는 아직 잊지 않았다.

생각하면 할수록 이가 갈리고 분노가 치밀었다.

저 인간을 씹어 먹어도 시원치 않을 것이다.

저 인간이 빼앗아간 자신의 순결, 저 인간이 능욕한 자신의 몸.

그것들은 이제 되돌아오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 인간을 죽이지 않는 이유는 벤야민 때문이다.

순전히 벤야민의 쌍둥이 동생이라는 한 가지 이유 때문이다.

“벤야민의 말대로 해.”

식탁 맞은편에서 요한이 쌀쌀맞게 말했다.

레티샤는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대꾸도 하기 싫었다.

“나도 네가 여기에 있는 것이, 여기로 매년 겨울에 오는 것이 반갑지도 않고 내 돈으로 널 공부시키는 것도 싫지만 벤야민이 원하니까….”

“네 도움 안 받아.”

“벤야민의 돈이 내 돈이야. 내가 사업으로 번 돈이지.”

“이 성의 보물들은 다 어쩌고?”

“땅에 묻었어.”

“미친….”

“그것 때문에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셨고, 그것 때문에 벤야민이 저렇게 되었으니까 꼴도 보기 싫어서 다 파묻었어. 조상들의 묘지 아래에.”

“…….”

요한의 심정은 이해한다.

결국 이 성의 그 엄청난 보물에 눈이 먼 자신의 엄마가 저지른 짓에 모두가 희생되었다.

출발점을 따지자면, 엄마의 죄가 그 시작이다.

머리로는 안다.

냉정하게 생각하면 머리로는 충분히 알고 이해한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왜 요한이 자신에게 그런 짓을 했는지 머리로는 다 이해한다.

만약 입장을 바꿔놓고, 자신이 요한의 입장이었다 하더라도 자신 역시 분노했을 테니 말이다.

머리로는 알지만 가슴은 쉽게 용서가 되지 않는다.

아직 몸에 흔적이 지워지지도 않았다.

지금은 용서가 되지 않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몸에 남은 흔적들이 사라질 즈음에는 이 미워하고 원망하는 마음도 사라질까.

지금이 아니라 시간이 조금 더 흐르면.

“난 아직 널 용서하지 않았어, 요한 힐데스하임.”

스푼을 놓으며 레티샤가 요한을 쳐다봤다.

요한의 표정도 떨떠름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이렇게 된 이상 결론은 하나 밖에 없다.

레티샤가 떠올리는 결론을 요한이 입 밖에 꺼냈다.

“벤야민을 위해서 잠시 휴전하지.”

“널 위해서가 아니야.”

레티샤도 동의했다.

이건 전적으로 벤야민을 위해서다.

저 쓰레기 같은 인간을 위해서가 아니다.

갑자기 속에서 욱 하는 마음이 올라와서 레티샤가 최대한 싸늘하게 웃으며 말했다.

“아편이나 그런 건 치워놓는 게 나을 거야. 내가 언제 마음이 변해서 네가 마시는 술잔에 그걸 털어놓고 네가 죽는 꼴이 보고 싶어질지 모르니까.”

“너야말로 조심해. 내가 언제 마음이 변해서 여기에 살인자가 있다고 경관을 부를지 모르니까.”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조금의 양보도 없는 시선이었다.

그리고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두 사람이 각각 바라보는 양쪽의 창문 너머에 새파란 어둠이 자리하고 있었다.

새벽이 가까워진 것을 알리는 그런 새파란 어둠이었다.

어느새 눈보라가 그치고, 폭설도 멎어 있었다.

조금 전까지의 그 거센 눈보라가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그렇게.

* * *

눈이 내렸다.

본격적인 겨울을 알리는 눈이 하늘하늘 떨어지는 것을 창문의 유리창 너머로 쳐다보며 요한이 거울을 들여다봤다.

오늘의 옷차림은 완벽했다.

항상 완벽하지만 오늘은 더 완벽하다.

여전히 늘씬한 키에 아름다운 외모를 자랑하는 요한 힐데스하임 남작이 등 뒤에서 헛기침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봤다.

“형.”

휠체어를 탄 벤야민이 웃고 있었다.

“왜 웃어, 형?”

“아니, 오늘따라 옷에 신경 쓴다는 생각이 들어서.”

“그런 거 아니야.”

“오늘 누가 오더라? 겨울이니까 레티샤가 여기로 돌아오는 날이구나.”

“그 여자 때문이 아니라니까.”

“누가 뭐라고 해? 난 그냥 오늘이 레티샤가 돌아오는 날이고 오늘따라 네가 유난히 옷차림에 신경을 쓴다고 말할 것뿐이야.”

벤야민의 눈웃음이 여간 짓궂은 것이 아니다.

그때 층계를 올라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하녀가 얼굴을 내밀었다.

“레티샤 아가씨께서 오셨어요.”

반가운 소식이었다.

레티샤가 도시의 상급학교에 진학한 지 2년이 지났다.

6년을 배워야만 졸업할 수 있다는 그 상급 여학교에서 레티샤는 제법 잘 적응했다.

레티샤가 죽인 남자들에 대한 것은 요한이 전부 처리했다.

죽은 자들의 가족을 만나 충분한 위로금을 전달했고 가족들에게 그녀를 처벌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받아낸 것이다.

덕분에 레티샤는 모든 수배가 풀렸다.

그녀는 지금 의학공부를 하고 있다.

나중에 의사가 될 거냐는 물음에 의사가 되어서 벤야민을 건강하게 오래 살게 해주겠다고 그녀는 대답했다.

그 마음 때문일까.

2년이 지난 지금도 벤야민은 건강하게 잘 지내고 있다.

전에는 겨울이 오는 것이 무서웠다면 지금은 겨울을 기다리게 되었다.

겨울이 되면 레티샤가 돌아온다.

이제 벤야민에게 겨울은 즐거운 계절이 되었다.

“지난번 레티샤가 보내온 편지에 남자 이야기가 적혀 있었어.”

“남자?”

층계를 내려가며 벤야민이 하는 말에 요한이 미간을 찡그렸다.

“근처 남자대학의 한 학생이 자꾸 편지와 꽃을 보낸다고 적었던데… 아무래도 레티샤를 좋아하는 것 같아.”

“눈이 어떻게 됐나? 그런 여자 따위 뭐가 예쁘다고 꽃을 보내는 거지?”

퉁명스럽게 말하지만 요한이 계속 레티샤를 기다렸다는 것은 벤야민도 알고 있다.

물론 2년이 지나도록 레티샤와 요한은 아직도 만나면 서로 어색하고, 서로 시선을 잘 주지 않고, 그리고 어쩌다 대화라도 하게 되면 어김없이 싸운다.

하지만 2년 전보다는 작년이 낫고, 작년보다는 아마 올 해가 더 나아질 것이다.

13년이나 떨어져 있었다.

아니, 13년이나 미워한 관계다.

멀리 간 만큼 돌아오는 길도 먼 것은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돌아오고 있다는 것이다.

요한은 레티샤에게로, 레티샤는 요한에게로.

그렇게 서로에게 돌아오다 보면 어느 한순간 만나게 될 것이다. 길의 중간에서.

벤야민이 기다리는 것은 바로 그것이다.

두 사람이 돌아오는 길의 중간에서 만나는 것.

자신이 끝까지 함께 해주지 못하게 된다면, 두 사람이 서로의 가족이 되어주기를 벤야민은 바라고 있다.

이제 남은 바람은 그것뿐이다.

가장 사랑하는 동생 요한과 가장 사랑하는 누이 동생 레티샤가 상대의 손을 잡고, 서로의 가족이 되는 것. 그것 밖에 없다.

* * *

“장학금을 받았다며?”

꼭대기 층의 벤야민의 방에서 나와 층계를 내려오던 레티샤를 향해 요한이 짐짓 퉁명스럽게 말을 걸었다.

요한은 바로 아래층에서 그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다린 것이 사실이지만 기다리지 않은 척 하는 것도 잊지는 않았다.

“난 똑똑하니까.”

“다른 학생들이 모자란 거겠지.”

“네 돈 쓰지 않으려고 죽도록 공부했거든.”

“너는 오빠에게 계속 반말이지?”

“오빠? 여기에 오빠가 어디 있어? 망나니 변태 강간범 밖에는 안 보이는데?”

“레티샤 힐데스하임.”

상급학교 입학을 위해 레티샤는 힐데스하임 남작가의 성을 받았다.

“왜? 찔리시나, 강간범?”

“언제 적 일을.”

“가해자는 잊어도 피해자는 못 잊으니까.”

“그러는 넌 아편을 먹여 날 죽이려고 생각했었지?”

“난 적어도 실행에 옮기지는 않았어.”

“성경에 생각만 해도 죄가 된다고 한 거, 학교에서 채플 시간에 배우지 않았나?”

“채플 시간에는 잠만 자서 몰라.”

“하.”

요한이 어이없다는 듯 혀를 찼다.

“나 피곤해. 할 말 있으면 내일 해.”

지나쳐 내려가려는 레티샤의 손목을 요한이 잡은 것은 그때였다.

“뭐야?”

레티샤가 요한을 째려봤다.

“따라 와.”

“누가 따라갈 줄 알고.”

“잔말 말고 따라와.”

요한의 힘은 남자의 힘이다.

그가 마음만 먹으면 힘으로 얼마든지 자신을 끌고 갈수도, 짓누를 수도 있다는 걸 레티샤도 안다.

그래서 순순히 따라갔다.

한밤중에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괴물.

한때 이곳은 괴물이 사는 숲이었다.

괴물이 사는 성이었다.

요한도, 자신도 괴물이었다.

이 성에서 괴물과 괴물이 만났다.

겉이 일그러진 괴물이 아니라 마음이 일그러진 괴물들이었다, 자신들은.

자신들의 추악하게 일그러진 마음이 사랑하는 사람을 다치게 만들고, 그리고 스스로도 망가뜨린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있던 괴물이었다.

증오에 사로잡혀서 벗어나지 못했다.

13년 동안 저주에 사로잡혀 서로를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했다.

벤야민 때문에 이곳에 돌아오고는 있지만 요한을 향한 미움이 쉽게 사라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가 자신에게 한 짓을 쉽게 용서하지는 못할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요한 역시 자신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할 거라 여겼다.

서로가 서로에게 여전히 부담스럽고, 어색하고, 그리고 가까이 하지 못할 상대라고만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 저주는 언제 풀린 것일까.

서로를 향해 얼어붙었던 마음은 지난 2년의 어느 시점에서 녹기 시작한 것일까.

자신의 생일에 요한이 꽃과 샴페인을 학교로 보내주었던 그때부터일까.

아니면 자신이 병이 들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찾아와주었지만, 자신을 만나지는 않고 교문에서 돌아섰다는 이야기를 친구에게서 전해 들었을 때부터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4월의 무도회에 입을 드레스를 흰 실크 장갑과 함께 보내왔을 때였을까.

그것도 아니면, 빈민굴에서 아편 중독으로 죽은 엄마의 시신을 매장해줬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부터였을까.

언제부터였는지는 잘 모른다.

다만 지금은 더 이상 이 남자를 미워하지 않는다는 것만 알고 있다.

미워하지도 않고, 원망하지도 않는다.

그건 어쩌면 이 남자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저, 그간의 간격이 어색해서 쉽게 다가서지 못하는 것뿐이다.

요한이 레티샤를 복도의 가장 구석진 끝으로 데려왔다.

이곳이라면 사각지대라 다른 곳에서 두 사람을 볼 수가 없다.

“놔 줘.”

레티샤가 요한의 손을 밀어냈다.

그녀의 손을 놓아준 요한이 대신 그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뭐하는 짓이야?”

째려보며 묻는 레티샤의 물음에 대답 대신 요한이 그녀의 입술 위에 제 입술을 포갰다.

한 순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요한의 입술이 포개지는 순간 놀란 레티샤가 잠시 어깨를 움찔거렸지만, 그것뿐이었다.

단지 어깨를 움찔거렸을 뿐, 그를 밀어내지도, 화를 내지도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멈춘 것처럼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그리고 다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 요한이 그녀에게 속삭였다.

“그래서, 추근댄다는 그 새끼는 누구야?”

심각하게 화가 난 그의 목소리에 레티샤가 웃음을 터트렸다.

웃지 말아야 하는데, 웃음이 터졌다.

왜냐하면 자신을 바라보는 남자의 눈동자 안에 사랑이 깃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미움은 어디 가고 사랑이 들어앉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자신의 눈동자도 아마 마찬가지일 것이다.

대체 미움은 어디로 갔을까.

괴물과 함께 영영 사라진 것일까.

참, 모를 일이었다.

그녀가 웃자 요한이 다시 말했다.

“반지라도 끼워서 돌려보내야겠어.”

“누구 마음대로.”

하지만 반지는 아직 받지 않을 생각이다.

호락호락 넘어가줄 생각은 없다.

2년 정도 더 애가 타게 만들어줄 생각이다.

2년만 더.

물론 어쩌면 지금 넘어가버릴지도 모를 일이지만.

두 사람이 다시 입술을 겹쳤다.

두 사람이 서 있는 벽의 창문 너머로 눈이 내리고 있었다.

기나긴 겨울을 알리는 다정한 눈이 하늘에서 내려와 땅의 모든 허물을 그렇게 덮어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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