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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2. Offside (17/17)

에필로그 2. Offside

어릴 때는 부당하다는 생각을 종종 했다.

“희본아, 있잖아. 너희 아빠는…….”

엄마는 동굴을 연상시키는 어두운 눈으로 밤하늘을 내다보며 종종 그런 푸념을 했었다.

“아주 후레자식이야.”

고풍이 살아 있는 한 폭의 그림처럼 단아하고 우아한 인상과 어울리지 않은 말투였다.

“내가 뻔히 화실에서 작업하고 있다는 걸 알면서 다른 여자를 데리고 와 침실에서 뒹굴지를 않나…….”

“…….”

“그런 걸 들켜도 한 점 주눅 듦이 없어. 오히려 날 이해하지 못하는 눈치였지. 결혼도 안 했으면서 왜 멋대로 구속을 하려 드냐면서. 그런 개소리할 시간 있으면 혀나 깨물고 죽어 버리지.”

잔웃음 사이로 짙은 술 내음이 배겼다.

엄마는 술에 약했다. 고작 와인 두 잔에 정신이 얼기설기 풀어진 거였다. 그렇기에 나올 수 있는 말이었다. 엄마는 만취 상태가 아니고서야 희본과 희우 앞에서 아빠의 아, 자도 꺼내지 않았다.

하지만 그래서일까, 술이 들어가면 더 얘기가 술술 끌려 나오는 경향이 있었다.

희본은 이 시간을 통하여 엄마와 아빠가 어떻게 만남을 가졌고, 어떻게 쫑이 났는지까지를 대략적으로 알고 있었다.

오늘의 이야기 역시 그런 흐름새를 탔다.

모 그룹의 창립기념식에서의 첫 만남, 당시 의대를 진학하라는 부모의 뜻에 거스른 대가로 푸른 멍을 뺨에 달고 나타난 엄마에게 다가온 아빠, 자연스럽게 튼 안면과 물 흐르듯이 이어진 화제, 서로 따분하게 여기던 자리 중 유일하게 재미있다고 느낀 상대, 그만큼이나 당연스레 기약된 다음 만남, 이후로 엄마의 화실에서 자주 시간을 가진 두 사람.

그 과정에서 자신이 생기고, 결혼을 하고 싶다는 이유로 집안에 이를 알렸을 때 외가는 뒤집어졌다. 엄마는 누군가 알기 전에 조용히 아기를 지우라는 외가의 설득을 무시하고 백주경을 찾아갔다. 그리고 백주경과 함께 지내며 자신을, 그리고 뒤이어 희우까지 무사히 출산했다.

그 이후는…….

아주 오랜 구설을 읊듯 길고 길게 과거지사를 되짚은 엄마는 끝에 가서 꼭 이런 마침표를 찍었다.

“쉿. 이건 엄마랑 희본이 둘만의 비밀 얘기야.”

“희우는요?”

“희우는 아직 아기잖아.”

그 말대로 엄마가 조곤조곤한 음성으로 아빠를 신랄하게 까는 동안 희우는 그녀의 품에 안겨 새근새근 잘도 잠이 들어 있었다.

통통한 볼살이 눌려 입술이 붕어처럼 삐죽 튀어나온 그 모습이 유독 천진하게 다가왔다. 의식이 희미해진 희우의 귀에 후레자식을 운운하는 엄마의 음성은 동화책을 읽는 것처럼 다디달게만 들렸을 터다.

엄마는 분명히 좋은 사람이었다.

좋은 엄마였고, 좋은 가족이었다. 엄마의 이런 증상은 술이 들어갈 때만 일어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녀는 술을 자주 마시지도 않았다. 겨우 서너 달에 한 번 정도 있는 일이었다.

가장이라는 버팀목 없이 홀로 총알받이 역할을 해 오며 지금껏 저와 희우를 지키는 데에 애쓴 엄마를 위해서라면 이 정도 쓴소리는 잠자코 들어 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린 마음에 약간은 배알이 꼴릴 수밖에 없었다.

둘 다 자식인데 왜 나만.

어리니까, 아기니까, 동생이니까.

희우는 그런 단순하고 본원적인 이유로 엄마의 푸념에서 벗어나는 게 가능했다.

지금에 와서는 티끌만큼도 신경 쓰지 않았을 테지만 그때는 그냥 그런 게 불만이었다.

아주 사소한, 지우다 만 얼룩처럼 남는 소소하고 연한 불만.

“오빠아.”

차츰 머리가 클수록 그 불만은 옅어져 갔다. 반대로 엄마가 왜 가끔의 밤에 고단함을 삼키지 못해 술을 홀짝였는지, 품속의 희우에게는 왜 모든 걸 차단시키려 했는지 깨달아 갔다.

희우는 어리니까.

그리고 동생이니까.

“넘어졌어?”

“우응…….”

정원에 심긴 커다란 떡갈나무 아래, 원피스 자락을 그러쥔 다섯 살의 희우가 울상을 짓고 있었다.

앙증맞은 무릎이 자잘한 흙모래와 피부가 까진 상처로 얼룩덜룩했다. 상체를 숙이고 탁탁 털어 주다가 고개를 드니 쌍까풀이 예쁘게 진 두 눈이 글썽글썽했다.

그걸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단순히 넘어진 게 아니라는 걸.

“외삼촌이 이랬어?”

“나한테, 어, 가까이 오지 말라고 밀었어.”

“그러니까 외삼촌한테 가지 말랬잖아.”

“그치만…….”

모래를 다 털어 준 희본은 덤덤히 자세를 바로 하고는 희우의 손목을 잡아 끌어당겼다.

“외삼촌은 우리 싫어해.”

“왜애?”

이렇게 말하면 희우는 늘 저렇게 되물었다.

왜애? 하고.

그거야 멀리 갈 것도 없이 표정만 봐도 알 수 있는 사실이었다. 저와 희우, 남매를 보는 외삼촌의 눈동자는 득시글거리는 구더기를 보는 것과 다를 바 없을 만큼 경멸 그 자체였다.

‘어디서 정여래가 저런 거지 깽깽이 같은 것들을 데려왔어!’

제 조카들을 향해 그런 막말도 서슴지 않았다.

이럴 때마다 희우가 아기라는 게 더 실감이 났다.

타인의 눈에 얽힌 감정을 아직 읽지 못하는, 티 없이 맑은 천진무구함이.

“몰라.”

“왜 몰라?”

“조용히 하고 얼른 와. 여기 있다가 외삼촌 만나면 또 시끄러워질 거야.”

“으응…….”

금세 기가 죽어 울상을 해 보이던 희우는 별채로 들어가 무릎에 꼼꼼히 약을 발라 주자 언제 울상이었냐는 듯 방긋방긋 잘도 웃었다. 그럴 때마다 희본은 저조차도 긴장이 쭉 풀린 것처럼 작게 웃고는 했다.

그런 순간들이 차츰 포개어지고 쌓여서 희우를 향해 품던 불만은 깔끔히 지워져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를 대체하듯이 책임감이 피어올랐다.

희우는 동생이니까 희본이가 챙겨 줘야 해. 희본이가 돌봐야 해. 엄마는 어디론가 훌쩍 떠날 것처럼 그런 말을 주기적으로 했다.

이런 환경에서도 용케 사랑둥이로 자라난 희우를 보며, 희본의 의식에는 그 말이 지극히 당연스러운 것으로 각인되었다.

희우는 동생이니까 지켜야 해, 같은.

그렇기 때문에 엄마의 집안은 아주 좆같았다.

비교적 어린 시절, 충분히 천진하고 순수하게 지내며 사랑받을 수 있었던 희우를 공신력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사주를 이유로 짓밟고 뭉개는 데에 서슴지를 않았으니.

그 해맑던 아이의 얼굴에 차츰차츰 그늘이 끼는 걸 볼 때마다 호정 그룹을 향한 희본의 적대심은 생생히 살아났다.

‘오빠, 있잖아. 내가 엄마를 죽인 걸까?’

그리고 마침내, 저를 지켜 주던 울타리가 하나 무너져 버린 엄마의 장례식에서 희우는 사랑을 받고 자란 사람이라고는 생각도 할 수 없는 얼굴로 읊조려 물었다.

자조 섞인 혼잣말이 겨울 밤공기처럼 쓸쓸하고 처량했다. 희본은 그때 생전 처음으로 동생에게 화가 났다. 아직 저 역시 제대로 감정을 추스르지도 못했으면서, 다 안다는 것처럼 성대에 힘을 주어 말했다.

“엄마는 나 낳고 나서도 몸이 좋지 않으셨어. 따지고 보면 나를 낳기 전에도 건강이 약한 편이라고 했고.”

“…….”

“널 낳기로 한 건 순전히 엄마 선택이었다는 거야.”

“…….”

“그러니까 고개 들어.”

“…….”

“너 잘못한 거 없어.”

그러자 멍하니 앞만 바라보던 희우의 눈동자로 점점 울렁이는 물기가 고여 올랐다. 잔뜩 울먹이는 얼굴로 희우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하고 작게 흘러나온 대답이 어릴 적의 목소리를 잠깐이나마 상기하게 만들었다.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입히고 싶지 않은 동생이기에 백주경의 협박을 도무지 간과할 수가 없었다.

‘희본아. 너에게 제안을 하나 하고 싶구나.’

‘일강에 장부가 있는 걸로 안다. 정계, 재계 할 것 없이 거미줄처럼 엮여 있는 장부, 그걸 내게로 가지고 오면 지금 이 자리, 네게 물려주마.’

‘네가 내 아들이라는 사실을 일강에 알려도 좋고, 아니면 나도 이제부터 내 딸 얼굴 좀 제대로 보고 살아도 좋고…….’

토할 것 같았다.

살면서 그렇게나 구역질이 치민 적은 처음이었다.

반평생 받고 자라 온 엄마의 사랑을 기억하고 있다. 아빠가 없음에도 그 부재를 느낄 겨를이 없게끔 엄마는 자신과 희우를 사랑하고 아껴 주고 보살펴 주었다. 그래서 더 부닥친 현실이 끔찍했다.

“어렵겠는데.”

또각또각.

넓은 백화점의 대리석 바닥을 울리는 구두 소리를 들으며 희본은 뒷짐을 졌다.

“나는 뭐, 사실 크게 생각이 없는데 그이가 워낙 완강해서 말이지.”

몇 날 며칠을 고민하다가 끝내 외가에 연락을 취해 보았다.

외삼촌은 당연히 연락을 받기를 거절했고, 그나마 외삼촌과 재작년에 결혼을 한 외숙모가 그를 반겨 주었다.

실상 반겼다는 표현도 좀 그랬다.

제 퍼스널 쇼핑 시간에 여유가 있으니, 꼭 만나야만 하는 일이 있다면 이 시간에 맞춰 알아서 직접 찾아오라는 식이었다.

그래도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동아줄임을 부정할 수 없었기에 희본은 그녀를 쫓아 백화점에 온 참이었다.

“남편은 아직도 그 애 얘기만 나오면 치를 떨어. 진행하던 사업 하나만 잘못될 조짐이 보이면 이게 다 그 애가 태어난 탓이라고 뒤집어지는 정도지. 알아, 내가 봐도 병적인 거. 근데 그거 알아도 못 고쳐. 그렇게 생각하는 게 마음이 편한 거거든. 나름대로 그이의 살아가는 방식인 거야.”

고작 사주라는 비과학적인 근거로 희우를 헐뜯고, 힐난하고, 트집을 잡는 게 누군가의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도움을 바라고 왔으나 말 같지도 않은 소리만 듣고 있으니, 가슴속이 스산하게 가라앉았다.

“그러게, 처음부터 이 집안 말을 따랐어야지.”

“…….”

“그 애만 내쳤으면 이렇게까지 어렵진 않았을 텐데. 네 엄마도 더 살았을지 모를 일이고.”

희본은 피가 날 정도로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때마침 쇼핑을 끝냈는지 외숙모가 다가와 희본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지금으로서는 나도 방법이 없구나.”

“…….”

“걔 죽으면 연락하렴. 너만은 받아 줄 수 있어.”

희우를 살리기 위하여 자존심과 객기를 모두 접으며 취한 연락이었다. 도움을 구하는 그 청에 대하여, 개만도 못한 말이 돌아왔다.

희본은 인사로 가장한 예의조차 생략하고 백화점을 빠져나왔다.

그날 저녁, 희본은 자신이 차려 준 식사를 마친 뒤 설거지를 하고 있는 희우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련히 뒷정리를 자처했으면 들어가서 쉬어도 될 일이지만 희본은 늘 이 시간에 자리를 지켰다. 희우는 뒷정리에 소질이 없었다. 저렇게 설거지에 열의를 보이며 두 팔 걷어붙이고 나서도 후에 싱크대로 가 보면 뿌연 비눗물이 곳곳에 튀어 있었다.

희본은 언제나 그 흔적을 조용히 닦아 내고는 했다. 그러고서야 비로소 정리가 끝나는 거였다.

“희우야.”

“응?”

달그락달그락. 접시 부딪히는 소리를 내며 희우가 답했다.

“너 내가 어디 가자고 하면 어떡할래?”

“어딜 가?”

달각.

빨간 고무장갑을 낀 손이 막 흐르는 물에 헹궈 낸 접시를 그릇 정리대에 올려놓는다.

“어디든.”

뜻 모를 질문에 희우가 설거지를 하다 말고 오빠를 돌아보았다. 곧 싱거운 말을 다 들어 보겠다는 것처럼 웃으며 답했다.

“나는 당연히 오빠랑 같이 가야지.”

희본이 침묵하자 희우는 그 태도에서 미묘함을 느낀 듯이 쏴아아, 물줄기가 쏟아지는 수전을 잠갔다.

“왜?”

“…….”

“우리 어디…… 가야 해?”

끔찍한 기억으로만 점철되었던 외가, 잠깐이나마 행복했던 강원도 별장, 이내 엄마를 잃은 후부터 무엇 하나 제대로 갖출 여력 없이 쫓기고 쫓긴 끝에 다다른 이곳 단칸방.

부와 현실의 대립으로 끝도 없이 이동해 온 지난날의 행적이 바로 지금 희우가 내보이는 표정 속에 담겨 있었다.

백화점에서 집으로 돌아오며 희본은 무수한 생각의 타래를 늘어뜨려 보았다.

하나의 선택과 그로부터 야기되는 수십, 수백 가지의 가정들이 그의 머릿속을 시퍼런 과부하로 지끈거리게 만들었다.

분명한 건 제 선택에 따라 많은 결과들이 좌지우지될 거라는 것.

그리고 이건 이제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자신은 이미 백주경의 눈에 띄었고, 저를 담는 백주경의 눈은 제 피붙이조차 제대로 색별하지 못하는 검측측한 눈이었다.

애초에 딸을 빌미로 아들을 이용해 먹겠다는 게 어디 정상적인 인간의 사고방식이라고 볼 수 있겠는가…….

그걸 알기에 무시하고 넘길 수가 없었다. 그 눈은, 자신이 끄떡하지 않으면 정말 희우에게 해코지라도 해서 장부를 받아 낼 심산으로 절여진 탐욕스러운 눈발이었다.

결국은 그랬다.

장부를 훔치면 자신이 죽을 가능성이 크고, 장부를 훔치지 않으면 희우가 위험에 처할 가능성이 컸다.

그렇기 때문에 생각은 한 길로 뻗어졌다.

자신과 희우, 둘 다 살 수 있는 방향으로.

외가에 희우를 맡기고 잠시 피신해 있는 방법도 고려해 보았으나 오늘 만나고 온 외숙모의 반응으로 보건대 이는 이루어질 수 없는 가정이었다. 외삼촌은 여전히 희우에게 까닭을 정의할 수 없는 미운털을 꼿꼿이 박아 둔 채였으니까.

이렇게 되면 희본에게 남겨진 방법은 하나뿐이었다.

희우를 데리고 멀리멀리 도망치기.

하지만 그건…….

‘언제까지?’

언제까지. 어디까지. 어떻게?

돈은 어디서 구하고, 머물 곳은 어디로 정하고. 희우가 지금 재학 중인 학교는? 직업은? 앞으로의 생활은? 잘못한 거 하나 없는데도 계속해서 누군가를 피해 다녀야만 하는 희우의 미래는?

최선이되, 아무리 손을 뻗어도 잡히지 않을 어둑서니처럼 까마득하기만 한 방법이었다.

더하여 계속해서 도망을 다닌다는 것도 희망에 근거한 가정일 뿐이다.

자신이 희우를 데리고 도망갔다는 걸 알고 백주경이 사람이라도 풀면? 어떤 식으로든 희우를 납치해서 제 권역하로 끌고 간다면, 상황은 또다시 원점이 되는 거다.

이 바닥에 발을 들이며 언제든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사는 게 일종의 버릇이 되었다. 그것은 곧 죽음과 일맥상통하기에 희본은 더더욱 끔찍했다. 제게만 통하던 섭리가 핏줄이라는 이유로 희우에게까지 뻗쳐 버린 이 상황이 진정 자신을 토 나오게 하고 있었다.

상념이 깊어질수록 사고는 오히려 또렷이 섰다.

적어도 갈래 길에 따라 누가 죽어날지는 분명했기 때문에. 일강 측을 배신하면 자신이 위험해지고, 일강 측을 두둔하면 희우가 위험해진다.

이렇게 흑백처럼 명확한 상황에서 자신이 택할 길은 너무나 당연했다.

물론 곧이곧대로 따르지는 않을 것이다.

희본이 앉아 있던 몸을 일으켜 싱크대로 다가갔다.

“전에 말이야.”

“응?”

“네가 가고 싶다고 했던 나라가 어디였지? 해변이 엄청 예쁘다고 했었던.”

“아, 플로리다? 거기 파나마시티 해변이었을 거야.”

“그래?”

“응. 근데 갑자기 그건 왜 물어?”

“거기 가고 싶어?”

희우는 오늘따라 왜 이렇게 생뚱맞은 소리를 자주 하냐는 듯 오빠를 응시하다가 싱겁게 웃었다.

“가면 좋지. 내가 살면서 언제 그런 델 가 보겠어.”

시원스러우면서도 푸념에 가까운 말이었다.

이렇게 말해 보아도 결국 이루어지지 못할 일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는 듯.

이후 설거지를 마친 희우와 함께 TV를 보다가 아이스크림을 사 오겠다는 핑계로 집을 나선 희본은 모퉁이 안쪽 가로등 아래 담벼락에 기대어 줄담배를 태웠다.

발치에 꽁초가 무더기로 쌓일 만큼의 고민 후, 일전에 걸려 온 백주경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접니다. 거래 조건을 바꾸죠.”

- 조건?

“저는 그쪽 회사 대표직 욕심 없습니다.”

- 그럼 뭘 원하지?

“저랑 희우, 두 사람이 해외로 나가 정착할 수 있는 신분과 비용입니다.”

아주 후레자식이거든.

술김에 뱉어진 엄마의 그 푸념이 물방울처럼 고막 아래로 길게 늘어졌다. 엄마의 그런 적대심을 알면서도 모든 주도권을 그에게 넘겨주고 있을 수는 없었다.

그러니 방법은 하나. 저 역시도 뽑을 수 있는 만큼 뽑아내야 한다. 최소한 희우의 안전만큼은 확보해야 했다.

- 그거면 되겠나?

예. 묵묵함에 압살당할 것만 같은 통화가 끊긴 뒤 목구멍으로 신물이 넘어오는 것만 같았다. 희본은 끝내 그 자리에 다리를 굽히며 주저앉았다.

희우에게 끼칠 위험을 덜어 내려거든 백주경의 거래에 응해야만 한다. 그렇다고 백주경만 믿고 서울에서 계속 머무르기에는, 어차피 서 대표의 손에 죽을 운명이었다. 그렇다면 차라리 신분을 지우고 외국으로 망명이라도 가는 게 나은 선택이었다.

‘이걸…… 어떻게 말하지.’

이제 하나 남은 난관은 바로 그것이었다.

희본은 마른세수를 했다. 손바닥에 닿는 얼굴이 꺼칠했다. 며칠 새 급격히 늙은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 정도로 탈력이 거셌다. 그러나 아직 상황이 끝나지 않았다는 게 무엇보다도 좆같았다. 실상 제대로 된 시작은 하지도 않은 셈이었다.

생각은 곧잘 형체를 잡아 가다가도, 순식간에 물 안에 푼 물감처럼 흩어지고 옅어져 갔다.

“아…….”

막막함에 한숨만 나왔다.

이것조차도 수많은 고민의 갈래 길을 그려 냈다.

말한다면 어디까지 말할 건지부터가 문제였다. 모든 걸 솔직하게 털어놓는다면…… 희우가 과연 가만히 있을까?

피가 섞인 아버지라는 사람이 우리를 이용하려고 하고, 나는 널 지키기 위해서 그 장부를 훔치기로 결심했고, 그에 따라 죽는 결과를 맞이할 수도 있으며, 그래도 너만큼은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대비책을 세워 놨다는 것…….

‘왜?’

힘겹게 털어놓는 상상 끝에 희우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울렸다. 어릴 적에 들었던 그것처럼 티끌 없이 순진하다.

‘우리들 아빠라며.’

‘…….’

‘아빤데 왜 그런 짓을 해……?’

처음에는 혼란스러워할 거고, 곱씹을수록 깊이 상심할 거고, 끝에 가서는 이마저도 제 팔자가 사나운 탓인가 하고 뼈저리게 자책할 거다.

무엇보다 이 거래를 통하여 오빠인 제가 위험해질 수도 있다는 걸 순순히 받아들일지 의문이었다.

아니, 절대 그럴 리가 없지.

희우는 하지 못하게 간곡히 말릴 거고 그럼 자신은 또 흔들리게 될 거다.

당연한 일이다. 이 세상에 죽으러 가는 걸 바랄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하지만 그에 흔들리면 희우가, 재수 없으면 둘 다 개죽음당하는 걸로 끝나는 처참한 결말이 될 수도 있는 일이다.

계획의 성공이라는 건 순간순간의 상황을 모조리 예상하고서야 다다를 수 있는 어느 경지였다.

하나의 변수조차 패색을 유발하는 위협이 되는 체스판 같은 것. 전말을 알게 된 희우가 예상과 다르게 충동적으로 움직일 수도 있다는 위험성은 그에게 있어서 몹시 아찔한 변수였다.

지금의 희본에게는 그것만큼 무서운 게 없었다.

‘대표님께 말씀을…….’

이 생각을 안 해 본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이쪽도 희박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애초에, 이러니저러니 해서 내가 널 배신할 수도 있는 입장이자 위치임을 어떻게 순순히 까발리냐는 말이다.

서 대표가 자신을 아낀다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제 능력과 노력에 상응하는 거지, 인간적인 호감과는 거리가 멀었다.

즉, 제 처지로 말미암아 큰 문제가 야기되면 언제든 깎이다 못해 영역 밖으로 내칠 수 있는 수준의 호감이라는 거다.

그런 와중에 그와 아무런 연고도 없는 희우까지 지켜 달라고 한다? 자신이 서 대표라 하더라도 어이가 없는 데다가 굳이 그래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거다. 단순히 부하 직원과 그 여동생을 지켜 주겠노라, JK 홀딩스와 척을 질 이유가 없다는 거다.

“후우우…….”

많은 이들의 얼굴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가 이내 사라졌다. 가장 마지막에 떠오른 희우의 잔상만이 제일 진했다.

그로부터 사흘 뒤, 백주경으로부터 문자 두 통이 도착했다.

망명 전문 브로커의 신상과 번호, 그리고 차명 계좌를 통해 입금된 돈이었다. 누군가에게 들키지만 않는다면 평생을 어렵지 않게 살 수 있는 정도의 액수였다.

오히려 그걸 보니 백주경이 이 거래에 얼마나 목을 매고 있는지가 확고해졌다. 평생 찾지도 않던 자식들에게 이렇게나 입 벌어지는 수준의 돈을 선뜻 내어 줄 수 있을 만큼 몸이 달아 있는 거다.

그걸 알기에 이제는 정말로 움직일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며칠간 고민을 해 보았으나 역시 희우에게는 말하지 않는 게 좋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어차피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근시일 내로 백주경과 만난다면 뻔히 알게 될 사정이었다. 희본은 무릇 본인이 해야 할 일을 백 이사에게 미루는 스스로의 모습이 비겁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진실을 알게 된다면 남의 입을 빌려서라도 전하게 되는 그때가 적기였다. 백주경, 적어도 자신보다 희우를 무사히 지켜 낼 수 있는 힘과 지위를 가진 그 사람의 곁에 있을 때 말이다.

그때가 돼서는 희우가 어떤 변수를 일으킨대도 백주경의 곁을 쉽사리 벗어나지 못할 거다. 그 역시 장부를 얻어 내기 위해서라도 희우를 잡아 두려고 할 테니까.

희우에게는 암울하고 답답한 결과일지 몰라도, 지금 당장의 희본에게는 그와 같은 철옹성으로 희우의 안위를 지키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거 윤 비서님 선에서 확인받으려면 한 시간 안에 정리해야겠는데.”

“예? 왭니까?”

“윤 비서님 오늘 출장 가시잖아.”

그 말에 희본이 정리된 서류를 넘기던 손을 멈췄다.

“……출장이요? 윤 비서님 말입니까?”

“어어, 이번에 대표님 홍콩 출장. 거기 동행하시기로 했다더라고.”

“그거 쌍칼이 가기로 한 거 아니었습니까?”

“맞는데, 거기에 윤 비서님도 충원됐어. 대강 듣기로는 이번 건이 규모가 좀 크다고 해서 손 거드는 차 그렇게 결정됐다더만.”

대비책을 마련해 두고도 도통 타이밍을 잡지 못하고 있었다. 백주경의 거래를 받아들이는 게 끝이 아니었다. 이제 그걸 실행에 옮길 날짜마저 선별해야만 했다.

그러던 중 희본에게 서 대표와 윤 비서의 출장 동행 소식이 굴러들어 왔다.

“……언제요?”

“엉?”

“언제 출발하신답니까.”

“이따 정오 지나고 바로.”

직감이 곤두섰다.

오늘이 아니라면 앞으로 영영 기회가 오지 않으리라는 걸.

수뇌의 눈을 피해 움직여 이 일을 성공시키려거든, 일강 측에서 자신의 수상쩍은 동태를 조금도 눈치채지 못하는 지금이 절호의 기회였다.

앞으로 정오까지 남은 건 약 한 시간 반.

그간 뜸을 들이던 머릿속에 따가운 섬광이 번뜩였다. 등을 타고 미지근한 식은땀이 흘렀다. 희본은 그 후 몇 분간 멍하니 있다가 핸드폰을 들고 사무실 밖으로 나섰다.

세 번의 심호흡 후 전화를 걸었다.

“오늘 정오가 지나면 바로 진행하겠습니다. 장부 빼내고 눈 돌리는 데 최대 세 시간입니다. 그 이상은 저도 못 버팁니다. 그러니까 반드시 시간 안에 희우 픽업해서 보호해 주시죠.”

쿵, 쿵. 입 밖으로 뛰쳐나올 듯이 뛰는 심장 박동에 희본은 주먹을 꽉 움켜쥐었다. 아직 시작도 하지 않은 일로 피가 차게 식어 가고 있었다.

꼭 이 일로 인해 너는 죽을 운명이라고, 몸이 앞서 말을 해 주는 것만 같았다.

“혹시라도.”

그대로 끊으려던 전화는 그 말을 잇느라 잠시 멈추었다.

“혹시라도 제가 잘못되면…….”

희우를 챙겨 달라, 희우를 잘 부탁한다, 다른 건 됐으니 내가 부탁한 곳까지만 데려다주기라도 해 달라. 많은 당부들이 수도 없이 떠올랐다가 가라앉았다. 희본은 끝내 제대로 문장을 맺음 짓지 못하고 통화를 끊었다.

성공적으로 장부를 빼돌려 달아난 후부터는 일각이 살을 에는 칼바람처럼 흘러갔다.

그러는 동안 몸을 숨긴 채 흔적을 지워 행방을 끊어 놓으며 백주경을 통해 희우와 몇 번 통화를 시도하였다.

처음에는 다급하고 정신이 없어 알아채지 못하던 위화감은 차츰차츰 고개를 들었다.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라는 제 사과에 꼭 남 일 대하듯 예상 밖의 건조한 태도를 보인 부분이 시작이었다.

희우가 평소에 잘 사용하지 않는 어투를 한번 잡아채자 그저 목소리만 비슷한 다른 사람 같았다. 한때 정을 나누었던 백주경을 후레자식이라고 표현하던 엄마의 목소리가 한층 더 강렬하게 되살아나는 순간이었다.

쉽사리 가시지 않은 불길함이 머리끝까지 달하는 순간, 일강 측의 소식 한 자락을 전해 듣게 되었다.

도끼의 손모가지가 댕강 잘려 버렸다는.

그리고 그게 다름 아닌 서 대표의 짓이었다는.

끔찍한 오한이 전신을 내달렸다. 그래도 한솥밥을 먹었던 사이기 때문에 서수혁을 지키는 사단에 대해서는 적잖이 알고 있었다.

개중 도끼는…… 여자에 제대로 미친 놈이었다. 그가 서수혁을 실망하게 하는 일은 매양 좆을 잘못 휘둘러 생긴 사고였다.

번뜩 든 섬찟함과 같은 육감이 이번에도 그 경우가 틀리지 않을 거라고 속삭이는 것만 같았다.

제가 알기로 서 대표는 애인 같은 걸 만들지 않았다. 필요하거나 당길 때에는 일회성 원나잇을 갖기는 하지만 개중 곁에 두기를 허락한 인물은 없었다.

그러니까, 만약 도끼가 손이 잘린 게 또 그 병신 같은 정욕을 참지 못해 내지른 짓이었다면. 그리고 그게 서 대표 심기를 거스르게 만들, 여자였다면.

그리고 그게 만약…… 희우라면.

아닐 거라고 생각해 보아도 타당성은 점점 짙어만 갔다. 자신이 이런 사고를 친 그 짧은 새에 설마 서 대표의 침대를 꾸준히 덥히는 애인이 생겼을 리도 없고, 그렇다면 적어도 어느 정도 보존 가치는 유지해야 하는 인질이라면…….

희우가 일강 측에 잡혀 있다?

이 줄다리기는 제가 빼돌린 장부와 백주경 쪽이 지키고 있을 희우를 트레이드하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만약 처음부터 백주경이 희우를 보호하고 있지 않았다면……?

장부가 사라지자마자 서 대표가 한 발 더 빠르게 움직여 동생을 데려갔다면?

씨발!

생각이 불온한 쪽으로 빠지는 순간 백주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금 희우와 통화할 수 있습니까?”

- 그럼.

백주경은 자연스레 통화를 건네주었다.

- 응, 오빠.

한번 의심이 들자 완전히 희우와 딴판으로 들리는 목소리가 고막을 긁었다.

이가 으득 갈리려는 걸 참고 물었다.

“이제 다 끝났어. 희우야. 우리 플로리다로 가면 처음 이사했던 날 먹었던 거 만들어 먹자. 기억하지? 떡 넣어서 끓여 먹은 라면.”

- 응, 그럼. 좋아.

끓는 심경을 삼키며 소리 없이 웃었다. 웃는데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은 처음이었다.

반박을 했어야지. 떡 넣어서 끓인 라면이 아니라 떡볶이였다고 정정했어야지. 오빠가 처음으로 해 준 음식이라 더럽게 짜고, 싱겁고, 그래서 맛없었다고 했어야지. 고춧가루를 들이부은 듯이 아주 새빨간 떡볶이라 평생 못 잊을 거라고 말했었잖아.

끝내 녹슨 희망에 속이 문드러졌다.

희본은 대화를 갈무리하고 백주경을 바꿔 달라고 했다.

“사흘 뒤 새벽 3시, 인천 종합 어시장 G-7 구역에서 봅시다. 그때 장부 넘기겠습니다.”

통화를 마친 뒤 흔적을 지웠다. 그렇게 스스로를 그림자에 물들이며 새벽의 바람에 몸을 숨긴 채 강원도 외곽 도로를 달렸다.

최악의 수를 가늠하고 며칠 전부터 머리를 보다 빡세게 굴렸다. 그러다가 떠올린 곳이 바로 엄마와 희우와 함께 몇 년을 지내 온, 강원도 별장이었다.

백주경이 기회를 엿보며 사람을 붙였다는 건 진작 알 수 있었다. 청소부 일을 하며 가장 먼저 깨우친 건 뒤에 사람이 붙나 안 붙나를 감시하는 거였으니.

그렇기 때문에 일단은 장부를 숨기는 게 급선무였다. 이게 백주경 손으로 넘어가게 되면 모든 게 끝이다.

제 목숨도, 희우의 목숨도.

다행히 외곽 중에서도 외곽에 위치한 별장은 일반 사람이라면 쉽게 진입할 수 없는 구석진 곳에 자리했다. 주변이 나무로 빽빽하게 가려져 있어서 육안으로 구분하기도 어려웠다.

차를 타고 들어온다고 하여도 커브길 한번 잘못 들면 길을 잃어버리기 십상인지라 자주 왕래해 본 이들만이 행로를 바로 잡을 수 있었다.

몇 년 만에 들른 별장 지하 화실은 케케묵은 먼지 내로 가득했다. 그런데도 그 체취의 가장 낮은 하단부에는 아주 희미하게 유화 냄새와 연필 냄새가 섞여 있어서 눈앞이 아찔해졌다.

정신 차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머리통을 세게 퍽퍽 내려쳤다. 지금부터는 자신이 어떻게 움직이는지에 따라 누군가의 목숨이 생과 사를 오고 가는 격이었다.

벽면 상단부에 설치된 환기용 창문에 빛이 새어 나가면 안 됐기에 핸드폰의 가는 플래시에만 의존하여 기다랗고 웅장한 천 가리개를 걷어 냈다. 엄마가 평생을 일기처럼 그려 온 그림들을 조심스럽게 벗겨 내며 기어이 눈물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창고 구석에 먼지를 그대로 뒤집어쓴 타카와 천, 그 외 장비들을 꺼내며 희본은 잠시간 머리통을 부여잡았다.

차근차근.

차근차근.

해결하기 위해서 차근차근…….

우선 일강 측에서 저를 쫓는 건 장부 때문이다. 장부를 까지 않은 상태에서 전달만 한다면 일단은 활활 타오르는 불을 끌 수 있으리라.

하지만 과연 서 대표가 저를 용서하고 받아 줄지는 의문이다. 자신이 죽는 건 두렵지 않았다. 이 바닥에 들어온 이래로 이미 내버린 목숨이라는 건 시시각각 염두에 두고 있었다.

걱정이 되는 건 오직 희우 하나뿐…….

희우가 살 수 있는 방법.

희우를 이 상황에서 빼낼 수 있는 방법.

선을 긋는 것밖에 없었다. 다 오빠가 저지른 짓이고 자신은 아무것도 몰랐다고.

희본은 그 즉시 품에 이고 온 장부를 꺼냈다. 그리고 평소 윤서원이 크로스 체크까지 해 가며 확인하던 중요 페이지 열 장을 북북 찢어 냈다. 그것들을 일일이 그림 한 점 한 점 사이에 끼워 넣는 짓을 벌이는 사이에 어느덧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들었다.

그렇게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부단스럽게 굴던 움직임이 멎은 건 연필 하나 들고 빈 종이를 펼쳤을 때였다.

뭐라고, 해야 하지…….

두서없이 치켜 오르는 생각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멍해졌다. 어디서부터 얘기를 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걸 골몰하고 있자니 다 그친 줄 알았던 눈물이 새삼스레 터져 나왔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뭐라고 한마디라도 했었어야 했나?

하지만 뭐라고?

힘 빠진 실소만 흘러나왔다. 어차피 이렇게 후회해 봤자, 과거로 돌아간다면 자신은 몇 번이고 똑같은 선택을 했을 거다. 그런데도 자꾸만 후회가 든다.

숨통을 조이는 감정들이 머리를 쪼개 놓았다. 그 과부하를 이기지 못하고 터진 눈물이 델 듯 뜨거웠다. 원래 눈물의 온도가 이렇게나 높았던가. 그런 걸 생각하며 한 자 한 자 어렵게 적어 넣었다.

희우는 몰랐을 아빠 얘기, 알지 않았으면 했던 속사정, 위협 앞에서 든 충동과 그 여파로 벌어진 이 망할 현실들.

일강 측을 해결한다고 해도 백주경이 문제였다. 제 코앞까지 다가온 장부를 놓치지 않으려고 할 텐데. 장부를 얻지 못한 데다가 저와 희우의 해외 망명 도주금으로 쓸데없이 돈까지 쓴 걸 감안하면 정말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

‘일단은…… 일단 희우를 데리고 오는 데에 집중하자.’

이제 떨어져 있는 것보다 제가 데리고 다니는 게 더 안심이 될 것 같으니까.

백주경보다 더 후환이 두려운 서 대표의 화를 달래 놓는 식으로 급한 불을 끄는 게 급선무로 다가왔다.

희우가 일강 측에 인질로 잡혀 있으리라는 건 어찌 됐건 추측에 불과했다. 이대로 장부를 가지고 일강으로 돌아가면 가장 최악의 경우,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개죽음을 당할 수도 있는 노릇이기에 보험을 들어 놓는 걸 잊지 않았다.

그게 바로 장부에서 찢어 내어 숨겨 둔 누락된 열 페이지였다.

이건 제 무기가 될 수도 있지만 희우가 살 수도 있는 길이었다.

만일 자신이 잘못되기라도 하면…….

혹시 운이 나빠 언제 죽을지 모를 이 바닥에서 이런 필사적인 습관은 자연스럽게 몸에 밴 생리였다.

이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상황이 빌어먹게 나빠진다면 남은 건 희우의 운과 직감, 그리고 기억력에 맡기는 수밖에 없었다.

편지를 함께 넣어 두었으니 희우라면 영리하게 상황을 헤쳐 나갈 수 있으리라.

문득 동생의 팔자가 지나치게 사납다는 오 선생의 말이 떠올랐다. 주변인을 다 잡아먹을 팔자라고 하였던가.

빌어 처먹을 무당 같으니라고.

상황이 이렇게 치달아도 희본의 생각에는 변함이 없었다. 그 무당은 사짜고 괴짜였다. 희우의 팔자는 결코 사납지 않았다. 그 점에 있어서는 다른 생각 없이 그저 걱정만 되었다.

희우는 주변인의 죽음에 대한 트라우마가 심했다. 그러니 혹 자신이 잘못되면 또 다 본인의 탓이라며 뼈아프게 자책하는 건 아닐지…….

그때가 되면 아니라고 단호히 말해 줄 자신도 곁에 없을 텐데.

제가 사라진 자리를 대신해 줄 누군가가 나타나 주길 기도해 본다. 지금껏 인연이라는 인연에는 모두 버림받은 우리 둘이니까. 이제는 조금쯤 믿고 기댈 수 있는 연이 생기기를.

내가 가진 운까지 다 너한테 갔으면 좋겠다. 나에게 예정된 모든 운을 너의 앞길에 양도할 수만 있다면.

희본은 구부리고 있던 몸을 이만 일으켰다.

울창하게 불거진 나무들 사이에 숨겨 둔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조용히 도로변으로 빠져나왔다. 인적이라고는 저밖에 없는 듯한 외곽 도로를 달리며 마음을 다독이려 애썼다.

긴장이 끓는 손바닥이 저렸다. 서 대표에게 장부를 가지고 돌아가기로 결정한 이상 팔이나 다리 하나 잃을 건 각오했는데도 쉽게 진정이 되지 않았다.

일이 여기까지 악화된 건 전적으로 제 탓이었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역시나…….

‘믿어 보고 싶었나.’

그래도 당당히 아버지라고 나타난 작자에게, 한 번쯤은 기대 보고 싶었던 걸까.

엄마가 저와 희우에게 아낌없이 주었던 사랑을 다시 한번 겪어 볼 수 있을까 해서. 그럼 지금처럼 이렇게 하기 싫은 일까지 떠맡아 가며 아등바등 살 필요는 없지 않을까 해서. 적어도 희우는 고생을 안 시킬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럴 때 보면 결핍의 일부가 여실히 드러났다. 정을 못 받고 자라서, 그런 면모가 보일 대상에게는 지나치게 방심하는 면이 없잖아 있었다.

그게 저를 완전히 고꾸라뜨릴 한 발이 될 줄도 모르고. 등신, 머저리.

지나치게 긴 꿈을 꾼 기분이었다. 그리고 지금도 이어지고 있는 것만 같았다. 그 몽롱한 감각에서 깨어난 건 맞은편에서 기습처럼 나타난 헤드라이트의 불빛 때문이었다.

옆 차선이 아니라 정면에서 달려오는 차는 아주 대놓고 보닛을 들이박을 기세였다.

끼이익-!

급히 핸들을 꺾었다. 성마르게 행선을 변경한 차가 가드레일로 돌진했다.

콰아앙!

포악스러운 마찰음과 함께 차 내부가 격렬하게 흔들렸다. 유리창에 머리를 박은 희본은 그 부위를 부여잡은 채로 조수석을 살폈다. 내부 충격에 굴러간 장부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걸 다시 주울 새도 없이 바깥부터 살폈다.

연기가 올라오는 풍경의 바깥에서 인영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그치.

역시, 이렇게 되는 거지…….

얼추 짐작하고 있던 일을 맞닥뜨린 이처럼 희본은 침착하게 차에서 빠져나왔다. 아까부터 지끈대던 관자놀이는 기어이 살갗이 찢어졌는지 손바닥에 피가 묻어났다.

그 부근을 짓누르며 바라보는 곳에서 연기를 뚫고 한 사람이 나타났다. 지난번 백주경과의 독대 자리에서 스치듯이 보았던 그의 수하였다.

“이 달밤에 어딜 그리 급하게 다녀오신대? 체조라도 하고 오셨나?”

“알 바야?”

뿌연 연기를 두른 남자가 재밌다는 듯 킬킬 웃다가 금세 정색을 했다.

“에이, 씨벌. 아무리 봐도 한 입 거리도 안 되게 생긴 샌님이잖아. 너 윤 머시기랑 똑같이 짱구 굴리는 타입이라면서?”

“…….”

“적어도 쌍칼 같은 육체파여야 떠 볼 만하지. 이건 뭐, 어떻게 회를 쳐도 가오가 좆떨어지겠는데.”

그런 말을 읊조린 남자가 내내 늘어뜨리고 있던 손을 움직였다. 끝이 단단히 뭉친 쇠망치가 남자의 어깨에 무게감 있게 걸쳐졌다. 딱 보아도 저걸로 저를 머리부터 발끝까지 흠씬 두들겨 팰 태세였다.

“약속은 사흘 뒤일 텐데.”

“아아, 그랬는데. 우리 이사님이 지금 받고 싶으시다네?”

“…….”

“너랑 전화할 때 목소리가 이상했다면서 말이야. 우리 이사님 너무 센시티브 하시지 않니?”

희본은 픽 웃고는 허리춤으로 손을 옮겼다.

뒤쪽에 숨겨 둔 잭나이프를 꺼내어 손목을 가볍게 튕기자 번쩍, 빛을 내는 날붙이가 등장했다.

“센시티브 스펠링은 알고?”

차분한 희본의 받아침에 미소가 깃든 남자의 입매가 꿈틀거렸다.

“우리 샌님, 대가리가 맛이 갔어? 지금 상황 파악이 잘 안 되나 본데…… 됐고, 장부는 얻다 놨어?”

어깨에 걸친 망치를 한들거리는 남자의 뒤로 백주경의 수하들이 하나둘씩 모습을 드러냈다. 거기까지만 봐도 오늘 저를 살려 보낼 생각이 없다는 걸 예측할 수 있었다.

죽음이 눈으로 보이는 순간이었다.

그걸 염두에 두며 희본이 웃었다. 엄마를 빼닮아 들꽃을 떠올리게 하는 어여쁜 미소가 월광에 찬란히 드러났다.

곧 그가 가운뎃손가락을 미끈하게 폈다.

“좆 까, 씨발아.”

백주경은 결코 누락된 페이지를 찾지 못할 거다.

별장까지 어찌 운 좋게 발견할지 몰라도 비밀스러운 지하 화실 속, 완성된 그림의 천 안에 숨겨 두었다는 건 꿈에도 모를 터였다.

그러니까 희우야.

너라도 찾아.

그리고 너라도 살아라, 제발.

<광시증> 에필로그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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