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물어뜯다
“벤야민? 형, 괜찮아?”
침대에 누운 벤야민의 이마에 제 이마를 대며 요한이 걱정스레 물었다.
벤야민이 열이 올랐기 때문이다.
겨울이면 항상 있는 일이다.
겨울은 벤야민에게는 가혹한 계절이다.
기관지가 약한 벤야민은 가벼운 감기에도 생명을 위협받는다.
작년 겨울에도 감기에 걸려 죽을 뻔했었다.
“그러게 왜 바깥바람을 쐬고 그랬어.”
벤야민의 이마가 뜨겁다.
“의사를 불러올 테니까 침대에서 나오지 말고 누워있어, 형.”
요한이 코트를 들고 일어섰다.
벤야민을 봐주는 의사가 도시에 있다.
마차를 타고 의사를 데려오기까지 서너 시간은 걸린다.
그때까지만 벤야민이 혼자 있어줄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다녀올게.”
문을 닫고 나온 요한이 층계를 내려오다 문득 레티샤가 있는 방 쪽을 쳐다봤다.
조용히 걸어간 요한이 그녀의 방문을 살며시 열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은 레티샤는 침대에 누워 잠들어 있었다.
아직 깨어나지 못한 것이다.
‘괜찮겠지….’
어차피 마차가 없으면 성을 둘러싸고 있는 숲을 벗어날 수 없다.
자신이 성을 비운 사이에 의식을 찾는다 하더라도 그녀가 도망칠 방법은 없다.
그러니까 잠시 정도는 성을 비워도 된다.
요한이 다시 조용히 문을 닫았다.
탁.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자 레티샤가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애초에 잠들지 않았다.
정신을 잃고 잠든 척 했을 뿐이다.
창문으로 걸어간 레티샤가 아래를 내려다봤다.
잠시 후 성에서 걸어 나가는 요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마부가 준비해놓은 마차 안에 그가 올라타고 그를 태운 마차가 하얀 눈 위에 바퀴자국을 내며 숲으로 사라지는 것을 지켜보던 레티샤가 서둘러 방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방을 나온 레티샤의 살갗에 차가운 공기가 닿았다.
방은 벽난로 때문에 따뜻했지만 성의 복도는 차가웠다.
그리고 조용했다.
마치 이 성 안에 아무도 없는 것처럼 그렇게 조용했다.
하지만 아무도 없을 리가 없다.
이렇게 큰 성을 요한 혼자서 어떻게 할 수 있을 리가 없다.
요리사, 마부, 그리고 다른 일을 봐주는 최소한의 인원이 있을 것이다.
다만 하인들의 숙소는 성 밖에 따로 있어서 성 안에 함부로 드나들지 않는 것일지도 모른다.
예전에 레티샤는 이 성 안에서 살았다.
조용히 복도를 걷던 레티샤가 발을 멈췄다.
그리고 멈춰 선 곳의 방문을 살며시 열었다.
이곳을 레티샤는 알고 있다.
전에 이 방을 쌍둥이 형제가 사용했었다.
두 개의 침대가 있는 방.
천둥 번개가 치는 밤, 엄마가 자리를 비울 때면 늘 무서워서 울곤 했었다. 그럴 때면 그 쌍둥이 형제들은 자신을 가운데에 눕혀주고 울음이 그칠 때까지 이야기를 해주고는 했었다.
천둥 번개는 구름 위에서 천사들이 마차 경주를 하는 것이라며,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아도 된다는 지어낸 이야기를 해주곤 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어이없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그 말이 두려움을 없애줬었다.
끼이익.
문을 열고 한 발자국 들어선 레티샤가 얼굴을 찡그렸다.
방은 13년 동안 그대로 보존이 된 것처럼 보였다.
불에 탄 커튼, 시커멓게 그을린 침대와 벽.
13년 전 불길이 옮겨 붙었던 그 모습 그대로 남겨져 있었다.
“내 탓이 아니야….”
시커멓게 탄 과거의 잔재를 보며 레티샤가 중얼거렸다
“그건 내 잘못이 아니라고….”
요한의 분노가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잘못이 아니다.
그때 자신은 고작 여섯 살이었다.
대체 여섯 살짜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자신에게 이러는 걸까.
죄가 있다면 그건 엄마의 죄다.
그리고 그 엄마의 죄 때문에 그날 이후로 자신의 삶도 망가졌다.
빈민가에서, 매음굴에서, 그리고 이제는 살인자가 되어 쫓기는 신세로 모든 것이 망가졌다.
그 정도면 이미 죗값을 받은 것이 아닐까.
여기서 더 어떻게 죗값을 치르라는 것일까.
만약 엄마가 저지른 죄에 대한 대가를 자신이 치러야 한다고 해도 이미 충분히 치렀다.
자신의 삶은 망가졌고, 그리고 요한은 충분히 자신을 능욕했다.
요한이 자신을 짓밟은 것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불이 났지만, 그뿐이잖은가.
엄마는 마차에서 보석 하나도 챙기지 못했고 같이 달아나던 마부의 생사는 알지도 못한다.
그 후로도 만난 적이 없다.
엄마는 불을 질렀을 뿐이다.
훔친 것들은 전부 다시 남작가로 되돌아왔을 것이다.
그리고 지금 보니 요한도 멀쩡하다.
성이 전부 타버린 것도 아니고 요한이 그 불길 속에서 죽은 것도 아니다.
그런데 13년 전에 불을 지른 것 때문에 자신에게 이런 식으로 앙갚음을 하는 남자는 얼마나 미친 괴물인가.
그 남자의 삶이 자신의 삶보다 불행했는가? 그렇지 않다.
그 남자는 여전히 이 성에서 잘 살고 있지 않은가.
남작의 작위를 이어받고 그 잘난 얼굴을 가지고 여전히 부자로 잘 살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부자로 잘 살 것이다.
그러나 자신은 앞으로도 이 비참한 삶에서 헤어나지 못할 것이다.
평생 살인자로 숨어서, 어두운 뒷골목을 전전하다 끝이 날 것이 뻔하다.
요한의 복수는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자신은 지금까지 육체의 순결을 지키기 위해 몇 명이나 죽였다.
자신을 겁탈하려던 자들을 죽이면서까지 지켜왔던 몸을 요한은 무참하게 범했다.
몸 곳곳에 요한의 흔적이 남지 않은 곳이 없다.
비록 약에 취해 있었지만 기억은 생생하다.
자신의 다리를 벌리고 밀고 들어오던 그 감각, 살결을 물어뜯던 입술, 전신을 뒤덮던 숨결, 몸을 만지던 손길.
전부 생생하게 기억한다.
더럽고 추악한 기억이다.
자신은 이제부터 그걸 끌어안고 살아야 한다.
이만하면 엄마의 죄를 다 갚았다고 오히려 소리칠 수 있을 정도다.
레티샤가 다시 문을 닫고 나왔다.
층계의 중간에 서서 그녀가 고민했다.
어차피 성 밖으로는 달아날 길이 없다.
그리고 머잖아 요한이 돌아온다.
대비를 해야만 한다.
‘약을 찾아보자.’
가장 쉬운 방법부터 최후의 방법까지 전부 다 준비를 하자고 레티샤가 생각했다.
가장 쉬운 방법은 요한에게 약을 먹여 그를 재운 후 그의 마차를 타고 달아나는 것이다.
그 방법이 통하지 않는다면 마찬가지로 요한에게 약을 먹여 그를 재운 다음, 그의 심장에 칼을 찌르고 그를 죽인 후에 천천히 이곳을 빠져나갈 준비를 하는 것이고, 그것도 여의치 않다면 이 성에 불을 지르고 도망치는 것이다.
물론, 불을 지를 때 요한은 갇혀 있거나 잠들어 있어야 한다.
이 방법들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찾아내야 할 것들이 있다.
약. 칼. 그리고 열쇠나 자물쇠.
칼은 부엌에서 쉽게 구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약이다.
요한은 자신에게 약을 먹였다.
그리고 자신을 취하게 만든 것은 아편이었다.
레티샤는 예전에 아편에 취한 사람들을 많이 봐왔었다.
빈민굴에는 아편쟁이들이 흔했다.
그리고 아주 드물게 아편을 과다 복용하고 죽는 사람들을 본 적이 있다.
보통 아편을 담배처럼 피우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지만 정말 드물게 아편을 직접 먹고 그 자리에서 죽는 사람을 본 적이 있다.
아편은 태우거나 피우지 않고 직접, 그것도 상당량을 먹으면 바로 죽는다.
수면제나 독약을 구할 수 없다면 적어도 아편이라도 손에 넣어야 한다.
이 성에는 아편이 있다.
요한이 그걸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약도 부엌에는 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 보관하고 있을 것이 틀림없다.
아래로 내려가려던 레티샤가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 넓은 성의 어디가 요한의 방인지는 모르겠지만 그 방을 찾아서 약이나 아편을 찾아낼 생각으로 레티샤가 다시 돌아섰다.
각 층 마다 모든 방의 문을 전부 열었다.
방들은 다 비어 있었다.
이 성에는 수십 개의 방이 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요한의 방처럼 보이는 곳은 없었다.
이제 남아있는 층수는 두 개다.
가장 꼭대기 층과 그 아래의 층.
예전의 기억으로는 꼭대기 층에는 책이 많은 넓은 서재가 있었다.
이전의 이 성의 주인이었던 젊은 남작은 항상 그 서재에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러면 레티샤는 두 쌍둥이와 함께 그 서재를 놀이터 삼아 숨바꼭질을 하고는 했었던 기억이 있다.
“여긴 잠겼네….”
한층 더 올라가 순서대로 방문을 열어보던 레티샤가 문이 잠긴 방을 찾아냈다.
열쇠가 없으면 열지 못하는 방이다.
‘여긴가?’
만약 이 방이 요한의 방이라고 해도 열지 못하면 소용이 없다.
지금 레티샤는 방문을 강제로 부술 힘이 없다.
아직도 다리가 후들거린다.
머리의 상처 역시 지끈거렸다.
‘어떻게 열지?’
부엌에 가면, 아니 헛간에 가면 도끼가 있지 않을까.
도끼로 문을 부수면… 그러면 안에서 아편을 훔친 것을 들키고 만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레티샤가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탁, 탁.
지팡이로 바닥을 짚는 소리에 레티샤가 고개를 들었다.
바로 위층, 그러니까 꼭대기 층의 계단에 사람이 서 있었다.
후드로 얼굴을 깊게 가렸지만 남자가 분명했다.
“아악!”
아무도 없을 거라 생각했던 레티샤가 깜짝 놀라 비명을 지르며 뒤로 물러났다.
‘누, 누구?’
이 성의 하인? 하지만 차림새가 하인은 아니다.
깊이 눌러쓴 후드에, 지팡이를 짚고 있고 등은 노인처럼 굽었다.
‘남작님?’
전 남작일까?
하지만 전 남작이 등이 굽을 정도로 나이가 많지는 않았다.
고작 13년이 흘렀다.
30대였던 남작이 저렇게 등이 굽었다고?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저 남자는 누굴까.
“레티샤?”
후드 아래에서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낮고 쉬었지만 그 목소리가 부르는 건 자신의 이름이었다.
“누구….”
겁을 먹은 레티샤가 남자를 올려다봤다.
남자는 지팡이로 계단을 짚고 다른 손으로 계단의 난간을 잡고 조심스럽게 걸어 내려오고 있었다.
“머리는 괜찮은 거니, 레티샤? 피를 많이 흘렸는데….”
누굴까?
자신이 계단에서 구른 것을 알고 있는 남자다.
요한은 아니다.
요한이 아닌데 자신의 이름을 알고 있고, 이 성에 살고 있는 남자라면….
“벤야…민…?”
아니다.
벤야민은 요한의 쌍둥이 형이다.
모든 것이 요한과 똑같다.
키와 체격도 당연히 같다.
저렇게 등이 굽지 않았다.
가까이 다가오는 남자의 후드 아래의 얼굴이 레티샤의 눈에 들어왔다.
‘어?’
레티샤가 순간 당황했다.
모르는 사람이다.
저런 흉측한 얼굴을 한 사람을 그녀는 알지 못했다.
후드 아래의 얼굴은 살이 녹아 흘러내려 끔찍한 몰골을 하고 있었다.
‘누군데 내 이름을….’
기억 속에 전혀 없는 사람이다.
“레티샤. 요한은 지금 성에 없어. 그러니까 도망치려면 지금이 기회야.”
남자가 레티샤의 손을 잡으려고 하는 순간,
“싫어-!”
소리를 지르며 레티샤가 남자의 손을 뿌리쳤다.
당연한 것이었다.
그녀의 손을 잡으려던 소매 아래 남자의 손은 흉측하게 들러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옛 이야기 속에 나오는 괴물의 손과 비슷했다.
“만지지…!”
“나야, 벤야민이야.”
순간 레티샤가 그를 밀어내려던 손을 멈췄다.
그녀의 눈이 당혹감에 물들었다.
‘벤야민? 그럴 리가….’
그녀의 기억 속에 남아있는 벤야민은 이렇지 않았다.
요한과 똑같은 얼굴에 똑같은 미소를 짓던 소년이었다.
이렇게 흉측한 손과 입술, 그리고 살갗을 가진 남자가 아니다.
“벤야민이 아니….”
“맞아. 내가 천둥과 번개의 이야기를 해주었잖아. 기억하고 있니?”
레티샤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정말 이 남자가 벤야민이 맞는 것일까?
정말 그가 맞다면 왜 이런 꼴이 되어 있는 것일까. 왜 이렇게….
‘설마….’
레티샤의 머릿속에 무서운 생각이 들었다.
“그때….”
타서 녹아내린 얼굴, 손.
타버린 흔적.
불에 탄 남자.
그때 비로소 레티샤가 깨달았다. 왜 요한이 자신을 그렇게 미워하고 있는지.
왜 요한이 자신을 그렇게 증오하고 자신을 망가뜨리려고 한 것인지 겨우, 깨달았다.
그 남자는 그의 반쪽을, 그의 영혼의 반쪽이나 마찬가지인 쌍둥이를 이렇게 잃어버린 것이다.
그의 반쪽이 이렇게 불에 타버렸던 것이다.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요한은 지금 도시에 갔어. 의사를 부르러 갔으니까 아직 돌아오려면 멀었어. 레녹스 선생은 나이가 들어서 빨리 움직이지 못하거든. 그러니까 요한이 돌아오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해.”
자신이 만지는 것을 레티샤가 원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는지 벤야민은 그녀에게서 손을 거두고 조금 물러나 계단 아래를 눈짓으로 가리켰다.
내려가라는 뜻이다.
“도망칠 수 있도록 내가 도와줄 테니까.”
벤야민이 코트를 그녀에게 건넸다.
“밖은 추워.”
후드 아래에서 그 입술이 살짝 미소를 지었다.
입술의 형태는 변했지만 레티샤는 그 미소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건, 13년 전 자신을 향해 웃어주던 다정한 소년의 미소 그대로였다.
조금도 미소는 변하지 않았다. 다만 외형만 변했을 뿐이었다.
* * *
마구간에서 벤야민이 끌어낸 것은 작은 수레였다.
마차는 요한이 타고 나갔다.
이 작은 수레는 노새가 끄는 것으로 원래는 사람을 태우는 용도가 아니라 도시에 식료품이나 그런 종류의 것들을 구입하러 나갈 때 사용하는 것이다.
레티샤를 수레에 태운 벤야민이 노새의 고삐를 흔들어 수레를 움직였다.
덜컹거리는 수레 안에 앉아 레티샤가 멀어지는 성을 뒤돌아봤다.
점점 더 성이 멀어지고 있었다.
‘도망칠 수 있는 걸까….’
이 수레는 어딘가 모르게 불안하다.
수레를 몰고 있는 벤야민도 레티샤의 눈에는 그저 위태로워 보였다.
차라리 자신이 수레를 모는 것이 더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벤야민은 이 숲의 지리에 대해서는 그가 더 잘 안다고 고집을 부렸다.
그건 맞는 말이다.
‘그때 불길에 타서 저렇게 되었겠지….’
그 아름다웠던 소년은 마치 괴물처럼 흉측하게 일그러졌다.
저렇게 13년을 살아왔는데 왜 자신을 도와주는 것일까.
왜 요한이 자신을 미워하는 것처럼 벤야민은 자신을 미워하지 않을까.
“…….”
레티샤가 아래를 쳐다봤다.
벤야민이 수레에 실어놓은 가방이 그녀의 옆에 있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걸치고 있는 외투 역시 벤야민의 것이다.
저 남자는 자신을 도망치게 하려고 미리 준비를 해놓은 것이다.
아마 요한이 싫어했기 때문에 요한이 성을 나간 사이에 이런 짓을 하는 것이리라.
“벤야민.”
레티샤가 수레를 모는 남자를 가만히 불러봤다.
이름이 자꾸만 어색하게 입안에서 맴돌았다.
예전에는 [오빠]라고 불렀지만 지금 그렇게 부를 수 있는 건 아니다.
이미 13년이나 지나버렸다.
과거는 과거일 뿐이다.
“나 혼자 갈 수 있어요.”
“또 눈이 내리고 있어, 레티샤. 서두르지 않으면 눈에 갇힐 거야.”
수레를 몰며 대답하는 벤야민의 말에 레티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그의 말대로 잔뜩 찌푸린 하늘에서 눈송이가 흩날리고 있었다.
“힘들어 보여요.”
“그렇게 보일 뿐이야. 실은 계속 수레를 몰고 싶었어. 요한이 하지 못하게 해서 그렇지.”
작게 흩어지는 웃음소리에 레티샤의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녀가 기억하는 벤야민은 항상 용감했고 무서움이 없던 소년이었다.
높은 나무 위에 올라가 떨어져 다리가 부러져도 다 나은 뒤에는 또 그 나무 위에 기어 올라갔었고, 한밤중에 반딧불이를 잡기 위해 성 주변의 숲을 걸어 다니면서도 조금도 무서워하지 않던 그런 소년이었다.
늘 웃었고, 늘 씩씩했다.
거기에 비하면 요한은 조금 겁이 많았고 불평도 많았지만 벤야민의 말을 잘 듣는 성격이기도 했었다.
“요한을 너무 미워하지 마.”
수레가 숲길을 다각다각 바퀴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요한은 요한 나름대로 무거운 짐을 지고 있는 것뿐이야. 그 무거운 짐을 어떻게 벗어야 할지 알지 못해서 화풀이를 하려는 거라고 생각해주지 않을래? 누군가에 화풀이를 하고 싶은데 그만한 화풀이 대상이 없어서 네게 그렇게 심하게 구는 거라고… 그렇게 생각해주면 좋겠다.”
“그러면 나는 누구에게 화풀이를 해야 하는 거죠?”
벤야민의 말처럼 그렇게 생각해줄 수 있다.
그래, 화풀이 정도로 생각해줄 수 있지만 그렇다면 자신은, 자신도 삶이 망가졌는데 자신은 누구에게 화풀이를 해야 하는 걸까.
“내가 사과할게, 요한 대신에.”
벤야민의 대답에 레티샤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벤야민의 사과를 받고 싶은 것이 아니다.
아니, 굳이 사과를 받아야 하는 건 아니다.
화풀이를 꼭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지금은 그냥 이곳에서 달아나기만 해도 모든 것을 다 잊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이 성에서, 저 미친 요한에게서 달아날 수만 있다면 다시 되찾은 기억을 봉인하고, 다 잊고 그렇게 살아가고 싶다.
무사히 도망칠 수만 있다면.
레티샤가 말을 하지 않자 벤야민도 더는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노새가 끄는 덜컹거리는 수레에 탄 두 사람의 위로 소리 없이 눈송이가 떨어졌다.
머리 위에 내려앉는 눈송이는 점점 커지고 있었다.
그리고 두 사람이 탄 수레가 지나온 그 바퀴 자국 위로 눈이 쌓여갔다.
* * *
“남작님-!”
마부가 놀라서 요한에게로 달려왔다.
요한은 말 위에 올라타고 있었다.
이미 머리 위로 폭설이 시작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한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숲은 눈에 뒤덮이고 만다.
“남작님! 지금 숲으로 가시면 큰일 나십니다!”
마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려 있었다.
조금 전 요한과 마부는 도시에서 돌아왔다.
평소 벤야민의 몸을 돌봐주는 의사 레녹스를 마차에 태우고 함께 성으로 돌아왔지만 벤야민은 방에 없었다.
벤야민의 침대가 비어있는 것을 확인한 순간 요한은 제일 먼저 레티샤의 방으로 달려갔다.
당연한 것처럼 그녀의 방도 비어 있었다.
마구간에는 노새와 수레가 사라진 채였다.
레티샤가 벤야민을 위협해서 도망친 것인지 아니면 벤야민이 레티샤를 데리고 도망친 것인지 거기에 대해서는 요한도 알지 못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레티샤가 도망쳤고 저 숲 어딘가에 벤야민이 있다는 것이다.
도망친 레티샤를 생각하면 분노가 치밀었고, 벤야민을 생각하면 두려움이 일어났다.
벤야민은 힘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몸이 아니다.
수레를 타고 이 추위에 폭설이 내리는 숲에 갇히게 되면 벤야민은 돌이킬 수 없게 될지도 모른다.
형이 죽는다.
그의 죽음에 대해서 요한은 지금까지 수십 번 생각해왔다.
그건 요한 자신에게 일어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일이다.
형의 죽음.
[내가 죽으면?]
[너도 알잖아. 나는 이제 슬슬 한계라는 것을.]
벤야민이 죽으면, 그러면 자신도 죽는다.
자신들은 같은 날, 같은 시간에 태어난 쌍둥이다.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이 당연했고, 모든 것을 함께 하는 것 역시 당연했다.
그 당연한 것을 깨뜨린 것이 한나, 그 여자였다.
그 여자가 지른 불이 모든 것을 망가뜨렸다.
그리고 벤야민과 자신은 다른 삶을 살아왔다.
지금 자신이 누리는 모든 것은 전부 벤야민의 희생에 의한 것이다.
벤야민이 스스로를 희생했기 때문에 자신은 살아서 남작이 되었다.
그러나 살고 싶어 살아온 삶은 아니다.
부모님의 죽음, 벤야민의 상처. 그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죽고 싶었지만 지금까지 요한을 버티게 한 것은 자신이 없으면 벤야민을 돌봐줄 사람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만약 벤야민이 죽으면, 더는 자신도 이 힘겨운 삶을 버텨야 할 이유가 없다.
벤야민이 죽으면 자신도 죽는다.
이게 요한의 각오다.
삶의 의미는 진즉에 잃어버렸다.
왜 살아야 하는 건지 이미 오래 전에 알 수 없게 되었다.
한나와 그의 딸을 향한 복수심과 증오, 그리고 벤야민에 대한 책임만이 요한을 지탱해왔다.
그런데 이제 복수가 끝나고 벤야민을 잃는다면, 자신도 이 힘겨운 삶을 끝장낼 생각이다.
성을 불태우고 그 불타는 성 안에서 스스로를 태우고 모든 것과 함께 재가 되는 쪽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벤야민의 죽음 이후다.
아직 벤야만은 죽지 않았다.
저 숲 어딘가에 있다.
“레녹스 선생을 성으로 모셔라. 나는 형을 찾아서 데려 올 것이다. 형을 찾아 데리고 오면 레녹스 선생의 도움이 필요할 것이니 절대 돌아가지 못하게 하거라.”
마부에게 신신당부를 한 요한이 말 머리를 숲으로 돌렸다.
아직 멀리까지 가지 못했기를 바랄 뿐이다.
지금 쏟아지고 있는 눈이 수레의 바퀴 자국을 아직 전부 덮지 않았기만을 바라며 요한이 숲을 향해 말을 달렸다.
* * *
콰당-!
사냥꾼지기의 오두막의 문을 열어젖힌 벤야민이 레티샤의 손을 잡아끌었다.
눈으로 잔뜩 뒤덮인 두 사람이 오두막 안으로 비틀거리며 들어와 쓰러졌다.
오두막 안도 냉기로 가득했지만 눈보라만은 겨우 면했다.
점점 크게 쏟아지던 폭설이 기어이 눈보라로 변한 것이다.
결국은 숲을 다 빠져나기기도 전에 눈보라를 피할 곳을 찾아 벤야민이 수레의 방향을 이쪽으로 틀었다.
이곳에 사냥꾼들이 사용하는 오두막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아… 하아….”
벤야민이 거친 숨을 헐떡였다.
레티샤 역시 얼어붙은 몸을 바들바들 떨며 웅크렸다.
눈으로 하얗게 뒤덮인 그녀의 온몸이 꽁꽁 얼어 있었다.
입고 있던 외투도 소용이 없을 정도로 추위는 무서웠다.
바닥에 엎드려 쓰러진 채로 숨을 고르던 벤야민이 싸늘한 재만 남은 벽난로 쪽으로 기어갔다.
그리고 품 안에서 성냥을 꺼내 불을 켠 다음 제 손수건에 불을 붙였다.
불붙은 손수건을 벽난로 안에 던져놓고 그 위로 타다 남은 장작을 올리자 잠시 후 장작에 불이 붙어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레티샤, 여기로 와서 몸을 녹여.”
불이 붙은 것을 확인한 벤야민이 덜덜 떨고 있는 레티샤를 불렀다.
자신이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벤야민의 안에 조금씩 밀려 들었다.
성에 남아 있었으면 이렇게 얼어 죽을 뻔한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행동 때문에 레티샤가 얼어 죽을 뻔했다.
물론 성에 남아 있었더라면 레티샤는 다시 요한에게 능욕을 당했을 것이 뻔하다.
능욕당하는 것과 얼어 죽을 뻔한 것. 어느 쪽이 더 최악일까.
“눈보라는 곧 지나갈 거야.”
아직 저녁이 되지 않았다.
밤이 오지 않았는데도 눈보라가 거세어 앞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한밤중의 눈보라라면 몰라도 이런 한 낮의 눈보라는 곧 멎을 수도 있다.
‘요한은 돌아왔을까….’
지금 벤야민의 걱정은 요한이다.
지금쯤 요한이 성으로 돌아왔을 것이다.
성으로 돌아온 요한이 자신과 레티샤가 사라진 것을 알면 화가 나서 쫓아올 것이 뻔하다.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이 눈보라가 자신들의 흔적을 지워 요한이 자신들을 찾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게 아니면 요한의 발이 이 눈보라에 묶여 쫓아오지 못할 수도 있다.
“레티샤. 많이 춥니?”
벤야민이 제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레티샤에게 덮어줬다.
그녀에게 두 겹의 외투를 덮어주고 자신은 후드 한 장만 걸친 벤야민이 그녀의 곁에 앉았다.
벤야민의 몸도 덜덜 떨렸다.
벤야민은 추위에 약하다.
한번도 이런 추위에 노출된 적이 없다.
13년 동안 요한에게 보호받아 왔다.
요한은 완벽한 보호자였기 때문에 벤야민은 이렇게 힘든 상황은 한 번도 겪어본 적이 없다.
밖이, 겨울이 추운 것을 모르고 살아왔다.
요한은 오랜 시간 자신을 지켜왔고, 그와 동시에 요한은 오랫동안 혼자 상처 받아왔다.
오랫동안 혼자 버텨야 했고, 오랫동안 혼자 스스로와 병든 형을 지키려고 애를 써야 했다.
지금 요한이 레티샤에게 한 짓을 변호할 생각은 없다.
하지만 그런 짓을 할 정도로 요한 역시 마음이 병들어왔다는 것만큼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벤야민 자신만은 알고 있다.
결국 그날의 일로 모두가 상처 받았고, 모두가 괴물이 되었다.
요한도, 자신도.
그리고 레티샤도 상처받았다.
[그러면 나는 누구에게 화풀이를 해야 하는 거죠?]
그녀는 울지 않았지만, 그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결국, 모두가 상처입고 모두가 괴물이 되었다.
자신들 세 사람, 그 누구의 잘못도 아닌데.
정작 그때의 일에 누구도 책임이 없는데, 자신들 세 사람은 어쩌면 그저 희생자일 뿐인데, 자신들이 오히려 괴물이 되었다.
“레티샤.”
두 겹의 외투를 입고 고개를 숙인 채로 덜덜 떨고 있는 레티샤를 벤야민이 바라봤다.
“너도 힘들었다는 걸 알지만… 요한이 네게 몹쓸 짓을 한 것도 알지만… 용서를 구하는 내가 염치가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안해. 네게 미안해. 요한은 아주 오랫동안 괴로워했고 그래서 마음에 병이 든 거야.”
“나는….”
고개를 숙인 채로 레티샤가 중얼거렸다.
“나라고… 편하게 살았던 건 아니에요….”
“알고 있어.”
“뭘 알고 계세요?”
무릎에 이마를 댄 채로 레티샤가 벤야민을 바라봤다.
그녀의 창백한 얼굴에는 원망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요, 사람을 죽였어요….”
그 말을 하는 그녀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몇 사람이나 죽였어요.”
“레티샤.”
“날 겁탈하려고 그랬어요. 그래서 내가 먼저 죽였어요. 나는요 빈민굴에서 자랐어요. 여기를 떠나 도망친 곳이 겨우 빈민굴이었고 엄마는 매춘부가 되어 몸을 팔았어요. 마차 사고로 기억을 잃고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그런 곳에서 자라며 나는 대체 하나님이 내게 왜 그러는지 알지 못했어요. 매일 하나님을 원망했어요. 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냐고 매일 원망하고 매일 울고… 매일 그곳을 벗어나고 싶었어요. 정말 벗어날 수만 있다면 뭐든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어요….”
벤야민은 그녀의 말을 듣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당한 일이 아니다.
함부로 위로를 할 수 없다.
자신이 고통 받던 13년, 요한이 괴로워하던 13년. 그 13년 동안 레티샤 역시 괴로워하고 있었다.
자신의 고통을 자신 밖에 모르듯이 레티샤의 고통도 그녀 외에는 알지 못한다.
그것을 아는 척 위로하는 것은 위선이다.
“매일 그 끔찍한 지옥에서 벗어나는 꿈을 꿨어요. 누구라도 제발 나를 구해주기를 매일 같이 기도하고… 내 기도는 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어느 날 하늘에서 천사가 내려와 나를 구해줄 거라는 희망을 버리지 못했어요.”
레티사가 목에 걸고 있던 펜던트를 만지작거렸다.
“기억이 없던 시절에, 이 펜던트를 보며 여기에 적힌 B와 J가 누구일까 항상 생각했었어요.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누군지 알 수가 없었죠. 그래서 생각했어요. 이 B와 J는 왕자님일 거라고. 왕자님… 아주 오래 전에 왕자님이 이 펜던트를 내가 잠든 틈에 걸어주고 갔고, 나중에 나를 다시 데리러 올 거라고 혼자서 동화를 쓰고 살았어요. 자고 일어나면 언젠가는 왕자님이 나타날 거고,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믿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어요.”
레티샤가 펜던트를 꽉 쥐었다.
“바보 멍청이였죠. 그런 일이 일어날 리가 없는데… 지금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세요?”
“아니.”
“만약 계단에서 굴러서 이대로 기억이 돌아오지 않았더라면 차라리 좋았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어요. 차라리 다 잊고… 옛날 일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고… 그냥 요한을 미워하고 싶으니까요. 추악하고 괴물 같은 인간이라고 증오하고 이를 갈고 싶으니까요.”
“그 불길 속에서.”
벤야민이 차가워진 손에 입김을 불었다.
벽난로에서 장작이 타들어가도 오두막 안의 냉기는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벽난로의 장작이 적어서 냉기가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 마음이 추워서 이 냉기가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
벤야민의 말에 레티샤가 눈을 질끈 감았다.
왜 힐데스하임 성에 남작이 보이지 않는지 그 이유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요한과 나를 구하려고 뛰어 들어오셨다가… 그때 아버지의 목소리가 지금도 선명해. 동생을 데리고 나가, 계속 그렇게 소리치셨어.”
“나는… 몰랐어요….”
“그날, 네 이마에 열이 있어서 요한이 걱정을 많이 했었어. 한나가 너를 의사에게 보이지 않으면 어떻게 하지? 그렇게 몇 번이나 물었었어. 한밤중에라도 몰래 침대에서 나가서 네 방으로 가 네 이마를 만져보자는 말도 했었어. 요한은 항상 네 걱정뿐이었잖아. 그랬는데 불이 나고, 문은 열리지 않았어. 두드리고 소리쳐도 문이 열리지 않고 불길이 번지는데 요한이 울었어. 요한의 옷에 불이 옮겨 붙는 걸 보는 순간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 침대 시트로 요한을 덮고 그대로 요한을 끌어안았어. 불길이 나를 덮치고… 뜨거워 죽겠는데도 요한을 놓을 수가 없었어. 얼굴이 타고 숨이 막히고… 무서운데도 울 수 없었어. 그때 아버지가 문을 부수고 들어오셨어. 나를 먼저 불길 밖으로 던지고, 요한을 침대 시트와 함께 던진 직후에 쓰러지시고, 일어나지 못하셨어.”
마치 고해를 하듯, 마치 변명을 하듯, 마치 변호를 하듯 그렇게 벤야민이 말을 이어갔다.
이건 누구에게 하는 변명일까.
이건 누구를 위한 변호일까.
이건, 누구를 위한 고해일까.
“그리고 어머니가 돌아가셨어. 그때 우리는 고작 열 한 살이었어. 나는 화상을 입어 사경을 헤매고 있었고 요한 혼자 모든 것을 책임져야했어. 부모님의 장례식, 저 성을 지키는 것, 그리고 나를 지키는 것, 나를 보호하는 것까지 전부. 열 한 살의 요한의 어깨에 올려진 짐이었어. 거기에 나를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까지 더해서. 레티샤. 요한이 괴물이 된 것이 아니라 내가 요한을 괴물로 만든 거야. 그 불이, 그 상황이, 그 비극이 요한을 그렇게 밀어붙인 거야. 네 상황이 너를 밀어붙여서 사람을 죽이게 만든 것처럼. 너도, 요한도 그렇게 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몰려버린 거야.”
벤야민이 레티샤를 바라봤다.
“너도, 요한도 그랬을 뿐이야. 하지만 그래서 그런 거라고 계속 그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하면 결국 진짜 괴물이 되고 마는 거야. 지금은 아직 돌이킬 수 있다고 믿어. 우리 모두. 아직 늦지 않았다고. 너도 늦지 않았고 요한도 늦지 않았고. 아직은 삶이 남아 있잖아. 아직은 삶을 바꿀 수 있는 기회가 남아 있잖아. 이전에 괴로웠던 것보다 앞으로 남아있는 삶은 두 배, 혹은 세 배는 더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기회가 아직 있다면, 나는 네가, 그리고 요한이 그 기회를 잡았으면 좋겠어. 다시 행복해질 수 있는 기회. 발을 점점 끌어당기고 있는 그 늪에서 빠져나올 기회.”
아직은, 늦지 않았다고 벤야민은 믿고 있다.
지금이 절망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아직 생명이 붙어 있다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손에 피가 너무 많이 묻었다고, 지은 죄가 너무 많다고, 과거가 너무나 끔찍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대로 포기하면 더 나빠질 것이고, 지금 헤어 나오려고 발버둥을 친다면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벤야민이 바라는 것은 그것이다.
작은 레티샤가 이제는 괴로움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자신의 쌍둥이가 이제는 죄책감에서 벗어나기를 바란다.
자신이 사랑해 마지않는 두 사람이 이제는, 괴로워하지도, 미워하지도 않기를 바란다.
서로가 서로에게 한 짓이 있고, 그 상처들이 쉽게 사라지진 않겠지만 오래 걸리더라도 자신이 사랑하는 이들이 이제는 과거의 사슬을 끊어버리기를 간절히 바란다.
자신이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을 벤야민은 알고 있다.
지금부터 몇 년을 더 살까.
1년? 3년?
자신은 죽으면 끝이지만, 아직 기회가 있는 이들에게는 행복이 남겨졌으면 한다.
그래서 지금 이렇게 레티샤를 도망치게 돕는 것이다.
“당신은….”
벤야민의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레티샤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나를 원망하지 않나요….”
어찌 보면 가장 큰 피해자는 벤야민이다.
누구보다 끔찍한 괴로움 속에서 살아온 것은 그녀 자신도, 요한도 아닌 벤야민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자신을 원망하지 않는 것일까.
레티샤는 그것이 알고 싶었다.
자신을 도망치게 해주고, 지금도 입고 있는 외투를 벗어 자신에게 준 이 남자는 정말 자신을,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를 조금도 원망하지 않는 것일까.
“나는 너를 다시 만나서, 기뻐.”
벤야민이 작게 웃었다.
“13년 동안 너를 걱정했어. 천둥 번개가 치면 무서워서 울 텐데… 하고. 항상 걱정했었어.”
남자의 대답에 레티샤가 무릎에 얼굴을 묻었다.
눈물이 왈칵 쏟아질 것 같아서였다.
누구도 자신에게 이런 말을 해준 사람이 없다.
자신을 만나서 기쁘다는 말, 염려했다는 말, 이렇게 따뜻하고 다정한 이야기는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다.
13년 동안, 그녀는 너무 추웠다.
그녀의 겨울은 13년이나 이어졌다.
그래서 마음이 꽁꽁 얼어붙어 이제는 녹을 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그 얼어붙었던 마음이 녹아내리는 것을 레티샤가 느꼈다.
이렇게 쉽게 녹아내리는 마음이 13년이나 얼어붙어 있었다.
“눈보라가 그쳤나 보고 올게, 레티샤.”
무릎에 얼굴을 묻고 더는 말을 하지 않는 레티샤를 두고 벤야민이 일어섰다.
하지만 벤야민이 문을 열기 전에 오두막의 문이 거칠게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