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괴물과 괴물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짚으며 층계를 내려온 남자가 소리가 들려오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잠시 그쪽을 쳐다보던 남자가 그쪽으로 조용히 걷기 시작했다.
남자의 등은 굽었고 그는 깊은 후드를 뒤집어쓰고 있었다.
절룩거리며 느릿느릿 걸어간 남자가 소리가 새어나오는 문 앞에서 발을 멈추고 문에 귀를 댔다.
문 안쪽에서 음란한 교성이 잠시도 멈추지 않고 흘러나왔다.
잠시 동안 그렇게 서 있던 남자가 다시 느릿느릿 그 문에서 멀어졌다.
맨 아래층으로 내려온 남자가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밖은 어두웠다.
하지만 눈은 그쳐 있었다.
멈추지 않고 쏟아질 것처럼 보이던 폭설이 어느 순간 멎어 있었다.
긴 소매 밖으로 비집어 나온 남자의 손은 손가락의 구분이 없었다.
원래는 있어야 할 손가락들이 살이 녹아내려 한 덩어리로 들러붙어 엄지와 나머지 손으로 구분이 되었다.
양손이 모두 그랬다.
후드의 아래로 조금 비치는 얼굴의 아래쪽은 녹아내린 살이 굳어 흉측했고 불이 붙었던 당시의 흔적이 아직 역력하게 남아 있었다.
입술은 전부 말려 올라갔고 턱 쪽으로는 뼈가 보였다.
턱 아래쪽의 살이 녹아내려 구멍이 뚫린 탓에 물을 마시면 그 구멍으로 흘러내린다.
후드에 가려졌지만 한쪽 귀는 녹아내려 들리지 않고 한 쪽 귀로만 소리를 들을 수 있다.
다행히 눈은 양쪽이 전부 보여서 책을 읽는 것에는 문제가 없다.
다만 기관지가 약해진 탓에 겨울이면 항상 감기에 들려 몇 번 정도는 사경을 헤맬 때가 있다.
이 남자의 이름은 벤야민이다.
벤야민 힐데스하임.
원래 남작가의 장남으로 남작의 작위를 계승해야 하지만 몸이 이렇게 된 이후 쌍둥이 동생인 요한에게 작위를 양보하고 동생의 도움을 받아 살아가고 있다.
혼자서는 살 수 없는 몸이라서 동생이 없으면 이 남자는 죽고 만다.
“레티샤… 요한….”
벤야민은 아직 나쁘지 않았을 때의 동생과 레티샤를 지금도 선명하게 기억을 하고 있다.
좋았던 그때를 아직 잊지 않고 있다.
요한의 기억 속에서 행복했던 때는 그 불길과 함께 사라졌겠지만 벤야민의 머릿속에는 아직 그때의 기억은 타지도 않았고 재가 되지도 않았다.
여전히 생생하게 남아있다.
그리고 그 좋았던 시절의 기억이 지금 벤야민을 살아가게 하는 힘이다.
벤야민은 왜 요한이 괴물처럼 변했는지 알고 있다.
전부 자신 때문이다.
요한의 분노는 죄책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형인 자신을 구하지 못했다는 죄책감.
자신만 이런 꼴이 되게 하고 그는 멀쩡하게 살아남았다는 그 죄책감이 요한을 점점 삐뚤어지게 만들더니 결국은 지금 같은 기형적인 마음으로 만들어놓고 말았다.
13년 전 자신은 있는 힘을 다해 동생을 지키려고 했지만 결국 지켜내지 못했다.
불길 속에서 동생의 몸은 구했지만 마음은 구하지 못했다.
“눈이 그쳤네….”
차가운 공기가 고요하게 내려앉은 어둠을 벤야민이 조용히 바라봤다.
이 성에 갇혀 13년을 살았다.
불길과 연기로 가득하던 그 방에서는 도망쳤지만 이 성에서는 13년째 도망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언제까지 갇혀 있지 않을 거라는 것을 벤야민 스스로는 잘 알고 있다.
요한은 모르지만 벤야민은 알고 있다.
13년. 오래 버텨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그리 오래 버티지 못할 것이다.
13년을 버텨온 것도 기적이다.
단 하나 걱정이 있다면 자신이 죽고 나면 혼자 남을 동생이다.
요한 혼자 이 성에 남겨지게 되면, 요한은 어떻게 되는 것일까.
마지막까지 동생이 걱정이다.
그리고 레티샤가 마음에 걸린다.
레티샤.
그 어렸던 아이는 어떻게 변했을까.
곰 인형을 꼭 끌어안고 자신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여자 아이는 13년 사이에 어떻게 변했을까.
레티샤에게 잘못이 없다는 것을 자신은 알지만 아무리 말해봤자 요한에게는 통하지 않을 것이다.
요한은 기어이 레티샤를 망가뜨리려고 할 것이고, 레티샤는 이곳에서 떠나야 한다.
‘내가… 할 수 있을까….’
지팡이를 짚고 겨우 걸을 수 있는 이 몸으로 그녀를 도망치게 도울 수 있을까.
말도 타지 못하고 뛰지도 못한다.
이런 몸으로 레티샤를 어떻게 도와야 할지 지금은 알 수가 없다.
방법은 모르지만 생각해내야 한다.
반드시.
* * *
“하윽, 아, 아, 아아!”
다리를 벌리고 앉은 채로 레티샤가 엉덩이를 흔들었다.
침대에 누워있는 요한의 하체 위에 다리를 벌리고 앉은 레티샤가 요한의 분신을 제 몸에 넣은 채로 앞뒤로 엉덩이를 흔들었다.
그녀의 엉덩이가 내려왔다 올라갈 때마다 그녀의 음부 사이로 요한의 성기가 드러났다 삼켜졌다.
“아, 아앗! 아! 아아!”
레티샤가 허리를 떨며 요한의 가슴으로 엎어졌다.
덕분에 그녀의 몸 안에서 요한의 성기가 뽑혀나가며 하얀 정액이 주르륵 흘러나왔다.
“흐응…!”
제 몸 위로 엎어진 레티샤를 아래로 깔아뭉개며 요한이 그녀의 위에 올라탔다.
그리고 그녀의 한쪽 다리를 들어올리고 아직까지 자신이 쏟아낸 정액을 흘리고 있는 음부 안으로 다시 분신을 쑤셔 박았다.
“하으아!”
다시 박혀 들어오는 성기의 압박감에 레티샤가 숨을 헐떡이며 기분 좋은 소리를 질렀다.
그녀의 얼굴은 발갛게 달아올라 땀에 절어 있었다.
요한의 움직임에 맞춰 그녀가 허리를 흔들었다.
지금이 밤인지 낮인지 그런 구분도 레티샤의 머릿속에는 없었다.
자신이 지금 어디에 있는지, 누구와 무엇을 하고 있는지도 잊어버렸다.
사람을 죽이고 쫓기는 몸이라는 것도, 폭설이 그치면 떠날 생각이었다는 것도 이미 벌써 잊었다.
이 방에 갇혀 벽난로에서 타들어가는 아편의 향을 맡으며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요한의 아래에 짓눌려 며칠이나 지났는지 레티샤는 전혀 알지 못했다.
아편이 점점 기억을 침식해서 이제는 자신의 이름조차 가물거렸다.
이름도 가물거리고 모든 것이 흐릿한 그녀에게 남아있는 유일한 감각은 쾌락이었다.
“하윽! 하으, 아, 아아!”
요한의 아래에서 흔들리며 레티샤가 소리를 질렀다.
“아아! 아! 좋아… 좋아요….”
황홀한 쾌락에 사로잡혀 레티샤가 남자의 등을 끌어안았다.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남자의 성기가 거침없이 드나들었다.
“흐응! 아! 아아! 거기… 아아, 거기, 거기 좋아…! 하아… 거기, 거길 더, 더 세게….”
요한이 거칠게 쑤실 때마다 레티샤가 희열을 호소했다.
흠뻑 젖은 채로 벌름거리는 구멍 안으로 단단하게 성난 기둥이 질척거리며 파고 들 때마다 레티샤의 허리가 음란하게 흔들렸다.
“하으! 아! 아아아!”
요한이 레티셔의 한 쪽 다리를 제 어깨 위에 올렸다.
한쪽 다리를 그의 어깨에 올린 채로 잔뜩 벌어진 그녀의 음부에서 말간 애액이 주룩주룩 쏟아졌다.
“레티샤, 이 더러운 갈보년. 입도 한 번 써봐야 하지 않겠어?”
그녀의 안에서 분신을 뽑아낸 요한이 그녀를 제 하체 앞으로 끌어당겼다.
“흣….”
요한의 가랑이로 끌어당겨진 레티샤가 자신의 애액이 번들거리는 그의 물건을 입안에 삼켰다.
거부감 같은 것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허겁지겁 입을 열어 그것을 삼키며 레티샤가 지독한 흥분에 휩싸였다.
목구멍을 열어 끝까지 그것을 삼키며 혀를 휘감고 빨아 들였다.
입안 가득 번지는 음란한 향에 레티샤가 게걸스럽게 요한의 물건을 빨았다.
“흐읍, 읍, 으읍….”
그의 가랑이에 얼굴을 처박고 입안 가득 고이는 타액을 삼켜가며 정신없이 혀를 움직이며 빠는 사이에 점점 입안에서 부풀어 오른 것이 그녀의 입안에서 토정했다.
레티샤의 입안 가득 남자의 냄새가 퍼졌다.
뜨거운 것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는 것을 꿀꺽꿀꺽 삼키며 그녀가 그제야 입술을 뗐다.
미처 삼키지 못한 하얀 것이 그녀의 입술에 뚝뚝 떨어졌다.
“더러운 년. 그게 맛있지?”
제 앞에 엎드린 레티샤를 발로 걷어차 침대 아래로 떨어뜨린 요한이 일어나 앉았다.
그리고 벗어뒀던 겉옷을 걸치며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벌거벗은 채로 바닥에 쓰러져 꿈틀거리며 레티샤가 남자를 올려다봤다.
입술을 움찔거리며 여전히 몽롱한 쾌감에 자신을 올려다보는 그녀를 경멸의 눈빛으로 내려다보던 요한이 그녀의 몸뚱이에 침을 뱉었다.
“이 맘 때면 항상 집시들이 이 근처에 오곤 하지. 눈이 그치면 집시들이 있는 곳으로 데려가서 그 좋아하는 것에 실컷 박히게 해주마. 박히는 것이 좋지? 기대해도 좋아. 집시들이 번갈아가며 네 가랑이 사이에 박아줄 테니까. 그 구멍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말이야.”
차가운 눈으로 레티샤를 흘기며 요한이 방을 나갔다.
요한이 나가고 혼자 남은 레티샤가 천정을 향해 누웠다.
“하아… 하아….”
그녀의 눈동자는 탁했다.
아편의 향이 빠져나가지 못하게 요한이 창문에 못을 박아놓았기 때문에 방안에는 온통 더운 기운이 가득했다.
아편의 향과 벽난로에서 타는 장작의 냄새, 그리고 정액의 냄새와 땀냄새가 방에 가득 했다.
레티샤의 눈이 창문을 향했다.
창문 너머의 어둠이 그녀의 눈동자에 비쳤다.
눈이 그쳐 있었다.
더는 폭설이 내리지 않았다.
레티샤가 고개를 돌렸다.
조금 전에 요한이 열고 나간 문이 보였다.
‘문….’
문을 보며 레티샤가 뭔가를 떠올리려고 애썼다.
자꾸만 뭔가가 기억이 나려고 하는데 그것이 이내 뿌연 아편의 향에 뒤덮였다.
‘눈이 그치면….’
그래.
눈이 그치면 뭔가를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그게 뭔지 기억해낼 수가 없다.
‘눈이 그치면….’
자꾸만 가물거리는 생각을 잡기 위해 레티샤가 입술을 깨물었다.
눈앞이 흐릿했다.
* * *
“벤야민?”
층계를 내려오던 요한이 문 앞에 서 있는 벤야민을 발견하고 걸치고 있던 겉옷을 벗으며 걸어왔다.
“감기 걸려, 형.”
벗은 겉옷을 벤야민의 어깨에 둘러주며 요한이 문을 닫았다.
“왜 여기까지 내려온 거야?”
“레티샤는?”
“왜? 만나보고 싶어?”
“레티샤에게 그러지 마.”
“내가 뭘?”
“요한.”
“그 소리 들었지? 좋아하고 있잖아. 박아달라고 애걸복걸하는데 그걸 외면하면 그게 더 나쁜 것 아닌가?”
“레티샤에게는 죄가 없다는 걸 알고 있잖아.”
“형.”
벤야민의 등을 팔로 감싼 요한이 그를 응접실의 소파로 이끌었다.
그리고 소파에 앉게 한 다음 지팡이를 옆에 두고 [홍차?]하고 물었다.
벤야민이 즐겨 마시는 홍차를 끓여온 요한이 두 개의 찻잔 중에서 식은 차가 담긴 쪽을 벤야민의 손에 쥐여 줬다.
손가락이 없는 벤야민은 두 손으로 모아 쥐어야 찻잔을 잡을 수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벤야민 전용의 찻잔에는 손잡이가 없다.
그리고 벤야민의 차는 항상 미지근하게 식힌다.
요한의 모든 것은 벤야민에게 이런 식으로 맞춰져 있다.
몸이 불편한 형을 13년이나 보살펴왔기 때문에 아주 사소한 부분까지 세심하게 신경을 쓰는 것이 습관이 되었다.
“천천히 마셔, 형.”
“요한. 아버지 어머니가 돌아가신 것도, 내가 이렇게 된 것도 레티샤의 잘못이 아니야. 고작 여섯 살짜리 아이에게 무슨 잘못이 있겠어. 그건 불행한 사고였고….”
“사고는 아니지, 형. 사고는 아니었어. 알잖아, 그게 어떻게 사고가 될 수 있어? 기름은 미리 바닥에 뿌려진 채였고 거기에 촛불을 붙인 것은 그 여자야. 그리고 그 여자가 밖에서 문을 잠갔어. 우리가 도망칠 수 없게. 형, 나는 하나도 잊지 않았어. 전부 기억해. 아주 작은 것 하나까지도. 잊을 수가 없으니까.”
“전부 기억한다면 레티샤가 얼마나 사랑스러운 아이였는지도 기억하고 있겠네.”
벤야민의 말에 요한이 미간을 찡그렸다.
“그 애가 우리에게 줬던 행복했던 시간도 기억하고 있겠네. 그 애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즐거웠고, 얼마나 행복했고… 기억하고 있지? 그 애가 걸음마를 할 때 너와 내가 번갈아가며 손을 잡아줬던 것을. 그 아이가 넘어져서 이마에 큰 상처를 입었을 때 네가 어떻게 했었는지도 기억하고 있어? 나는 기억하고 있어. 너는….”
“듣고 싶지 않아.”
“밤새도록 그 애 침대 옆에서 울었었잖아. 이마에 상처를 입혔다고. 이마에 상처를 입힌 것 때문에 그렇게 울었으면서, 지금 그 애를 상처 입히려고 그러는 거니?”
“기억 안 나.”
요한이 고개를 저었다.
“그날 이전의 기억은 다 버렸어. 나는 그날 일만 기억할 뿐이야.”
“만약.”
벤야민이 홍자를 한 모금 마시고 찻잔을 내려놓았다.
구멍이 뚫린 턱으로 스며 나오는 찻물을 요한이 손수건으로 닦아줬다.
“너의 그 복수가 끝나면 그때부터는 어떻게 할 생각이니?”
“형하고 행복하게 살아야지.”
“내가 죽으면?”
“형.”
벤야민이 흐릿하게 웃었다.
“너도 알잖아. 나는 이제 슬슬 한계라는 것을.”
“쓸데없는 말 하지 마. 내가 죽는 꼴을 보고 싶으면 마음대로 죽어. 형이 죽으면 나도 죽어.”
벤야민이 손을 내밀어 요한의 무릎 위에 올렸다.
“그때 내가 죽었으면 차라리 나았을까 하는 생각을 가끔 해. 그러면 너는 훨씬 더 자유롭게 살 수 있었을 텐데 하고 말이야. 지금 이런 모습이 아니라.”
“나는….”
요한이 제 무릎 위에 얹어진 벤야민의 손을 잡고 눈을 감았다.
“나는… 내가 그때 왜 겁쟁이처럼 굴었을까 그걸 늘 후회해. 왜 형이 날 감싸준 것처럼 나는 형을 감싸지 못했을까 하고.”
“그거야 내가 형이니까.”
벤야민이 요한의 머리를 손으로 쓰다듬었다.
“형은 원래 동생을 지키는 거야. 형은 원래 그런 거야. 그리고… 레티샤는 우리 동생이야, 요한. 우리가 그 애 오빠야. 오빠는 동생을 지키는 법이야. 그러니까… 제발 그 애를 더는 힘들게 하지 마.”
제 머리를 쓰다듬는 벤야민의 손길에 요한이 눈을 감았다.
자신들은 쌍둥이다.
벤야민이 자신보다 조금 일찍 세상에 태어났고 그 후에 요한 자신이 태어났다.
쌍둥이지만 벤야민은 형이고 자신은 동생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똑같았다.
얼굴도, 목소리도,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도 전부 똑같았다.
쌍둥이라서 그런 것이라고 부모님은 늘 말씀하셨다.
쌍둥이라서 웃는 모습도 똑같다고.
하지만 부모님은 틀렸다.
똑같지 않았다.
그 불길 속에서 자신은 겁을 먹었고 형은 용기를 냈었다.
형은 자신을 지켜주었고 자신은 형을 지켜주지 못했다.
얼굴은 똑같았지만 할 수 있는 것은 달랐다.
사람들은 외모를 보고 형을 괴물 같다 말할지 모르겠지만 아름다운 것은 형이다.
자신은 추악하다.
진짜 괴물은, 자신이다.
콰당-!
거친 소리가 귀를 흔든 것은 바로 그때였다.
무서운 소리에 고개를 돌린 요한의 눈에 계단 아래에 쓰러진 레티샤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녀는 벌거벗은 채로 계단 아래에서 꿈틀거리고 있었다.
계단 위에서 굴러 떨어진 것이다.
“레티…!”
놀란 벤야민이 일어나려고 했지만 그 어깨를 누른 것은 요한이었다.
“여기 있어 형.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벤야민을 소파에 앉혀 놓은 요한이 쓰러진 레티샤에게로 다가갔다.
그녀는 머리에서 피를 흘리고 있었다.
문을 열고 방을 나왔다가 계단에서 그대로 굴러버린 것이 틀림없다.
“쯧.”
요한이 혀를 찼다.
찢어진 그녀의 이마에서 붉은 피가 계속 흐르는 중이었다.
이대로 죽게 내버려둘 마음은 없다.
쉽게 죽게 할 거였다면 일부러 여기까지 데려오지도 않았다.
도중에서 숲에서 늑대 밥이 되게 하든가 얼어 죽게 내버려뒀을 것이다.
“심각한 거 아니야. 이마가 조금 찢어진 거니까 괜찮아. 내가 치료할 테니까 형은 신경 쓰지 마.”
레티샤의 상처를 살펴본 요한이 벤야민을 안심시켰다.
이런 모습을 벤야민에게 보여줄 생각은 없었다.
“형은 아무것도 신경 쓰지 마.”
그 말을 하며 요한이 레티샤를 품에 안았다.
그의 팔 안에서 레티샤의 몸이 축 늘어졌다.
바닥으로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 * *
찢어진 이마의 상처에 약을 바른 요한이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켰다.
벽난로 안의 재도 전부 끄집어내고 장작을 다시 넣었다.
길들이기는 잠시 중단이다.
지금은 얼마나 다쳤는지 그걸 확인하는 것이 우선이었다.
겉으로 보이는 외상은 이마가 찢어진 정도지만 층계 위에서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팔과 다리에 멍도 상당했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머릿속이 어떻게 되었는지 모른다.
뇌진탕의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일단 깨어날 때까지는 아편은 중단이다.
음식에 섞는 약도 중단이다.
어떤 상태인지 확인한 다음 다시 아편을 피워도 상관없다.
어차피 레티샤는 이 성에서 달아나지 못한다.
마차가 없이는 저 숲을 빠져나갈 수가 없다.
숲에 늑대가 산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다.
그리고 늑대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눈이 쌓인 겨울, 걸어서 숲을, 그것도 낯선 숲을 빠져 나가는 방법은 없다.
도중에 길을 잃고 얼어 죽을 것이다.
상처에서 손을 떼던 요한의 시선이 반달 모양의 흉터에 멎었다.
[그 아이가 넘어져서 이마에 큰 상처를 입었을 때 네가 어떻게 했었는지도 기억하고 있어? 밤새도록 그 애 침대 옆에서 울었었잖아. 이마에 상처를 입혔다고. 이마에 상처를 입힌 것 때문에 그렇게 울었으면서, 지금 그 애를 상처 입히려고 그러는 거니?]
잊지 않았다.
기억은 항상 생생하다.
레티샤는 한나의 품에 안겨서 이 성으로 왔다.
겨우 두 살 정도 지난 레티샤를 품에 안고 그 여자 한나는 이 성으로 들어왔다.
남자에게 버림받고 아이를 키울 방법이 없어 아이와 함께 다리에서 뛰어내려 죽으려던 것을 부모님이 발견하고 성으로 데려왔던 것이다.
몸이 약했던 어머니는 한나에게 자신들 쌍둥이를 맡겼다.
유모 역할이었다.
아이를 키우고 있으니 자신들 형제도 잘 돌봐줄 것이라 여겼던 것이다.
그리고 한나는 무척이나 잘 해줬었다.
한나가 자신들에게 친절하게 잘 해줬기 때문에 한나의 어린 딸을 자신들도 예뻐했었다.
요람을 흔들어주고 걸음마를 도와줬었다.
이 이마의 흉터는 요한 자신 때문이다.
벤야민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 혼자서 걸음마를 도와주다가 아주 잠깐 손을 놓친 사이에 넘어져 이런 흉터가 남고 말았다.
모르는 것이 아니다.
알고 있다.
벤야민의 말이 전부 옳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이렇게라도 풀지 않으면 이 미움은, 이 증오는 갈 길을 잃어버린다.
누군가를 원망해야 한다.
누군가에게는 죄를 전가해야 한다.
죄를 짊어지고 황무지로 가는 아사셀 염소가 필요하다.
요한에게 있어서 그 제물은 레티샤다.
자신을 위해서 레티샤는 불행해져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이 불행해지니까.
천천히 걸어간 요한이 열려있는 창문을 손으로 붙잡았다.
흘러 들어오는 차가운 공기가 뺨을 얼렸다.
이 성은 춥고 쓸쓸한 곳이다.
자신의 영혼은 이곳에서 얼어붙었다.
하지만 아주 예전에는 이곳에도 봄이 존재했었다.
꽃이 피고, 푸른 잎사귀 사이로 햇살이 쏟아지던 봄이 이곳에서 머물던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 성은 그날 이후로 영영 봄을 잃어버렸다.
더는, 봄은 오지 않는다. 영원히.
* * *
[레티샤.]
깨질 것 같은 두통 속에서 레티샤가 신음했다.
‘아파… 괴로워….’
전신이 욱신거렸다.
구역질이 나고 가슴이 답답하고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
[레티샤. 선물이야.]
목소리가 머릿속을 울렸다.
‘누구….’
분명 아는 목소리인데 생각이 나지 않는다.
[요한과 내가 함께 고른 거야. 뒷면에 우리 이름을 새겨놓았어.]
[형이 아니라 내가 고른 거야. 형은 다른 걸로 하자고 했는데 내가 이걸 골랐어. 예쁘지?]
[이 다음에 예쁜 아가씨가 되면 이 안에 연인의 초상화를 넣어두는 거야. 작은 걸로.]
[누가 고백해오면 먼저 우리에게 허락을 받아야 해. 우리가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 안 돼.]
[왜냐고? 그야 당연히 레티샤는 우리 동생이니까.]
머릿속이 알지 못하는 말들로 뒤죽박죽이다.
똑같은 목소리가 뒤섞였다.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다.
[레티샤-!]
소리쳐 부르는 것은 누구?
이 타는 냄새는, 이 연기는 무엇일까.
[도망쳐야 해!]
왜 도망을 쳐야 한다는 걸까.
말이 울었다.
그리고 마차가 기울어지며 낭떠러지로 곤두박질 쳤다.
굴러 떨어지는 마차 안에서 이리저리 부딪치며 비명을 질렀다.
“아, 아아….”
레티샤가 허공으로 손을 내저었다.
“사, 살려주… 살려주세요… 살려… 제발 살려….”
그녀의 의식은 굴러 떨어지는 마차 안에 있었다.
“살려….”
굴러 떨어지던 마차가 바닥에 처박히는 순간,
“아아악!”
비명을 지르며 레티샤가 눈을 떴다.
“하아… 하아… 하아….”
거친 숨을 헐떡이며 레티샤가 허공에 뻗은 손을 바르르 떨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두려움에 질려 있었다.
“하아… 하… 아….”
비틀거리며 일어나 앉은 레티샤가 붕대가 감긴 자신의 이마를 손으로 더듬었다.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레티샤가 곁눈으로 방 안을 흘겨봤다.
‘여기는….’
이곳을 알고 있다.
아니, 이 성을 알고 있다.
예전에 이 성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
아주 오래 전, 아주 어렸을 때.
어렸을 때지만 마치 어제의 일처럼 선명하게 떠올랐다.
13년 동안이나 잊고 있었던 것들이 지금 전부 기억이 났다.
모든 기억이 생생했다.
조금 전에 마차와 함께 낭떠러지로 굴러 떨어지던 기억까지 생생하다.
이마의 흉터, 펜던트, 그리고 불.
불이 났었다.
아니, 불을 질렀다.
엄마가 불을 지르고 문을 밖에서 잠갔다.
문 안쪽에서 간절하게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는 쌍둥이들의 것이다.
[엄마! 오빠들이 불러!]
소리쳤지만 엄마는 들어주지 않았다.
엄마에게 안겨 성을 빠져나가 마차에 타고 산길로 접어들 때 마차가 비탈길로 굴러 떨어졌다.
그리고 정신을 잃었었다.
“벤야민… 요한….”
잊고 있었던 이름을 떠올리며 레티샤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손을 내렸다.
이제 전부 기억이 났다.
머릿속이 차가울 정도로 의식이 뚜렷했다.
그리고 이 성에 와서 자신이 당한 일들까지도 전부 기억해냈다.
요한이, 요한 힐데스하임이 자신에게 한 모든 짓들을 기억해냈다.
자신을 어떤 식으로 범하고 짓밟았는지, 자신에게 한 말들이 전부 기억났다.
그 능욕의 순간이 떠올라 레티샤가 몸을 바르르 떨었다.
“도망쳐야 해….”
자신을 향한 그 지독한 증오. 그 독기. 그 괴물 같은 모든 것이 레티샤를 두렵게 만들었다.
이 성에서 도망쳐야 한다.
이 성에 계속 남아있다면 그 남자는 반드시 자신을 망가뜨릴 것이다.
‘어떻게 도망치지?’
순순히 달아나게 해주지는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에 있다가는 정말 나락으로 떨어져 최악의 밑바닥의 삶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남자는 자신을 집시들에게 던져줄 거라고 말했었다.
‘죽일까?’
섬뜩한 생각이 레티샤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어쩌면 가장 좋은 방법은 그 남자를 죽이는 것일지도 모른다.
여기서 도망친다고 해서 완벽하게 도망칠 수 있다는 보장은 없다.
따라잡히던가, 아니면 길을 잃고 헤매다 죽을 수도 있다.
그러나 만약 자신이 그 남자를 죽인다면?
자신을 증오하고 망가뜨리려는 그 남자를 제 손으로 죽인다면 위협은 사라진다.
‘그래, 죽여 버리자.’
레티샤가 방을 둘러봤다.
이 방 안에는 그 남자를 죽일 만한 도구가 없다.
그때 레티샤의 눈에 촛대가 들어왔다.
끝이 뾰족한 촛대.
‘저것으로 찌르면….’
운이 좋으면 죽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남자고 자신은 여자다.
그의 체격이 훨씬 더 크다.
기습을 하지 않는 이상 그 남자를 촛대로 찔러 죽이는 것은 무척이나 힘들다.
‘그러면 어떤 방법이 좋을까….’
방법은 많다.
계단에서 떠미는 것, 그가 마시는 물에 독을 타는 것, 부엌에서 칼을 숨겨와 그가 방심할 때 칼로 찌르는 것.
그러나 독을 어디서 구할 것이며 계단에서 떠밀고 싶어도 등 뒤로 다가가는 사이에 들킬 것이다.
칼? 칼이 가장 좋은 방법일까?
‘그런데… 벤야민은?’
그때 문득 레티샤가 쌍둥이의 또 다른 한 쪽을 떠올렸다.
자신이 이 성에 와서 만난 사람은 요한이 유일하다.
아직 벤야민은 보지 못했다.
기억이 맞다면 벤야민이 형, 요한이 동생이다.
‘이 성에 벤야민도 있는 걸까?’
만약 요한과 벤야민, 두 사람을 상대해야 한다면 동시에 죽여야 할지도 모른다.
한 명만 죽이면 다른 한 명에게 보복당할 수 있다.
대체 어떻게 동시에 죽일 수 있을까.
비틀거리며 침대에서 일어난 레티샤가 벽에 붙어 있는 거울 쪽으로 걸어갔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걸음으로 걸어간 레티샤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들여다봤다.
눈 밑이 움푹 패이고 거뭇했다.
앙상하게 마른 얼굴이 낯설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르는 나이트가운을 입은 자신의 목덜미에는 붉은 자국이 얼룩덜룩했다.
입술 자국이었다.
물어뜯기고 빨린 자국.
그 흔적을 보는 순간 레티샤의 안에서 살기가 솟구쳤다.
살기 가득한 자신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레티샤가 몸을 떨었다.
지금 거울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은 괴물의 모습이었다.
요한 그 남자와 다를 바 없는 괴물.
어떻게 하면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그 남자를 죽일까 궁리하는 모습은 괴물이라는 말 외에 다른 것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하지만 괴물은 괴물만이 상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괴물이 되어서라도 요한이라는 그 괴물을 죽이고 기어이 살아남을 것이다.
살아서 이곳에서 도망칠 것이다.
필요하다면 다 죽이고, 13년 전 자신의 엄마가 그랬던 것처럼 불을 질러서라도.
‘불….’
레티샤가 벽난로를 돌아봤다.
장작이 타고 있었다.
‘불을 지르면….’
무서운 생각이 떠올랐다.
자신이 구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는 불이다.
불을 지르면, 한밤중에 불을 지르면 어쩌면 요한과 벤야민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타오르는 성에서 도망쳐나가 말을 타고 멀리 달아나면….
“욱!”
레티샤가 손으로 입을 막았다.
구역질이 올라왔다.
섬뜩한 생각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스스로가 혐오스러운 나머지 속에서 구역질이 치밀었다.
“우욱! 욱!”
바닥에 엎드려 아무리 끅끅 거려도 토해지는 것은 없다.
그저 자신의 추한 본능만이 쏟아져 나올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