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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폭설 (2/7)

1. 폭설

“어쩌나? 벌써 우리 집은 사람을 다 구했는데?”

후덕하게 생긴 음식점 주인이 고개를 저었다.

“저쪽 빵집에 가보렴. 거기서도 사람을 구한다고 들었거든.”

“감사합니다.”

음식점 주인에게 인사를 한 여자가 돌아서서 거리로 나섰다.

하지만 음식점 주인이 가르쳐준 빵집으로는 가지 않을 생각이었다.

왜냐하면 그 빵집에는 조금 전에 벌써 가봤었기 때문이다.

빵집 역시 일할 사람을 구했다고 했다.

“하아….”

여자가 새빨갛게 변한 손에 입김을 불었다.

사방이 눈으로 얼어붙은 한 겨울이지만 여자가 입고 있는 옷은 얇았고, 무엇보다 그녀는 장갑도 끼지 않았다.

뺨과 손이 얼어붙었고 외투를 입지 않은 얇고 낡은 옷 사이로 차가운 바람이 들어와 살을 얼어붙게 만들었다.

“헉!”

여자가 고개를 푹 숙였다.

고개를 숙인 그녀의 앞으로 칼을 찬 경관들이 지나갔다.

그녀의 얼굴을 알 턱이 없는데도 지레 겁을 먹은 여자가 경관들이 지나갈 때까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이 여자의 이름은 레티샤, 올 해 열아홉 살이 되었다.

그리고 며칠 전에 사람을 죽였다.

이번이 첫 번째로 사람을 죽인 건 아니다.

이미 여러 명을 죽여 봤다.

레티샤는 빈민굴 출신이다.

그녀의 이마에는 반달 모양의 흉터가 있는데 이 흉터가 언제 생겼는지 그녀 자신도 모른다.

레티샤는 여섯 살 이전의 기억이 없다.

엄마는 사고가 있었다고 했다.

그 사고의 기억도, 사고 이전의 기억도 레티샤에게는 없다.

아마 사고로 기억을 잃어버린 것이 틀림없다.

레티샤의 기억은 빈민굴이다.

엄마는 빈민굴에서 몸을 팔았고 그런 엄마를 보며 자랐다.

늘 보는 사람들은 아편 중독자와 술주정뱅이들, 그리고 엄마의 손님들이었다.

레티샤가 처음 사람을 죽인 것은 열일곱 살 때였다.

엄마의 손님이었던 주정뱅이가 그녀를 겁탈하려고 했고, 손에 잡히는 것으로 마구 내리치던 중에 집어든 벽돌로 머리를 쳤고, 피를 흘리며 그 남자는 죽었다.

죽은 남자를 두고 그 길로 레티샤는 도망쳤다.

그 후로는 엄마를 다시 만나지도 못했다.

하지만 도망쳤다고 해서 갈 곳은 없었다.

다른 도시로 옮겨와 술집에서 일을 하며 하루하루를 겨우 살았다.

누더기를 입고 최하층의 삶을 살았지만 엄마처럼 몸은 팔지 않았다.

그건 정말 바닥 중의 바닥이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두 번째로 사람을 죽인 것은 일하던 술집의 주인이었다.

그는 레티샤를 매춘부로 팔아넘기려고 했다.

그녀 몰래 돈을 받고 매음굴에 팔아넘기려고 하는 것을 칼로 찌르고 돈을 훔쳐 달아났다.

그리고 또 다른 도시로 도망쳤다.

도망친 다른 도시는 이곳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다.

돈이 궁했고 먹을 것이 없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나쁜 짓을 결심했다.

매춘부인 것처럼 꾸며 남자를 유혹했고 남자와 함께 여관방으로 들어가서 남자가 씻는 동안에 지갑을 훔쳐 달아나려고 했었다.

그러나 남자가 생각보다 빨리 나왔고 지갑을 훔치다 들킨 그녀는 남자와 몸싸움을 하다 그를 떠밀었다.

벽에 머리를 부딪친 남자는 그 자리에서 죽었다.

그리고 레티샤는 이 도시로 도망쳐왔다.

죽은 남자의 지갑에서 훔친 돈은 어제 여관방을 구하며 다 써버렸다.

이제 수중에 돈은 한 푼도 없다.

오늘 당장 먹여주고 재워줄 일자리를 찾지 못하면 이 차가운 날씨에 얼어 죽고 말 것이다.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면 최후의 방법은 몸을 파는 것밖에 없다.

그건 죽기보다 싫지만 얼어 죽지 않으려면 결국에는 그것 외에는 남은 것이 없다.

“…….”

레티샤가 목에 걸린 펜던트를 쥐었다.

누가 선물한 것인지 기억은 나지 않지만 이게 소중한 것이라는 것은 알고 있다.

기억을 잃기 전에 누군가 선물해준 것이겠지만 그게 누구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엄마가 몇 번이나 빼앗으려고 했지만 뺏기지 않았다.

아무리 돈이 없어도 이것만은 팔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이것을 팔아야 할지도 모른다.

은으로 만든 펜던트이니 값을 제법 괜찮게 받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정말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남겨둘 생각이다.

‘어떻게 해야 하지….’

레티샤가 얼어붙은 발을 동동 굴렀다.

이미 이 도시의 거리는 전부 뒤졌다.

하지만 문을 두드리는 가게마다 사람을 구했다고 했다.

‘저쪽으로 가볼까?’

레티샤가 거리를 가로지르려 할 때였다.

“꺄악-!”

갑자기 앞으로 지나가는 마차로 인해 레티샤가 바닥에 쓰러졌다.

옆을 보지 않고 걸어간 탓이었다.

앞을 지나간 마차에 놀라 뒷걸음질 하며 바닥에 쓰러진 레티샤가 엉거주춤 일어나 앉았다.

‘아파….’

얼어붙은 몸이 바닥에 부딪치며 전신이 욱신거렸다.

코끝이 시큰거렸다.

눈물이 핑 돌 것만 같은 것을 애써 참으며 일어나려고 할 때였다.

“다친 곳은 없습니까?”

검은 장갑을 낀 손이 그녀의 눈앞에 내밀어졌다.

“네?”

당황한 레티샤가 그 손의 주인을 쳐다봤다.

단정한 프록코트의 겉에 캐릭을 걸치고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머리에는 우아한 모자를 쓴 남자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일어나실 수 있겠습니까?”

“네? 네….”

그 내민 손을 잡고 레티샤가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녀의 낡은 옷은 흙투성이가 되어 있었다.

“죄송합니다. 제가 갑자기 마차 앞을 가로막아서….”

너무 춥고 빨리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생각에 미처 좌우를 보지 못한 자신의 잘못이었다.

마차 앞으로 뛰어든 자신이 문제였지만, 레티샤가 자신을 향해 손을 내미는 남자의 옷차림을 재빨리 눈으로 훑었다.

‘부자….’

사과를 하려던 레티샤가 얼른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 기회를 놓치면 바보다.

“더, 덕분에 옷이 찢어졌어요. 더러워졌고. 수선비와 세탁비를 받아야겠어요.”

옷은 원래 더러웠고 원래 찢어져 있었다.

지금 자신이 하는 짓이 얼마나 나쁜 짓인지 알고 있지만 지금은 그런 것을 가릴 때가 아니다.

돈을 뜯어낼 수 있으면 뜯어내야 한다.

게다가 이 남자는 부자다.

부자에게는 돈이 넘치니 몇 푼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제 마부가 앞을 제대로 보지 못한 탓입니다. 죄송합니다. 사과의 뜻으로 얼마를 드리면….”

지갑을 꺼내던 남자의 시선이 레티샤의 목에 건 펜던트에 멎었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묘한 빛으로 빛났다.

지갑에서 은화를 꺼낸 남자가 그것을 레티샤에게 내밀었다.

“이 정도면 되겠습니까?”

남자가 내미는 은화를 레티샤가 얼른 받아들었다.

이 은화라면 당장 며칠 동안은 숙식을 해결할 수 있다.

“그러면 조심해서 가십시오, 레이디.”

은화를 받아들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걸어가는 레티샤를 남자가 뒤에서 지그시 바라봤다.

‘일단 이 은화로 당분간은 해결이 되었으니까… 그 사이에 일자리를 구하면….’

레티샤가 은화를 주머니에 넣고 여관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서둘렀다.

그녀는 지금 너무 추웠다.

따뜻한 여관방 안에서 이 얼어붙은 몸을 녹이고 싶었다.

“헉!”

그러나 여관이 미처 이르지 못해서 레티샤가 발을 멈췄다.

경관들이 여관 앞에 서 있었다.

그리고 그 경관들 중 한 명이 그녀를 쳐다봤다.

경관은 손에 든 종이와 그녀의 얼굴을 번갈아 쳐다봤다.

순간 레티샤가 직감했다.

저 종이에는 자신의 몽타주가 그려져 있을 것이다.

저 경관들이 찾고 있는 것은 자신이다.

‘도망쳐야 해…!’

레티샤가 뒷걸음질 쳤다.

그런 그녀를 향해 경관들이 걸어왔다.

“아악!”

비명을 지르며 레티샤가 뒤돌아서서 달리기 시작했다.

잡히면 감옥행이다.

평생 감옥에서 나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레티샤가 숨이 턱에 닿도록 도망쳤다.

“거기 서!”

뒤에서는 호루라기를 불며 경관들이 뒤쫓아 왔다.

‘안 돼! 잡히면 안 돼!’

허겁지겁 달아나던 레티샤의 앞에 마차 한 대가 멈춘 것은 그때였다.

“타요!”

마차의 문이 열리며 조금 전에 만났던 그 남자가 그녀를 향해 손을 내밀었다.

다른 것은 생각할 겨를도 없었다.

남자의 손을 잡은 레티샤가 마차 안으로 뛰어들었다.

그녀가 뛰어들자 마차의 문이 닫히고 여섯 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가 그곳을 빠져나갔다.

* * *

“하아… 하아….”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레티샤가 숨을 헐떡였다.

‘더는 안 쫓아올까?’

지난번 도시에서 사람을 죽인 것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잡히면 그 죄 뿐만 아니라 다른 죄들도 드러날 것이 틀림없고, 그렇게 되면 평생 감옥에서 나오지 못한다.

어쩌면 교수형을 당할 수도 있다.

그렇게 죽고 싶지는 않다.

거친 숨을 고르고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힌 레티샤가 자신을 구해준 남자를 쳐다봤다.

남자는 미소 가득한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를 왜 구해준 거지?’

경관들을 피해 달아나고 있었다는 건 이 남자도 알 것이다.

경관들에게서 도망치고 있다는 건 죄를 지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남자는 왜 자신을 도와준 것일까.

“저어….”

일단 뭐라도 변명을 해야겠다 싶어 레티샤가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갈 곳은 있습니까?”

“네?”

뜻밖의 말이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특별히 갈 곳이 없다면 저와 함께 가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아니요, 그냥 도중에 내려주시면….”

이상한 남자다.

이유 없는 호의를 믿을 정도로 레티샤는 순진하지 않다.

이미 세상이 얼마나 험악하고 사나운지 겪어온 그녀다.

다정한 미소를 하고 친절을 베푸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그녀의 몸을 욕심냈었다.

이 남자라고 다를 리 없다.

저렇게 다정한 눈으로 하고 속에 무슨 생각을 품고 있을지 누가 알까.

이유 없이 도망치는 여자를 구해줬겠는가.

바보라서? 그럴 리가 없다.

레티샤가 조금만 더 순진했더라면 자신에게 한 눈에 반해서, 라는 말도 안 되는 이유에 가슴이 두근거렸겠지만 그런 것을 레티샤는 믿지 않는다.

세상에 대가 없는 것은 없다.

“여기서 내릴게요. 마차를 세워주세요.”

아직까지 경관들이 쫓아오지는 않을 것이다.

여기라면 도망칠 수 있다.

“여기서, 말입니까?”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남자가 마차의 벽을 툭툭 쳤다.

그러자 잠시 후 마차가 멈췄다.

“여기에 세워드리면 됩니까?”

남자가 마차 문을 열어주자 레티샤가 얼른 마차에서 내렸다.

그리고 잠시 충격에 빠졌다.

‘여기가, 어디지?’

마차는 깊은 숲에 들어와 있었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는 곳이었다.

길도 보이지 않고, 이 숲의 어디를 어디까지 걸어야 할지도 모르고, 지금은 눈이 내리고 있다.

눈 내리는 겨울의 숲속을, 그것도 촛불 하나 없이 걸어갈 만큼 레티샤는 담력이 크지 않다.

“정말 괜찮겠습니까?”

마차 안에 앉은 남자가 그녀를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레티샤가 옷자락을 꽉 쥐었다.

그녀가 망설였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낯선 남자의 마차를 계속 타고 갈 수도 없고 그렇다고 눈이 내리는 지금 이 숲에서 헤맬 수도 없다.

“폭설이 내릴 것 같습니다.”

남자의 말에 레티샤가 하늘을 올려다봤다.

눈송이가 점점 커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자정이 되기 전에 발목까지 눈이 쌓일 것이 틀림없다.

그리고 내일 아침이면 무릎, 혹은 허리까지 눈이 쌓일 수도 있다.

숲에서 얼어 죽을 것이다.

“…….”

레티샤가 마차 안에 앉은 남자를 쳐다봤다.

“타세요, 레이디.”

마차의 문을 열어둔 채로 남자가 그녀에게 손짓했다.

망설이는 그녀를 향해 남자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이 숲에는 늑대도 출몰한답니다.”

그 말에 레티샤가 갈등을 끝내고 마차에 올라탔다.

그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걸 증명하는 것처럼 멀리서 늑대의 울음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 * *

레티샤를 태운 마차는 한참을 달려 숲 한 가운데 자리를 잡은 성에 도착했다.

돌을 쌓아올려 만든 성은 담쟁이에 휘감겨 있었고 성 주위는 전나무들로 빽빽하게 둘러싸여 있었다.

“힐데스하임 성에 온 것을 환영합니다, 레이디.”

마차에서 내리는 레티샤의 손을 잡아주며 남자가 화려한 미소를 머금었다.

숲속의 오래된 성 힐데스하임.

‘여기, 전에 와 본 적이 있나?’

마차에서 내리며 레티샤가 의문을 느꼈다.

이 성은 처음이다.

이 도시 자체가 처음이고 이런 숲도, 성도 처음이다.

그런데 꼭 이 성에 전에 와본 적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럴 리가 없는데 말이다.

“왜 그러십니까, 레이디?”

그녀가 멍하니 성을 쳐다보는 모습에 남자가 그녀를 쳐다보며 웃는다.

“혹시 이곳에 와본 적이라도 있는 겁니까?”

“그럴 리가요. 이 도시도 처음인걸요.”

레티샤가 얼른 대답했다.

“그래요? 이곳은 힐데스하임 성입니다. 그리고 저는 이 성의 주인인 힐데스하임 남작입니다. 요한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요한 힐데스하임.

요한.

‘요한….’

남자의 이름을 레티샤가 속으로 중얼거렸다.

‘흔한 이름이야.’

그래. 요한이라는 이름은 흔하다.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느낌은 그래서일 것이다.

너무 흔한 이름이라서 그런 것이다.

다시 한 번 높고 창백한 성을 올려다보며 레티샤가 현기증을 느꼈다.

차가운 돌로 쌓아올린 성은 지독하게 높고 그리고 아름다웠다. 아찔할 정도로.

* * *

“이례적인 폭설이 될 것 같습니다.”

문을 열고 요한이 들어서자 벽난로 앞에 앉아 있던 레티샤가 벌떡 일어섰다.

얼어붙었던 몸을 벽난로의 불을 쬐며 녹이던 그녀에게 요한이 손에 들고 있던 것을 건넸다.

드레스였다.

“돌아가신 어머니의 것인데 맞으면 좋겠습니다. 그 옷은 너무 더러우니까요.”

요한이 건네준 옷을 손에 들고 레티샤가 입을 열었다.

“눈이 그치면 떠나겠습니다. 눈이 그칠 때까지만 머물게 해주세요.”

“쉽게 그칠 눈이 아닌데….”

요한의 눈동자에는 묘한 미소가 깃들어 있었다.

그 미소의 정체를 알 수 없어서 레티샤가 더 불안했다.

‘여차하면….’

하지만 그녀는 자신을 보호하는 방법을 안다.

이미 세 사람이나 죽였다.

거기에 한 사람 더 죽인다고 달라질 것은 없다.

이미 죽은 후에 지옥에 갈 것은 정해졌다.

자신은 살인자가 가는 지옥으로 떨어질 것이 분명하다.

“왜 쫓기고 있었는지 물어봐도 되겠습니까?”

“그건… 말하고 싶지 않네요.”

“이름이 어떻게 되시죠?”

“레티샤….”

“레티샤. 성은….”

“성은 없어요.”

“그렇군요. 그렇다면 레티샤 양. 눈이 멎을 때까지는 이 성에 머물도록 하세요. 그리고 눈이 그치면 숲 밖까지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이런 폭설에는 마차도 움직일 수가 없으니까요. 그때까지는 이 방을 사용하세요.”

“도와주셔서….”

레티샤가 머뭇거리며 감사의 말을 꺼냈다.

“고맙습니다….”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면 도와주는 것이 당연하다고 부모님은 항상 말씀하셨죠.”

요한이 문 밖으로 걸어 나갔다.

그리고 문을 닫기 직전 그녀에게 말했다.

“식당은 아래층에 있습니다. 뭐든지 마음대로 꺼내 먹어도 괜찮습니다. 그러면 부디, 편안한 밤이 되기를.”

그 말을 한 후 요한이 문을 닫았다.

“하아….”

방에 혼자 남겨진 레티샤가 창가로 걸어갔다.

요한의 말처럼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아래쪽은 벌써 눈이 잔뜩 쌓였다.

이런 폭설이라면 눈이 그쳐도 당장은 움직이지 못한다.

어쩔 수 없이 이 성에 며칠은 있어야 한다.

‘어쩌면 더 나은 걸지도… 그 사이에 경관들도 나에 대해 관심을 꺼주면 좋겠는데….’

레티샤가 방을 둘러봤다.

방은 그녀의 기준으로는 상당히 좋은 방이었다.

침대도 훌륭하고 가구들도 고풍스러웠다.

“은이다….”

촛대는 은으로 만들었고 벽난로 옆의 테이블 위에 놓인 접시도 은장식이 되어 있다.

그리고 접시 위에 놓인 스푼과 포크 역시 은제 식기였다.

‘나중에 이걸 가져가면 돈이 되지 않을까.’

아무렇지 않게 남의 물건을 훔칠 마음이 드는 자신이 역겨워서 레티샤가 고개를 저었다.

대체 자신은 언제부터 이렇게 된 것일까.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훔치고.

선의를 선의로 받지 못하고, 의심부터 하고. 자신은 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엄마와 함께 살던 도시에서 도망치기 전에는 어려운 형편이지만 공부도 했었다.

엄마처럼 되기 싫어서, 그 빈민굴을 벗어나 조금은 더 괜찮은 삶을 살려면 공부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근처 수도원을 찾아가 고아들에게 가르쳐주는 수업을 듣고는 했었다.

매음굴에서 심부름하며 받는 돈을 꼬박꼬박 모으며 언젠가는 큰 도시에 가서 제대로 된 공부를 하고 제대로 된 직업을 가지는 꿈도 꿨었다.

그러나 지금 자신의 꼴을 보라.

끔찍한 괴물이 되어 있다.

사람을 죽이고 타인을 의심하고 그리고 남의 것을 아무렇지 않게 훔치는 그런 괴물이 되어버렸다.

“눈….”

레티샤가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을 쳐다봤다.

사람의 삶에도 눈이 내릴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진흙탕처럼 더러워진 자신의 삶 위에도 폭설이 내려 모든 것을 하얗게 덮어버렸으면 좋겠다.

비록 그 흰 눈 아래에 있는 것이 더러운 진창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그것을 눈으로 덮어버리고, 전혀 더러워지지 않은 것처럼 그렇게 깨끗한 모습으로 다시 시작하고 싶다.

하지만 그런 기회는 주어지지 않을 것이다.

* * *

촛대를 손에 들고 층계를 올라간 요한이 가장 높은 층의 끝 방의 문을 열었다.

방은 어두웠다.

그 어두운 방으로 불을 밝힌 촛대를 들고 들어간 요한이 책상 앞에 앉아 있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책상에는 작은 촛불만 하나 놓여 있었다.

“손님이 왔어, 벤야민.”

요한의 말에도 남자는 뒤돌아보지 않고 책을 읽었다.

“귀한 손님이야.”

무슨 말을 해도 반응이 없는 그를 향해 요한이 싸늘한 미소를 지었다.

“레티샤가 왔어.”

순간 앉아있던 남자의 어깨가 움찔거렸다.

“레티샤야. 그 어리던 레티샤. 그 애를 찾아냈어. 고맙게도 제 발로 여기까지 와주었지 뭐야. 그런데 재미있는 건 기억을 못해. 이 성을, 그리고 나를.”

“레티샤가 아닐 수도 있어.”

책상에 앉은 남자가 대답했다.

그 목소리는 마치 쇠로 바닥을 긁는 것처럼 낮고 거칠었다.

“레티샤가 맞아. 나는 내가 선물로 준 펜던트도 알아보지 못하는 바보가 아니거든.”

“어쩌려고 그래?”

“어쩌긴. 빚을 갚게 해야지.”

“레티샤가 한 짓이 아니야.”

“어미의 죄는 딸에게로 내려가는 법이지.”

요한이 낮게 웃었다.

어두운 방안으로 요한의 웃음소리가 퍼졌다.

“살아도 사는 것이 아니게 만들어 줄 거야. 평생 지옥 속에서 살아가게 할 거야. 괴로움에 몸부림치면서.”

“요한.”

“너는 상관하지 마, 벤야민. 이건 내 복수니까.”

차갑게 말한 요한이 밖으로 나가 문을 닫았다.

그리고 멀어지는 발소리를 들으며 벤야민이라는 이름의 남자가 잠시 창문을 지그시 응시했다.

어둠이 무색하도록 흰 눈이 소리 없이 쏟아지고 있었다.

세상 모든 것을 뒤덮어버릴, 그리고 이 성을 고립시킬 그런 폭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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